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김포 금정사, 봉릉사라 불렸던 추존왕 원종의 장릉을 지키는 원찰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금정사(金井寺)이다.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어머니 인헌왕후의 능인 장릉 인근에 있는 사찰이다.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원래 고상사라 불렀다. 인조가 부모의 묘를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인근에 있던 고상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 원찰로 삼고 봉릉사(奉陵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내력은 기록으로 별로 남아 있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에 김포현 관아 건물 자재를 이용하여 중수하면서 금정사로 바뀌었다. 현재의 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70년대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정사는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요사채 건물 2동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찰내 전각이 많이 들어서 있지 않으며 최근에 크게 신축했지만 장릉을 지키는 원찰로서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는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금정사가 원찰로서 주변 넓을 땅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런지 중앙승가대학이 사찰 뒷편에 세워져 있다.

<김포 금정사>

경기도 김포시 추존왕 원종의 장릉 인근에 있는 원찰인 금정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전각 대부분은 한국전쟁 이후 새로 지어졌지만 짜임새 있는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정사 입구>

금정사는 출입문을 별도로 두지 않고 입구에 있는 요사채에 금정사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주불전인 대웅전>

앞면 3칸, 옆면 2칸의 크지 않는 규모로 1981년에 중수한 건물이다.

<대웅전 앞 경내에 있는 다층석탑과 석등>

<대웅전 아래 요사채 건물>

누마루가 있는 살림집 형태를 하고 있다.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이곳을 찾아온 신도들이 묵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최근에 중수되었지만 왕릉을 찾는 손님을 고려한 공간배치가 반영되어 있다.

<사찰입구에 있는 요사채>

‘ㄱ’자형의 전통 한옥과 비슷한 형태이다. 원찰로서 금정사를 이곳으로 옮길때 건물배치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 정릉 원찰인 흥천사와 비슷해 보인다.

<대웅전 앞 강당 건물>

<범종각>

<금정사 경내 모습>

장릉 원찰로서 마당이 넓고 건물배치에서 짜임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승가대학>

장릉 원찰로 주변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중앙승가대학이 금정사 옆에 자리잡고 있다.

<금정사 맞은편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왕비 인헌왕후 장릉>

김포 금정사,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금정사는 신라 진흥왕때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에는 고상사라고만 전하여 왔으며 달리 전해오는 기록은 없다. 조선 인조5년(1627)에 왕은 자신의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증하고 어머니 역시 인현왕후로 추증하여 그들의 묘를 양주에서 김포로 이장하고 장릉이라고 하였으며 인근에 있던 고상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려 장릉을 보호하는 사찰로 재건하면서 봉릉사라 칭하게 되었다. 일제 강압기인 1930년에 당시 주지 영송화상이 중수 하였고 다시 1938년에 주시 성화대사가 대한제국 말기 김포를 관장하던 현청을 일제가 강제로 헐어 낼 때 출입문중 목재와 주춧돌 등을 구입하여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쓰러져 가는 사찰을 1974년 주지 정념과 고근이 다시 대웅전과 범종각을 새로 짓고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후 ‘능을 지킨다’는 ‘봉릉사’에서 절의 뒷산이 금정산이며 또한 법당 앞에서 에부터 좋은 물맛의 샘이 솟아나므로 인하여 ‘하늘우물’이라는 뜻의 ‘금정사’로 개명하여 김포지역 포교와 수행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의 건축양식은 앞면3칸, 옆면2칸의 단층맞배지중으로 된 기와집이며, 공포의 양식은 ‘다포계’를 기본으로 한 약식 공포이고, 창호는 빗살문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 아래로는 범종각이 있다. 요사채 ‘본원’는 앞부분이 돌출된 형식이며 돌출된 전면은 누각양식으로 지어졌다. 7층석탑은 대웅전 앞 기단 아래에 있다. <출처:금정사>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