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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부여현(扶餘縣) 관아, 옛 부여박물관에 남아 있는 객사와 동헌

부여(扶餘)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사비(泗比)라 불렸다.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에 예속되면서 672년(문무왕12)에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고, 751년(경덕왕10)에 부여현(扶餘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공주와 병합되었다가 조선초인 1413년(태종13)에 독립하여 종6폼 현감이 고을 수장인 부여현이 되었다. 조선시대 부여현은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사비성 일대만을 포함하며, 1914년 인근 홍산현, 임천군, 석성현, 공주군 일부가 편입되어 부여군이 되었다. 부여가 옛 백제의 도읍이었고, 주위에 넓은 평야가 있기는 하지만 교통의 요지가 아니었기때문에 삼국시대 이후 큰 세력을 형성하거나 지역의 중심지가 되지 못하고 시골의 작은 고을로 명맥을 이어왔다.

부여현감이 공적인 업무를 보던 동헌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앞면 5칸의 작은 건물로  ‘초연당(超然堂)’ 또는 제민헌(濟民軒)이라 불렸다. 객사는 부풍관(扶風館)이라 불렸으며 궐패를 모시는 앞면 3칸의 정당과 양쪽의 좌.우익실으로 되어 있다. 현감이 살던 살림집인 내아는 앞면 5칸의 ‘-‘자형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그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백제시대의 주춧돌과 기단석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부여현 객사>

부여 관아 중심건물인 객사이다. 객사는 왕명으로 받들고 내려오는 관리가 머물수 있는 숙소이자,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예를 올리는 곳이다. 부여 객사는 부풍관(扶風館)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백제관(百濟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왼쪽에서 본 모습>

<오른쪽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건물은 가운데에 정당을, 양쪽에 좌.우익실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객사건물이다.  박물관 진열실 등으로 사용하면서 내부가 변형되었으나 기본구조는 남아 있다.

<정당(正堂)>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闕牌, 또는 전패殿牌)를 모시는 공간이다. 앞면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정청 처마에는 봉황머리와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였다.

<좌익실>

실제 부여를 방문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온돌방 1칸과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대청마루>

넓은 공간으로 부여현감이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됨을 알 수 이다.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

<우익실>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 아래 삼국시대 백제의 왕궁터이자 옛 부여박물관이 있던 곳은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따르면  객사, 내아, 군기고, 향청, 작청, 현사  등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동헌.객사.내동헌이 남아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구한말인 1869년에 지어졌으며 박물관 전시실 등으로 사용하면서 변형되었던 것을 1985년에 크게 수리하였다고 한다.

<객사 동쪽편>

객사 동쪽편에는 고을수령이 공식업무를 보는 공간인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 건물이 남아 있다.

<부여현 관아 동헌>

1869년(고종6)에 지은 건물로 초연당(超然堂), 제민헌(濟民軒)이라는 불렀다. 고을 수령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대체로 관아 중심 건물인 객사 동쪽에 위치하여 동헌이라 부른다.

<왼쪽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건물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도 하는 공포를 짜지 않은 민도리집이다. 왼쪽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오른쪽 2칸은 온돌방을 두고 앞쪽에 툇마루를 놓았다.

<부여 동헌의 당호인 ‘초연당’이라 적힌 현판>

<대청마루>

대청마루는 부여현감이 재판을 하거나 민원인을 접견하는 등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이다.  옆과 뒷쪽에 판벽을 치고 판문을 달았다.

부여동헌(扶餘東軒),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이곳은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청으로 동헌(東軒).객사(客舍).내동헌(內東軒)이 보존되어 있다. 동헌은 부여현의 관아로 1869년(고종6년)에 다시 지었으며 초연당(超然堂), 제민헌(濟民軒)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객사는 관청의 손님, 사신이 유숙하던 건물인데 궐패를 안치하고 대궐을 향해 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였다. 동헌과 같은 해에 다시 지었는데 중앙의 정당(正堂)과 동서양쪽에 붙은 익실(翼室)로 이루어졌다. 양쪽 익실의 지붕은 가운데 정당보다 한 단 낮게 만들어진 건물모양으로 각 실의 위계(位階)를 나타내고 있다. (안내문, 부여군청, 2015년)

<고목>

다른 관아 건물터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고목이 관아 입구에 남아 있다.

<부여현 관아 내아>

부여 현감이 거처하면서 생활하는 살림집이다.

<내아 출입문>

건물은 앞면 5칸 팔작지붕집으로 ‘-‘자형을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의 대청마루와 그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백제시대의 주춧돌과 기단석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내아>

<내아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글씨>

<내아 뒷편에 있는 사당인 도강영당(道江影堂)>

부여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인 홍가신.허목.체제공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원래 관아 부속건물로 있던 것은 아니고 1970년대에 옛 관아건물이 있던 곳에 신축하였다.

도강영당(道江影堂)
홍가신.허목.체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홍가신(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22년(1567) 문과에 급제하여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화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선조37년(1604)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허목(1595~1682)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벼슬에 이르렀다. 그림,글씨,문장에도 능하였다. 체제공(1720~1799)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1735년 과거에 급제한 후 병조, 예조, 호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말 부여현의 관아 건물이던 것을 1971년 신축하여 이들을 모신 것이다. 앞면3칸.옆면2칸 규모의 영당은 앞면 1칸을 개방하여 참배공간을 마련하고 뒤쪽은 통칸으로 3인의 영정을 모셨다. (안내문, 부여군청, 2015년)

<주변에서 발견된 석재들>

<부여현에 관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랑 권18, 1530년’>

부여현(扶餘縣) 지도, 1872년 지방지 충청도편 中
지도의 하단 여백에 고을의 연혁과 부여의 팔경(八景)을 주기하여 지지(地誌)로 지도를 보완하는 형식이다. 동서남북(東西南北)의 글자로 방위를 표시하고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백마강을 연하고 있는 읍치의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산지는 풍수의 산도(山圖)에서 보이는 방식으로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으며, 천정대(天政臺), 낙화암(落花巖) 등의 기암절벽은 회화식 기법으로 절경을 강조하였다. 잎선 지리지들의 소략하고 거친 묘사와 달리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도로는 적색 실선으로 되어 있고 방위별로 나아갈 수 있는 곳이 거리와 함께 기재되어 있다. 또한 특별한 기호가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중요한 산천명 이외에 군현의 관아, 객사(客舍), 창고, 향교, 서원, 우역(郵驛), 사원(寺院) 등이 파악되어 있다. 지금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신라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평제탑(平濟塔)으로 그려져 있어, 백제시대에 창건된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정림사지박물관, 2015년)


<부여현진도>

<출처>

  1. 안내문, 부여군청, 2015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4. 정림사지박물관,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