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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화승, 불화를 그리는 승려 장인

불화(佛畵)는 불교적인 내용을 그린 그림으로 불전에 모셔 놓고 예배를 드리거나 신도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렸다. 불화를 언제부터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교 경전에 부처의 형상을 그려 예배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오래전부터 그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불화는 인도 아잔타석굴의 벽화들로 기원전 2세기 작품들이다. 화승(畵僧)은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거나 회화작업에 종사하는 승려를 말한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전문적인 장인들이 그 작업을 수행한데 반해 우리나라는 출가한 승려들이 불화를 그리는 역할을 도맡았다. 불화를 그리는 승려들은 단체로 사찰을 옮겨다니면서 불화를 그리면서 집단을 형성했으며 빼어난 작품을 그린 걸출한 화승들이 배출되었다.


<56. 초본, 불화의 밑그림, 여래도 밑그림, 조선 19~20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종이에 목탄으로 여래의 전체 형태를 그리고, 옷 주름 부분만 먹으로 그린 밑그림입니다. 여래의 무릎 아랫부분을 먹으로 그리면서 수정한 흔적이 확인됩니다. 초본은 불화나 단청을 제작하기 위한 밑그림입니다. 초본을 그리는 것을 ‘초를 낸다’는 의미로 출초라고 합니다. 초본을 그릴 때는 먼저 목탄으로 큰 형태를 잡은 다음 먹으로 세부를 표현합니다. 세부 묘사를 해낼 수 있는 필력이 요구되기 떄문에 기량이 뛰어난 화승이 맡았습니다. 이 초본은 어떻게; 화승이 밑그림을 그렸는지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7. 화승 약효가 그린 인물도 밑그림, 인물도 밑그림, 약효, 조선 19~20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약효(?~1928년)는 50년 넘게 활동하며 100여 점이 넘는 불화를 그린 한국 근대 대표 화승입니다. 그는 공주 마곡사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제자를 양성했습니다. 약효는 18세기에 뛰어난 화승이었던 유성의 밑그림을 모방하며 수천수만 장을 연습했다고 전합니다. 이 초본에서는 매우 가는 선으로 인물의 얼굴을 능숙하게 표현했고 거친 붓으로 옷 주름을 자유롭게 그렸습니다. 불화 제작에 실제로 사용했다기보다 제자의 학습이나 참골르 위해 약효가 그린 밑그림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8. 색을 일일이 적어둔 지장보살 밑그림, 지장보살도 밑그림, 조선 19~20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연화좌에 앉은 지장보살과 그를 보좌하는 두 인물을 그리고, 색을 참조하도록 각 부분에 한글로 ‘양녹’, ‘옥석’, ‘삼청’, ‘장단’, ‘진흥’을 적거나 한문으로 ‘백’, ‘황’ 등을 적어 두었습니다. 보살의 어깨 주변에는 입고 턱수염을 연습한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이 밑그림은 1917년에 <자수지장보살도>를 조성하려고 보현(1890~1979년)이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보현은 서울 경국사에서 출가하여 화승으로 입문했고, 사찰을 책임지고 주관하는 주지직을 맡아 사회 주요 인사와 교류하는 등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 승려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여래도, 59. 불화 밑그림 첩, 초본첩, 종선후기, 종이에 먹, 통도사성보박물관>

<보살도>

<신중도>

<사천왕도>

도상 연습과 전승을 위해 실제보다 작게 그린 소형 불화 밑그림을 엮은 초본첩입니다. 소형 초본은 실물 크기의 초본을 작성하기 전 연습할 때 교본으로 사용되었으며 지역 간 도상 교류와 사제 간의 도상 전승, 실제 불화 제작에도 적극 활용되었습니다. 근대에 이름을 날렸던 화승 철유(1851~1917년)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사천왕도를 조성할 때 유점사 노스님의 사천왕 초본 중 한 점을 확대해서 그렸다고 전합니다. 초본의 각 면에는 아미타여래와 석가여래,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보주를 든 용왕과 코끼리관을 쓴 야차, 사자관을 쓴 건달바, 탑을 든 사천왕과 여의주를 든 사천왕이 그려져 있습니다. 작은 화면에도 불구하고 불보살과 신중의 모습을 유려하고 세밀하게 표현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초본: 설계도이자 또 하나의 작품
불화 밑그림인 초본은 완성될 불화 모습을 미리 구현한 일종의 설계도입니다. 누군가 그린 초본 위에 다른 이들은 오색을 펼쳐 냈습니다. 화승의 초본은 단순한 밑그림이 아니라 오랜 수련 시간과 부처를 향한 평생의 신심이 함축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들은 필선을 연습하고, 불화를 구상하고, 도상을 전승하기 위해서도 초본을 그렸습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전승된 초본은 앞선 화승들의 정신과 기술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렇기에 초본은 로 밑그림이라는 본래 성격을 넘어 완성된 불화에 버금가는 수준 높은 면모를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팔상도(八相圖)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팔상전이나 영산전에 봉안된다. 영산회상도와 함께 많이 그려진 불화의 주제로 신도들이 불교를 해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쉽게 표현하고 있다. 통도사 팔상도(보물)은 8장면이 그림이 밑그림과 같이 남아 있어 당시 화승들이 작업한 내력들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69. 석가모니의 탄생, 1. 통도사 팔상도 밑그림(비람강생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2. 통도사 팔상도, 포관 등 2명, 조선 1775년, 비단에 색, 통도사성보박물관, 보물>

팔상도의 두 번째 장면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현장을 담았습니다.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나고, 아홉마리 용이 신성한 물을 뱉어내고 있습니다. 갖가지 색으로 이들이 완성한 불화에서는 불교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통도사 팔상도>는 화승 수십명이 열덟 화폭을 함께 조성했는데, 이 화폭에는 해당 화면 제작을 주도한 포관과 유성의 이름만 적혀 있습니다. 통도사에 전하는 <팔상기문>과 팔상도 첫번째 화폭인 <도솔래의상>에는 두훈이 수화승으로 적혀 있어, 두훈이 전체 불사를 주관하고 실제 불화 제작은 포관을 중심으로 유성과 여러 화승이 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70. 출가를 결심한 싯다르타 태자, 1. 통도사 팔상도 밑그림(사문유관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2. 통도사 팔상도(사문유관상), 포관 등 5명, 조선 1775년, 비단에 색, 통도사 성보박물관, 보물>

팔상도 중 세번째 그림입니다. 왕궁 밖을 나선 싯다르타 태자가 노인과 병자, 죽은 이의 시신을 보고 삶의 고통과 죽음을 깨달은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북문에서 수도자를 보고 출가를 결심합니다. 화면 중앙의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중요한 네 장면을 배치했고, 오른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밑그림은 먹선으로 대담하게 그린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얽혀서 화면의 중심을 이룹니다. 뒷면에는 철유가 스승에게 전승받은 이 밑그림에 필획을 더하여 쓴 묵서가 남아 있습니다. <사문유관상> 화폭에는 포관과 유성을 비롯해 화승 다섯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71. 눈 덮힌 산에서 수행하는 석가모니, 1. 통도사 팔상도 밑그림(설산수도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2. 통도사 팔상도(설산수도상), 포관, 조선 1775년, 비단에 색, 통도사 성보박물관, 보물>

팔상도 중 다섯 번째 그림입니다. 출가 후 궁으로 돌아오라는 청을 거절한 채 설산에서 수행하는 석가모니 모습을 그렸습니다. 출가한 후의 이야기를 그렸기에 이제 궁궐은 등장하지 않고 나무나 바위, 산 묘사가 중심을 이룹니다. 밑그림 속 바위나 나무 기둥의 거친 묵법으로 석가모니의 극적인 수행장면을 속도감 있게 전달합니다. 채색본에는 포관의 이름만 적혀 있습니다. <팔상기문>에 수화승으로 기록된 두훈보다 포관의 이름이 여러 화폭에서 가장 많이 확인됩니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18세기 화승 의겸 역시 불사를 총괄하면서 각 화폭을 책임지는 화승을 따로 지정해서 그리게 한 사례가 있어 당시 화승들의 분업체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72. 마왕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부처, 1. 통도사 팔상도 밑그림(수하항마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2. 통도사 팔상도 (수하항마상), 조선 1775년, 비단에 색, 통도사 성보박물관, 보물>

팔상도 중 여서번째 그림입니다. 나무 아래에서 마군에게 항복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부처를 그렸습니다. 마왕 군대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얼굴 표현이 돋보입니다. 원라 중국 팔상도에서는 뇌신(雷神)이 부처의 수행을 방해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이 팔상도에서는 오히려 뇌신이 마군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화승이 새롭게 도상을 바꾼 덕분에 석가모니 부처의 힘을 강조하고 마군을 물리치는 ‘항마(降魔)’ 주제를 더욱 강조한 것처럼 보입니다. 채색된 불화에는 마왕의 세 딸 중 한 명의 모습이 훼손되었는데, 밑그림으로 원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초본과 완성본
낱장의 밑그림에서 불화가 완성되기까지 화승들은 얼마나 많이 고심하고 열과 성을 다했을까요? 1775년 통도사에는 화승 수십명이 모여 석가모니부처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렸습니다. 이 불화를 위해 그린 것으로 보이는 밑그림이 함께 전합니다. 밑그림을 그린 화승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각 구조와 인물의 모습,나무와 암석 윤곽은 물론 배치 간격도 거의 동일합니다. 밑그림과 완성된 불화를 비교하는 것은 단순히 어디가 같고 다른지를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함께 놓인 밑그림과 완성본을 대하며 그 사이에 화승이 마주했을 수많은 고민과 인내의 과정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의 스튜디오
화승의 작업공간은 부처의 모습을 조성하는 신성함과 여러 승려의 분주함이 공존했습니다. 경건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는 화승 곁에는 증명(證明)을 맡은 승려와 불교의 주문인 진언을 염송하는 송주(誦呪)가 함께 있었고, 일반인은 이 공간에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불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삼베, 비단, 종이, 면과 같은 바탕 재료나 채색 안료는 시주를 받거나 다른 승려에게서 조달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은 재료는 화승의 손끝에서 부처의 세계로 변모했습니다. 또한 불사 현장은 보조 화승이 한무리의 우두머리로 성장하는 배움터이자 문화가 전승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