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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움직이는 공방

불상나 불화 등을 조성하는 불사는 사찰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승려 장인들은 불사가 있는 사찰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매번 작업을 위해 먼길을 떠났으며 때로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승려와 함께 모여 협업을 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서로의 개성이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들은 다양한 표현으로 불렸는데 그림을 그리는 관직과 같은 이름인 ‘화원’이 가장 많이 쓰였다. 당시 전문적인 기술이나 예술적 소양이 높아던 승려 장인들은 불사 뿐 아니라 성곽을 축성, 다리의 건설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많은 발자취를 남겨 놓고 있다.

상주 남장사 불사 과정을 기록한 <불사성공록>에는 전국에서 초빙된 70여 명의 승려 장인들이 작업했던 내용들을 세부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15. 상주 남장사 불사 과정을 기록한 책, 불사성공록(佛事成功錄), 조선 1788년, 종이에 먹, 상주 남장사, 보물>

해남 대흥사의 13대 강사 중 한 사람인 영파 성규가 1788년 상주 남장사에서 있었던 불사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서울.경기 지역의 화승 상겸과 문경 대승사를 권역으로 활동하던 대승화공 홍안, 전라도 지역의 호남화공 쾌윤 등 70여 명이 함께 모여 20여 일에 걸쳐 대형 불화인 괘불과 지장보살도, 시왕도를 그리고 명부전에 빠진 상을 보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사를 기획해 실행하는 과정과 지역을 넘어선 화승의 협업, 동참한 이들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이때 절에서 의견이 하나로 모여 괘불을 만드는 큰 일을 시작해 장인 70여 명을 모아 장면을 나누어 그리게 하였다. 호탐의 쾌윤과 사불산의 홍안은 유명회(幽冥會)를, 경성의 상겸은 영산회(靈山會)를 그렸는데, 4월 초파일 우리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 붓을 들어 20일에 붓을 놓았다.” – <불사성공록>(1788) 중에서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영사 목조 전패와 불패>에는 17세기 금강산 여행을 떠났던 승려 장인들이 여행 도중 울진 불영사의 부탁을 받아 잠시 머무르면서 불사를 지원했던 내용을 기록해 놓고 있다.


<불영사 목조 불패> <16. 화승 철현이 잠시 머물며 만든 전패와 불패, 불영사 목조전패와 목조불패, 철현 등 3명, 조선 1678년, 울진 불영사>


<불영사 목조 전패>

포항 오어사의 화승 철현, 양산 통도사의 영현과 탁진은 함께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울진 불영사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주지인 혜능 스님이 전각에 모실 불전패(佛殿牌) 제작을 요청했습니다. 큰 전패는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작은 불패는 불보살상의 이름을 새겨 법당에 새워 두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전패 뒷면에는 사찰이 만세토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며 불패 세 점과 전패 세 점을 조성했다고 적혀 있지만 지금은 두 점만 전합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매순간 처한 상황에 맞춰 불교미술품을 발원하고 제작했던 승려 장인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경상도 운제산 오어사의 철현과 영축산 통도사의 영현, 탁진 등이 함께 바닷길을 따라 풍악(楓嶽, 금강산)을 향하던 중 강원도 불영사를 방문했는데, 경관이 매우 뛰어나고 자취가 성스러워 마음이 혼연히 기뻐 여름 한 철을 머물게 되었다. ~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움직이는 공방, 이동하는 승려
승려 장인에게는 요청된 상황에 따르는 ‘장인(匠人)’이라는 정체성과 전 공정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작가’라는 정체성이 함께 있습니다. 불사가 있는 사찰을 중심으로 시주자와 재료가 모이고 불사를 감독하고 증명하는 절차가 진행되었기에 승려 장인이 불사 장소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승려 장인의 작업 공방은 불사가 있는 사찰에 차려졌는데, 이때 누각이나 암자를 임시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때로 근거지에서 불화나 불상을 조성한 후 봉안처로 보내기도 했고, 여정 중에 요청을 받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매번 작업 환경이 바뀌는 상황을 견뎌내며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달려갔고, 이들이 자리한 곳이 곧 부처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공방이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길 길위를 걷는 승려
승려 장인은 근거지가 되는 사찰과 자신이 속한 승려 문중이라는 인적관계를 기반으로 작업했기에 활동 범위가 넓었습니다. 본디 승려는 머물되 항사 떠날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을 살지만, 특히 승려 장인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불사가 있는 곳이라면 먼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승려 장인이 모여 협업하며 개성과 개성이 만나 영향을 주고받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남장사 십육나한도>는 비슷한 내용을 그렸지만 지역에 따른 화풍이 반영되어 그 차이점을 살펴볼 수 있다.

<17.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이 함께 완성한 십육나한도, 남장사 십육나한도, 조선 1790년, 비단에 색, 상주 남장사>

<남장사 십육나한도>

두폭의 그림은 나한을 표현했지만 서로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 활동한 영수.위전과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상겸 등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 집단이 나누어 그렸기 때문입니다. 영수와 위전이 그린 나한도에는 오색구름과 꽃으로 둘러 싸인 산을 배경으로 바위에 나한이 앉아 있는데, 강렬한 채색의 대비가 돋보입니다. 상겸 등이 그린 나한도에는 바위 사이로 자라는 소나무 옆에 섬세한 필치로 나한을 그렸습니다. <남장사 십육나한도>는 1788년 <불사성공록>에 기록된 불사 이후에도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경성화공과 문경 대승사 지역에서 활동한 대승화공이 협업한 사례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18. 화승 축연이 그린 금강산을 유람하는 나한, 통도사 십육나한도(제10존자), 축연 등 2명, 1926년, 비단에 색, 통도사 성보박물관>

금강산 구룡폭포 앞에 앉아 있는 나한을 그린 특이한 그림입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불사를 따라 이동하는 승려 장인의 삶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축연은 1915년 ‘금강산 유점사의 화승’으로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금강산 관광이 유행하고 철로가 개통되면서 관광안내서와 사진첩이 간행되었습니다. 축연은 당시 유통되던 시각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습니다. 나한보다 화면 중앙의 폭포를 강조한 파격적인 구상이 흥미롭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 그들의 이름을 찾아서
조선시대 승려 장인은 ‘화원(畵員)’을 비롯해 ‘화사(畵師), ‘양공(良工, 기술이 뛰어난 장인)’, 금어(金魚,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승려)’ 등 다양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조선의 승려 장인을 일컫는 호칭으로는 ‘화원’이 가장 많이 쓰였고, 조각승과 화승을 따로 구분해서 사용한 공식 명칭은 없는 듯합니다. 다만 19세기 말 이후에는 이들을 존경하는 뜻을 담아 ‘불모(佛母)’로 부르기도했습니다. 특정 승려 장인에게는 ‘묘수장사(妙手匠師, 빼어난 솜씨의 승려장인), ‘교장(巧匠, 솜씨가 교모한 장인), ‘호선(毫仙, 붓의 신선), ‘존숙(尊宿, 본보기가 될 만한 승려)’과 같은 특별한 수식어가 붙기도 했습니다.

승려 장인의 시대
조선 후기 승려 장인에는 예배 대상인 불상과 불화를 만드는 조각승과 화승 뿐만 아니라 불전을 짓는 건축승과 기와를 굽는 기와승, 범종을 만드는 주종승(鑄鐘僧), 비석과 목판에 글을 새기는 각자승과 판각승, 목재 불구(佛具)를 만드는 목공예승 등 여러 분야가 있었습니다. 일부 승려 장인은 분야를 넘나들며 사찰 곳곳에 다양한 불교미술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비록 당시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예배 대상을 비롯해 사찰의 상당수를 만들어 낸 승려 장인은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불교미술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선 후기는 ‘승려 장인의 시대’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선시대 승려들은 사찰 건축 등 불사를 주도했을뿐 아니라 사회에서 필요한 분야에 적극 참여하였다. 성곽의 축성이나 다리 건설 등에서 승려 장인은 많은 역할을 했으며 수원화성을 비롯하여 전국의 읍성과 산성, 돌다리 등에 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19. 승려, 성곽을 짓다, 화성성역의궤, 조선 1801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단청에 참여한 승려 장인 명단>

조선시대 승려 장인들은 불교미술품 제작 외에 성곽이나 왕릉의 조성처럼 국가적인 공사에도 참여했습니다. 정조의 꿈이 담긴 새로운 도시 수원 화성의 축성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는 성을 쌓는데 참여한 승려 장인 73명의 이름과 거주 지역, 참여 일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여에 참여한 여러 승려 장인 가운데 나무를 잘 다루어 편수(篇首, 책임을 맡은 기술자)가 된 강원도 김화 출신 굉흡의 활약이 주목됩니다. 그는 장안문과 방화수류정 건축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은 이처럼 나라의 비중있는 건축 사업에 동원될 정도로 기술과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남북 문루는 15일 전데 단청을 시작했는데, 화공 수가 적어 분배할 수 없어서 관문을 발송한다. 경내 각 사찰에서 솜씨가 뛰어난 화승을 일일이 수색 탐방하여 오는 15일까지 공역 장소에 대기시키고, 덕사(德寺, 양주 흥국사) 화승 연흥을 도화승으로 임명하여 보내니 즉시 전교한 후 사람을 올려 보내서 지연되지 않도록 한다.” – <화성성역의궤> 권3 양주목, 1794년 9월11일(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0. 중흥사에서 모임에 함께 한 승려들, 금란계회도, 조선 1857년,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주요 장면>

북한산 중흥사 인근 야외에서 안시윤이 벗들과 가진 모임을 그린 것입니다. 중흥사는 조선 후기에 북한 산성을 쌓은 후 승군을 총괄하는 총사령관격인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 머물던 사찰입니다. 19세기에는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 등 많은 문인이 중흥사를 방문하여 시를 지으며 승려들과 교유했습니다. 그림에는 안시윤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승려들이 무리를 지어 편하게 앉아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구고 있습니다. 고깔을 쓰고 염주 목걸이를 한 스님 세명은 중흥사 승려 태월, 수월, 한파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문인 모임에 승려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렸음을 잘 보여주는 기록화이자 풍속화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1.화승 의인이 그린 선비들의모임, 을축갑회도, 의인, 조선 1686년, 비단에 색, 서울역사발물관>

청주 보살사의 화승 의인이 을축년(1625년)에 청주 지역에서 출생한 동년배 모임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모임을 그림으로 남기자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붉은색을 사용한 얼굴묘사와 길게 늘어진 옷 주름선 등은 고승의 초상화인 진영(眞影)의 표현방식과 유사합니다. 이 작품으로 불화뿐만 아니라 일반 회화까지도 승려 장인이 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화승은 동실대를 살아간 다른 신부의 사람들 모임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2. 화승 혜호가 그린 삿갓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소동파입극도, 혜호,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화승 혜호가 그린 북송대 문인 소식의 모습입니다. 소식은 소동파라는 호로 더 유명합니다. 혜호는 19세기 경기.강원 지역에서 활동하며 금강산 일대 사찰 불사를 주로 담당했고, 다른 화승들이 잘 그리지 않는 유배 중인 소동파 그림을 모사했습니다. 아마도 김정희 제자인 허련의 그림을 옮겨 그렸을 것입니다. 당시 문예계를 이끌던 김정희는 혜호의 스승인 화담 경화 문중의 승려들과 긴밀하게 교류했고, 혜호도 김정희나 그의 제자들과 관계를 쌓았습니다. 당대 문인과의 폭넓게 교류했던 승려 장인의 작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시대와 함께한 승려 장인
승려 장인은 출가한 수행자였지만 사회의 한 일원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해냈습니다. 승려 장인이 남긴 결과물은 불상과 불화를 비롯한 사찰과 관련된 것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나라와 관청의 부름을 받아 궁궐과 도성을 짓거나 심지어 마을에 다리를 놓는 일까지 크고 작은 일에 동원되어 전문성을 발휘했습니다. 또한 당대 문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하며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내용을 표현했습니다. 속세를 떠났지만 그들은 대중과 더불어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은 불상이나 불화 등을 제작하는 기술자이나 예술가 역할 뿐 아니라 불사를 위한 모금활동, 전문 기술자의 초빙 및 역할 분배 등 제작자로서의 역할도 하면서 사찰건축이나 불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23. 화승 혜식 등이 그린 영취산에서의 석가모니부처 설법 장면, 영취사 영산회상도, 혜식, 조선 1742년,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했던 혜식을 비롯한 화승 일곱명이 그린 영산회상도입니다. 조선 후기 승려 추파 홍유가 쓴 <안음영취사기>에 따르면 당시 사찰의 주지였던 보안의 주도로 쇠락한 영취사를 7년에 걸쳐 재건한 후 대웅전에 봉안할 불화 네점을 조성했습니다. 새로 그린 대웅전 불화 가운데 이 불화만이 전합니다. 하단부에는 붉은 화기란을 마련해 불화를 제작한 일자와 화승, 영취사의 승려들과 시주자의 이름을 금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불사의 성대함을 반영하듯 ‘대영산’을 그려 봉안했다고 했으며, 불화를 그린 화스의 모임을 비수갈마천의 모임이라는 뜻인 ‘비수회’ 로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수갈마천에 빗대어 종교적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장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4. 혜식의 평생 소원이 담긴 발원문,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40년, 종이에 먹, 대구 파계사, 보물>

<뒷부분>

파계사 원통전 건칠관음보살좌상의 발원문으로, 관음보살상의 개금뿐만 아니라 인근 사찰과 소속 암자의 불사를 진행한 내역이 기록되었습니다. 1740년에 있었던 영조대 왕실 불사의 총감독은 도화원 혜식이었습니다. 혜식은 불보살을 그려 각각 존상을 갖추는 것이 자신의 평생 소원임을 밝히고 밀기, 명준, 위순, 성청 등 열세 명과 거의 2년에 걸쳐 인근 지역과 암자의 불상을 개금하고 불화 세트를 그렸습니다. 단순한 제작자를 넘어 평생의 소원으로 불사를 기획한 승려 장인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발원문입니다. “도화원 혜식의 평생 소원인 불보살을 그리고 존상을 갖춘 일과 횟수를 가려 적은 기록”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5.화승 철유가 자신을 그린 그림, 자화상, 철유, 20세기 초, 비단에 엷은색, 간송미술문화재단>

한 승려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고요히 앉아 있습니다. 먼 곳을 응시하는 눈매는 수행자의 내적 경지를 드러내는 듯 합니다. 이 그림은 근대 화승인 철유의 자화상입니다. 철유는 불화 뿐 아니라 산수화, 신선이나 불교 고승을 그린 그림에도 뛰어나 명성을 얻었고, 근대 최고 화승으로 당시 신문에도 몇 차례 소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전하는 유일한 화승의 자화상입니다. 철유는 법식을 갖춘 노승 혹은 화승의 모습이 아닌 편안한 노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담담히 표현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 철유(1851~1971년)는 어떤 인물일까요?
속세의 성은 김씨이고 섭호는 석용입니다. 건봉사 화승으로 알려진 혜호에게 가르침을 받아 약 40년간 불화를 제작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 수화승으로 활약하며 30점 가량의 불화를 남겼고, 일제강점기에는 축연과 함께 당대 최고의 화승으로 불렸습니다. 금강산화파의 대표 화승으로서 불화와 산수화에 모두 뛰어났다고 합니다. 철유는 금강산 표훈사, 신계사, 유점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의 불화를 그리고 불상을 개금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제작자에서 기획자로
승려 장인은 제작자뿐만 아니라 시주자나 화주로도 참여하는 등 하나의 불사에서 두가지 이상의 소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여러 불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불교 교리와 도상을 깊이 이해했기에 불상이나 불화의 내용이 맞는 지 살펴보는 증명으로도 초빙되었습니다. 옛 불화와 불상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수행하던 이들이 어느새 화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어 후배와 제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또한 점차 제작자에서 불사를 일으키는 기획자가 되어 후원을 하고 사원 중수에도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사의 소임, 인연을 맺은 사람들
소임은 맡은 직책이나 임무를 뜻합니다. 사찰 내에서 위계에 따라 혹은 불사가 있을 때마다 승려는 그에 적합한 다양한 역할, 즉 소임을 다했습니다. 불상과 불화를 만드는 것 역시 승려 소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교리를 잘 아는 경험 많은 승려는 법식대로 바르게 진행되는지 감독하는 역할을 하고, 어떤 승려는 속세를 다니며 시주를 유도하고 동참자를 모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불사를 위해 젓가락을 준비하는 사소한 일부터 전각을 관리하는 일까지 모두 소임의 하나입니다. 크고 작은 역할의 구분 없이 정성스럽게 임한 이들의 마음은 만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부처의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