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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사적) 금관총, 일제강점기 신라 금관이 처음 발견된 곳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경주 대릉원 128호 무덤인 금관총(金冠塚)이다. 1921년 경주 도심에서 주택공사를 하던 중 금관이 우연히 발견되어 신라고분의 존재를 알렸던 곳이다. 금관총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길이 48 m, 높이 13 m 규모로 대릉원 고분 중 중간 정도이다.  금관 및 금제관식(국보)과 금제 허리띠(국보)를 귀걸이.팔찌 등 장신구와 토기류 등 다양한 종류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2015년에는 금관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다시 실시되어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 끝 장식을 비롯한 새로운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경주 대릉원 금관총>

금관총은 일제강점기 발굴 당시부터 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봉분은 원형이 파괴되어 있었다.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금관총임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고 단순한 공원 조경으로 보인다. 현재는 봉분의 일부만 남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뒷편에서 본 모습>

금관총은 내부에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목관을 안치 했다. 목관은 옻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관 주위에는 덩이쇠가 열을 지어 있 큰칼 등의 무기가, 안쪽에는 신발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많은 유무들이 출토되었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목걸이, 금제 허리띠, 팔찌, 금반지 등으로 치장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작성한 조사보고서에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금관총 목관 내 출토된 유물>

<금관총 목관(棺) 내 유물 배치>

<일제강점기에서 작성된 보고서 자료>

금관총 금관은 신라 금관 중 가장 먼저 발견된 유물이다. 가운데에 ‘出’자(또는 나뭇가지 모양)과 양쪽에 사슴뿔모양의 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신라금관이다. 장식의 앞면에는 133개의 달개와 57개의 곱은옥이 달려 있다. 세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한 주의 연속 점무늬, 관테에는 파도무늬가 새겨져 있다. 사슴뿔과 나무가지를 형상화한 시베리아 샤먼의 관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금관총 금관(국보)>

가슴걸이는 금관과 같이 출토되고 있는데 구슬로 가슴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가슴걸이>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는 금관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하고 있는 유물이다. 원래 천이나 가죽에 덧대었던 것인데 금속제 장식만 남아 있으며, 드리개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허리띠는 길이 109 cm로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드리개는 17개로 옥(玉)같은 장식품과 칼, 향낭, 물고기 등을 표현하고 있다. 드리개는 유목민들이 이동할 때 허리띠에 매고 다녔던 생활도구들을 표현하고 있다.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

<굵은고리 귀걸이, 금>

<팔찌, 금>

<팔찌와 반지, 금>

<금동신발>

<곱은옥>

머리 윗쪽에 부장품 상자 속에는 각종 그릇, 장식품, 말갖춤, 무기 등이 껴묻거리로 묻어두고 있다. 중요 출토유물로는 새모양 관꾸미개와 관모(국보), 초두, ‘尒斯智王(이사지왕)’ 글자가 새겨진 큰칼, 유리잔 등이 있다.

<부장품 상자 속에서 출토된 유물>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으며 모자 위로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금관총 관모(국보)>

금제관식(국보)은 관모 위에 꽂아서 사용한 새날개 모양 장식이다. 이 장식은 삼국시대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의 화려한 황금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금제관식(국보)>

<고리자루큰칼>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금관총 출토 유물을 정리하던 중 고리자루 큰칼의 칼집 끝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새겨 쓴 글자를 확인하였다. 판독결과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글자였다. 또 칼 손잡이 부근에서 ‘尒(이)’자와 이사지왕이 새겨진 칼집 끝 뒷면에서도 ‘十(십)’자가 드러났다. 금관총의 또 다른 칼에서도 ‘八’, ‘十’, ‘尒’라는 글자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고리자루칼에 글자가 새겨진 부분>

<초두(鐎斗), 청동>

<금동제 뿔잔>

<금동제 신발>

<청동제 방울>

<투구 복발, 방울, 팔가리개 비갑(臂甲)>

<금제 장식구, 금동제 장식구>

<솟을장식, 말띠꾸미개>

<금동제 고배, 금동제 합, 유리제 용기, 금제 완>

<가는 고리귀걸이, 금>

<유리잔>

<장군>

네귀달린 청동항아리는 고구려에서 보내온 것을 추정되는 유물로 무덤 주인이 고구려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네귀달린 항아리, 청동>

<청동완>

<뚜껑접시, 토제>

<짧은목 항아리, 토제>

금관총의 발견과 신라 고분 조사
우리나라에서 근대 고고학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인 연구자는 신라 고분을 여러 번 조사하였으나 돌무지덧널무덤의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그들은 공사도중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으로 인해 신라고분에는 화려한 유물이 묻혀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연속해서 금령총(1924), 식리총(1924), 서봉총(1926) 등을 발굴하였다. 이러한 조사와 연구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였고 일본인이 담당했다. 당시 금관총의 조사와 연구는 교토제국대학 하마다 고사쿠 교수가 주도하고 우메하라 스에지, 고이즈미 아키오, 사와 슌이치 등이 참여했다. 현재 일본 교토대학에 보관중인 보고서 원고와 사진 자료는 당시 금관총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4년)

<금관총 발굴 보고서, 일본 교토대학교, 1924년, 1927년>

<발굴당시 금관총 금관 사진>

<발굴당시 금관총>

봉황대에서 금관총을 바라보다’, 일제강점기(1924년)에 일본이 그린 금관총과 주변 풍경이다. 금관총이 위치한 노서동 일대는 경주 도심 주택가로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금관총을 그린 그림>

금관총은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9월에 가옥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고분이 노출되어 긴급하게 수습 조사가 이루어졌다. 수습 조사 결과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화려한 금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되어 ‘금관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201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 끝 장식을 비롯한 새로운 부장품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지상식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는 무덤구조가 새롭게 확인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금관총이 있는 경주 노서동 고분군>

<경주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 주요 무덤들>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