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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현대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거대 불상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 있는 금동미륵대불이다. 오랜 내력이 있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팔상전과 함께 법주사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진표율사가 조성한 금동미륵대불이 있었는데,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가면서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조각가 김복진이 시멘트로 거대불상을 조성하여 1986년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90년대에 낡은 불상을 해체하고 그 형태를 복사해서 청동불상을 조성하였으며, 2002년에 개금불사를 시작하면서 원래의 금동미륵불상의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최근에 조성한 불상이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조각가 김복진이 참여해서 조성한 의미있는 작품으로 현대 불교조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속리산 법주사를 대표하는 불상인 금동미륵대불>

법주사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한 금동미륵대불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조각가 김복진이 참여한 시멘트로 만든 동양최대 규모라 여겨졌던 거대불상이 있었다. 


<앞에서 본 모습(2016년)>

현재의 불상은 김복진이 참여한 시멘트로 만든 불상을 모방하여 청동으로 조성했으며, 이후 개금불사를 통해 금동불상으로 바뀌었다.


<왼쪽에서 본 모습(2008년)>

도금이 완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

불상은 석실이 있는 2층 기단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부는 자금성 월대를 연상시키는 구조를 하고 있다. 원형으로 된 석실내에는 미륵반가상을 모신 불전이 있다.

<남쪽에서 본 모습>

법주사(法住寺)는 삼국시대 진흥왕 때 (553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혜공왕 때(776년) 승려 진표가 크게 중창함으로써 미륵신앙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오늘날 금동미륵대불이 있는 곳에는 오랫동안 금동대불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대웅전에서는 옛 금당인 장륙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까지 신앙의 중심이었던 목탑도 유일하게 남아 있다.

<2008년 팔상전과 금동미륵대불>

<2016년 모습>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연혁
신라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 9년(1872)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 갔다. 일제치하인 192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 하에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하던 중 80%의 공정상태에서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장군와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 미륵부처님이 완성.회향되었다. 1986년 류월탄 주지스님 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이 해체되고 4년 뒤인 1996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다. 기존조성 시멘트 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 한.일월드컵 행사의 성공 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7일 금동미륵대불회향대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이다. 개금방법은 건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2미크론 두께로 연도금면적 900㎡에 황금 30kg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신심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인력은 총 4,500여명이었다. <출처: 법주사>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