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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팔달문~서남각루, 팔달산 남쪽 능선으로 이어진 성벽

수원화성(사적) 팔달문에서 정상부까지 성벽들로 이어져 있다.  기존 산성 축성방법에 따라 지은 석축성을 하고 있으며 성벽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정조때 쌓았지만 숙종대에 쌓은 한양도성에 비해 화강석의 크기가 작고 잘 다듬지는 않았다. 경사진 지형으로  방어에 용이하기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방어 시설을 많이 두고 있지 않다. 정상부까지 치성(雉城)과 포루(砲樓)가 1곳씩 설치되어 있다. 치성은 성벽을 돌출시켜 방어에 용이하도로 하고 있다. 포루는 치성과 비슷하지만 화포(火砲)를 설치할 수 있는 곳으로 치성과 달리 벽돌로 쌓았으며 지붕을 얹었다.

팔달산(八達山)은 해발 128m의 나즈막한 동산을 수원화성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팔달산은 정상부가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으로 되어 있는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서장대(西將臺)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남쪽끝에는 주변 동태를 감시하고 서남각루(西南角樓)가 설치되어 있다. 성벽에서 서남각루까지는 옹성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용도로 연결되어 있고, 용도를 출입하는 출입문인 서남암문이 있다.

<팔달산을 오르는 성벽>

수원화성 성벽중에서 경사가 심한 편이지만 성벽을 걸어오르기는 그리 힘들지 않다.  무리가 되지는 않는다. 중간에 방어시설물인 ‘남치’와 ‘남포루’, 정상부에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용도(甬道)가 있다.

<바깥쪽 성벽>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는 조총 공격에 대비하여 여장을 올려 놓고 있다. 정조때 쌓은 성곽이지만 숙종대에 쌓은 한양도성에 비해 화강석의 크기가 작고 잘 다듬지 않았다.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남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중간에 세워진 방어시설인 치(雉). 치는 성벽 바깥으로 노출된 방어시설로 성벽을 오르는 적들을 공격하기 쉽도로 만든 것이다. 삼국시대 산성에서 볼 수 있는 치성과는 달리 총안(銃眼)이 설치된 여장이 있다.

<안쪽에서 본 남치>

<성벽 가까운 곳에 있는 적에게 총을 발사 할 수 있는 근총안>

<치성에서 보이는 성벽 바깥>

<남치(南雉)와 주변 성벽>

아래쪽에는 팔달문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남치(南雉)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남치는 팔달문과 남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수원시청>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는 성벽>

<성벽 안쪽>

<성벽에서 보이는 팔달문 주변>

<남포루>

성벽을 따라서 조금 걸어 오르면 수원화성에 설치된 5개의 포루 중 하나인 남포루가 있다. 포루는 화포를 설치할 수 있는 방어시설로 치성과 마찬가지로 성벽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수원화성 남포루는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구운벽돌로 쌓았으며, 그 위에 지붕을 올려 놓았다. 공심돈처럼 내부가 비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깥에서 본 모습>

<안에서 본 모습>

<남포루 내부>

아래쪽에는 블랑기같은 화포를 배치하고 위쪽에 총안이 있는 판벽이 설치되어 있다.

<도깨비 얼굴을 그려 놓은 총안이 있는 판벽>

<판벽 바깥으로 보이는 성벽 주변>

<남포루와 주변 성벽>

남포루(南砲樓)
남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팔달문과 서남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7월9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팔달문 주위의 성벽과 화양루를 수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출처:수원시청>

<서남암문으로 오르는 성벽길>

<서남암문 아래 바깥쪽 성벽>

<팔달산 정상부 남쪽편 능선에 위치한 서남암문>

서남암문은 남쪽편 능선 끝에 세워진 방어시설인 서남각루(西南角樓)를 출입하는 암문이다. 암문과 서남각루까지는 용도(甬道)로 연결되어 있다. 서남암문은 구운벽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쌓고 있으며, 그 위에 작은 문루를 올려 놓았다.

<바깥에서 본 모습>

<암문위에 설치된 작은 문루인 서남포사(西南舖舍)>

포사는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로 조총공격에 대비해 판벽으로 막아 두고 있다.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신호를 전달하였다.

<암문 옆 성벽>

곡면을 주어 치성과 같은 기능을 하게 만들었다.

<성벽 바깥쪽에서 본 암문>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이 문은 용도(甬道: 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길)의 출입문이기도 하다. 5개의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舖舍)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796년(정조20) 8월6일 홍예가 완성되었다. 포사는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신호를 전달하였다. <출처:수원시청>

<서남암문과 바깥쪽 용도(甬道)>

<서남각루까지 연결된 용도(甬道)>

<용도 성벽(바깥쪽)>

용도는 본성 성벽에 비해 성벽을 낮게 쌓고 있다. 수원화성 용도는 그 형태나 방어상 취약한 지역을 보완하는 기능적인 측면에 남한산성 옹성과 비슷하다.

<용도동치>

<용도서치(甬道西雉)>

용도의 동쪽에 용도동치(甬道東雉), 서쪽에 용도서치를 두고 있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방어시설로 수원화성에 설치된 10개의 치성가운데 하나이다.

<서남각루>

용도는 팔달사 정상부를 따라 이어지는 능선 끝자락 서남각루까지 이어진다. 서남각루는 전망이 좋은 위치에 설치되어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성안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장대(將臺)와 비슷한 성격의 건물이다. 화양루(華陽樓)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누각>

<내부>

서감각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누마루처럼 바깥쪽을 높게 하고 있다.

<용도 끝>

<내부 모습>

용도 끝은 양쪽이 치성처럼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내부는 치성과 거의 비슷하다.

<용도 바깥쪽 성벽>

성벽 바깥쪽은 경사가 급해서 성벽을 높게 쌓지 않았다.

<바깥쪽에서 본 용도 성벽>

서남각루(西南角樓)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바싱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서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팔달산 남쪽 능선에 설치한 용도의 남쪽 끝에 세워졌다. 1796년(정조20) 4월16일 공사를 시작하여 7월20일 완성하였다. 편액에는 화양루(華陽樓)라고 쓰여져 있는데 ‘화(華)’자는 화성을 뜻하고 ‘양(陽)’자는 산의 남쪽을 뜻하는 것이다. <출처:수원시청>

수원 화성(華城), 사적, 수원시 팔달구 일원
화성은 정조대왕 재위 13년만인 1789년 10월7일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그곳에 있던 관아와 민가를 지금의 수원시 중심부에 있는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겼다. 이후 1793년 수원도호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고 1794년 1월부터 1796년9월까지 화성이 축조되었다. 화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5.74km, 성벽 높이 5m 가량이며 여장의 높이는 약 1.2m이다. 화성 성역은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당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정조대왕을 정점으로 관료.학자.기술자.백성들이 함께 만든 근대적 신도시이며 실학의 총체적 결정체이다. 화성은 정약용의 기본설계서인 『성설(城說)』에 기초하여 조선.중국.일본 성곽의 축성법 중 장점을 채택하였으며 거중기, 녹로와 유형거 및 각종 수례 등 새로운 과학기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아울러 화성 축성에 대한 모든 내용을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보고서를 통해 상세하게 남겨놓았다. <출처:수원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