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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견대(사적), 용이된 문무왕으로부터 만파식적을 얻은 곳

경북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해안에 위치한 이견대(利見臺, 사적)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을 위해 세운 감은사에서 600 m 정도 떨어진 해안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문무대왕릉인 대왕암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가 발견되었으나 이견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건물터가 발견된 곳에 1979년에 옛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감은사 금당 아래에 용이된 문무왕이 오갈 수 있도록 동해바다와 연결되는 구멍을 뚫어 두었는데, 용이 된 문무왕이 이곳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또한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이곳에서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하나인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한다. 이견대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외에도 <고려사>에도 비슷한 내용의 가요인 ‘이견대가(利見臺歌)’가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이견대와 문무대왕릉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감은사에서 멀지 않은 동해안 언덕에 위치한 이견대(사적호)>

이곳에서 용이 된 문무왕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하나인 천사옥대와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한다. 이견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湌) 박숙청(朴夙淸)이 아뢰기를, “동해 중의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또는 춘일(春日)에게 점을 치도록 하였다. 그가 아뢰기를, “돌아가신 부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또 김공유신(金公庾信)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어주려 하시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시면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보배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면서 사자를 보내 살펴보도록 했더니, 산의 형세는 거북의 머리 같고, 그 위에는 한 줄기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사자가 와서 그것을 아뢰니, 왕은 감은사로 가서 유숙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만파식적,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옛 건물터에 세워진 정자인 이견정>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다. 신라의 건축양식을 참조하여 새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시대 정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견정>

<정자 내부.>

정면에 문무대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대왕암이 보인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대왕암과 봉길리 해안.>

이견대 아래에는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대종천이 보인다. 모래톱이 물을 흐름을 막아 작은 석호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토사가 퇴적되어 그 규모가 작지만 당시에는 감은사까지 호수가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견대 아래 대종천>

이견대 뒷편 산길로 감은사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견대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여러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실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견대 입구>

<대종천 모래톱에서 본 이견대>

<이견대 아래 해안가 마을>

<대왕암이 있는 봉길 해안에서 본 이견대>

만피식적과 옥피리
신라의 ‘만파식적’은 ‘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이 감은사에 행차한 뒤 이견대에 들렀는데 이 때 해룡이 나타나 흑옥대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해룡의 말에 따라 바닷가에 떠 있는 산위이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소중히 보관하였습니다. 그 뒤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났을 때, 또는 큰 가문이 들거나 홍수 및 태풍이 불었을 때,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모든 일이 평정되었으니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이 옥피리를 신라의 보물, 즉 ‘만파식적’으로 여겼습니다. 조선 연산군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동해의 용이 신라왕에게 이 옥피리를 바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또한 한문건은 ‘고려 태조가 이 옥피리를 갖고 싶어 했으나, 조령을 넘자 소리가 나지 않는다’하여 신라에 대한 충절을 나타내는 기물로 여겼습니다. 조선시대 경주 사람들은 옥피리를 ‘만파식적’과 같은 신물로 생각하였습니다. 옥적이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신라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옥피리의 충절로 여긴 것입니다. 심지어 옥피리가 바로 만파식적이며 경주를 한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만파식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옥피리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만파식적과 비슷한 형태인 것으로 추정되는 옥피리>

전통악기인 대금과 비슷하지만 그 형태는 다르다. 이들 옥피리들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후대에 복원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피리는 문무왕과 관련된 만파식적이 잘 알려져 있으며 경주 지방에서는 보물처럼 소중히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이견대(利見臺, 사적 159호),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이견대는 신라 문무왕의 혼이 깃든 대왕암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자리잡은 정자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문왕은 681년에 즉위하여 호국용이 된 부왕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창건하고, 용이 된 아버지가 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고 한다. 그 다음 해에 감은사 앞바다에 작은 산이 떠내려오자 신문왕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았으며, 며칠 뒤에 신문왕이 그 산으로 들어가 용을 만나 검은 옥대를 받았다. 또한 관리로 하여금 산 위에 있던 대나무를 베도록 하였는데, 그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바로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한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그후 나라의 보물로 삼았다고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이견대(利見臺)라는 명칭을 중국의 주역에 있는 글귀인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에서 빌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신문왕이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1970년 발굴로 건물지를 확인하였으며, 1979년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이견정을 새로 지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년
  5.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만파식적,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