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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오봉산 청평사, 경치좋은 계곡에 자리잡은 사찰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춘천의 명산인 오봉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청평사(淸平寺)이다. 한국전쟁으로 회전문(보물)을 제외하고 대부분 전작이 불타버려 절터만 남아 있어 정식 명칭은 청평사지(淸平寺址)이다. 현재 볼 수 있는 사찰 전각들은 대부분 남아 있던 계단이나 축대 등을 활용하여 최근에 중수한 것이다. 청평사는 원래는 춘천과 화천, 양구를 연결하는 교통로에 가까운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던 사찰이었는데, 소양감댐이 건설되면서 유람선을 이용하여 갈 수 있는 외딴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청평사 일대 계곡은 고려시대 문벌귀족이었던 이자현이 선원을 열고 은둔했던 곳으로 경치가 빼어난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청평사는 고려초기인 973년 창건되어 백암선원이라 불리었다. 이후 문벌귀족인 이자현이 1089년 절을 중수하였다. 조선중기 명종대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던 승려 보우가 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청평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 능인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을 새로 지었다. 이후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회전문을 제외한 전각들이 불타버렸던 것으로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춘천 오봉산 청평사>

춘천의 명산 오봉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청평사. 고려초에 창건된 사찰로 16세기 승려 보우가 크게 중창하였다. 가람배치는 회랑(행각)이 있는 회전문, 누각, 중문을 들어서면 대웅전, 관음전, 나한전이 있는 대웅전 영역이 있고, 뒷편에 극락전과 산신각이 있다.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궁궐 정전영역같은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모습>

청평사는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회전문을 제외한 나머지 전각들이 불에 타서 절터만 남아 있었다. 사진은 극락전을 복원한 직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만든 돌계단과 석축 등에서 궁궐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격조높은 모습을 볼 수있다.

<청평사 앞을 흐르는 계곡과 돌다리>

청평사가 있는 계곡은 공기가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수행하기 적합한 장소이다. 이곳에는 고려초기부터 문벌귀족들이 이곳에 선원(禪院)을 열었으며, 조선시대까지 그 전통은 이어져 왔다. 지금의 있는 청평사는 조선중기 승려 보우가 크게 중창한 것이다. 승려 보우가 문정왕후의 후원 아래 큰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이었기때문에 사찰규모는 크지는 않지만 격조있고 웅장하게 지었다. 남아 있던 초석과 계단 등을 바탕을 복구한 청평사의 건물과 가람배치 등을 살펴보면 대웅전 영역은 월대와 회랑, 박석을 깔아 놓은 길 등 궁궐 정전영역처럼 꾸며 놓고 있다. 또한 지금은 불타버린 극락전은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일제강점기에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청평사 입구 계단>

<청평사>

계단을 올라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청평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전쟁 이후 회전문만 남아있던 것을 복구하여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절터에 남아 있던 초석이나 축대 등을 사용하여 복원했기때문에 승방이 주로 들어선 다른 사찰과는 달리 원래 사찰의 모습이 남아 있다.

<문수사 시장경비가 있던 자리>

마당 한쪽편에는 청평산 문수사 시장경비가 있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문수사 시장경비는 고려 말 원나라에서 청평사에 보내온 대장경과 사찰 후원금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는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려말 대학자인 익제 이제현이 비문을 짓고 당대 최고의 명필인 문하시중 행촌 이암이 비문을 썼으나 1800년대 훼손되어 현재는 비석을 세울 때 받침돌로 썼던 비좌와 비문의 탁본이 전하고 있다.

<마당 왼쪽편에 있는 진락공 중수 문수원비(복원)>

전란 등으로 파손된 비석을 탁본, 문헌 등의 자료를 통해 복원한 것이다. 고려 중기인 1130년(인종8)에 건립된 것으로 이 절의 창건, 중건 내력과 이곳에서 수행한 고려중기 세도가 이자현의 행적 등을 기록해 놓고 있다.

<청평사 회전문(보물)>

앞면 3칸 규모의 작은 출입문인 불이문. 건축적으로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독특한 형태의 사찰출입문으로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안쪽에서 본 회전문과 좌우행각>

일반적인 사찰에서 보기힘든 건물배치이다. 벽이 없고 개방된 형태의 행각은 궁궐 정전영역의  회랑형식의 행각을 연상시킨다.

<누각과 회랑>

회전문을 들어서면 2번째 출입문으로 누각이 있고, 그 양쪽에 각 4칸 규모 회랑형식 행각이 있다. 전란으로 소실된 옛 건물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공간배치이다.

<누각>

<옆에서 본 모습>

누각은 대웅전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누각 내부>

<대웅전 영역 앞 회랑>

대웅전 영역 앞쪽에는 ‘-‘자형 회랑형식의 행각이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궁궐 정전영역처럼 회랑을 둔 공간배치가 일반적이었으나, 이후 사찰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구조이다.

<회랑 내부>

<청평사 주불전인 대웅전>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관음전>

사당처럼 건물 앞에 툇간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 축대와 돌계단 등이 궁궐건물처럼 세련되고 격조있다.

<나한전>

<극락전과 삼성각>

뒷편에는 산중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극락전과 삼성각이 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건물 중 가장 먼저 복원되었다.

<극락전>

청평사 극락전은 건축미가 뛰어나서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건물은 앞면 3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극락전 앞 고목>

사당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측백나무 계통인 것으로 보인다.

<삼성각>

<불전이 있는 영역과 요사채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울>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인 요사채>

조선초기 천재이자 생육신의 한명인 김시습도 청평사 요사채에서 머물렀었다고 한다.

<요사채 앞 마당에 심어진 은행나무>

청평사지(淸平寺址), 강원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에 지어져 ‘백암선원’이라 부르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그후에 보현원, 문수원으로 불려오다 조선 명종 때 보우선사가 크게 고쳐 지으면서 이름을 청평사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오랜 세월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문수원기비와 국보였던 극락전 등이 불타 없어졌으며, 현재의 극락전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남아 있는 유물로는 회전문(보물), 삼층석탑, 진락공 부도, 환숙당 부도 등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관직에 있던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숨어 지내던 문수원과 영지가 남아 있는데, 이곳은 고려시대의 정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안내문, 청평사, 2015년)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