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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사적), 백제 무왕이 세운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미륵사지(사적)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 창건한 백제 최대이자 신라 황룡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대형 사찰이다. 석탑 수리과정에서 출토된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백제 왕후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석탑(국보)만 남아 있는데 석재를 이용하여 목탑 형태를 구현해 놓다.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그 규모가 조금씩 축소되면서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사찰이나 절터 중 유일하게 삼탑삼금당식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사찰의 공간배치는 석탑을 동.서쪽에 두고 가운데 목탑이 세워져 있다. 각 탑의 뒷편에는 불상을 모시는 금당 건물이 하나씩이 있으며, 공간은 회랑으로 분리되어 있다. 가운데 금당 뒷편에는 큰 규모의 강당이 있고, 그 뒷편으로 3개의 대형 승방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절터 발굴.조사 결과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절터에 남아 있는 승방의 규모로 볼때에 상당한 많은 인원들이 이 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익산 미륵사지(사적)>

백제 무왕이 창건한 대사찰이다.  오랜 세월 이곳에 남아 있던 현존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 수년째 수리작업 중이다.

<미륵사지 절터 앞에 있는 큰 연못>

<사찰 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과 남문 건물터>

미륵사지는 서역에서 전해진 초기 사찰의 가람배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출입문부터 탑과 금당이 있는 영역, 뒷편 강당이 공간 등이 대부분 회랑으로 분리되어 있다.

<당간지주>

남문을 들어서면 넓은 공간이 있고 사찰영역임을 알려주는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다. 마당에는 2기의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다.

<동쪽 당간지주>

<앞쪽 회랑 건물터와 중문터>

<중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목탑 터>

이 사찰터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앙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목탑 옆 회랑>

가운데 목탑이 있는 공간과 양쪽 석탑이 있는 공간은 회랑으로 분리되어 있다. 목탑지는 제석사지와 마찬가지로 흙을 다져서 쌓은 판축방식으로 기단을 조성했다.

<동탑 앞에서 본 목탑 터와 서탑 복원 작업 공간>

이곳에서 출토된 평기와.수막새.기와를 고정시키는 쇠못 등의 유물과 이중기단은 여기에 세워졌던 탑이 목탑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목탑지 기단은 북편 중앙의 계단석, 기단 면석, 갑석 일부와  서쪽의 기단석에 의한 한변 18.56 m 규모의 정방으로 추정된다. 발굴당시 기단 북쪽의 구 지표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서 나중에 보수.정비 등으로 지붕에 올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 중기와 후기의 평기와.수막새가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수막새가 기단에서 북쪽으로 80 cm되는 지점에서 기단선과 평행을 이루면서 출토되어 목탑이 소실되면서 그대로 지붕이 내려 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미륵사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연못을 메우고 지었다. 목탑지 하부는 목탑의 기단 면적만큼 메웠던 흙을 다시 깊이 350 cm를 파냈다. 여기에 사람 머리 크기의 돌들을 150 cm 정도 채워 다진 후, 그 위에 황갈색 마사토와 점질토를 섞어 3~5 cm 두꼐로 층층이 46단 193 cm를 다져 올렸다.(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목탑 뒷편에 있는 금당터>

앞면 5칸, 옆면 4칸 정도의 큰 건물이다. 석탑 뒷편에 있는 동.서 금당보다는 건물 칸수는 같지만 2배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뒷편에서 본 금당터>

큰 돌과 점토를 섞어 이중으로 기단을 쌓아 았으며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금당터 앞에 있는 석등 간주석>

미륵사지에서는 석등이 불상을 모신 금당 앞에 세워져 있다.

미륵사의 금당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삼금당이다. 동.서.중. 삼금당을 그 세워진 위치에 따라 동금당.서금당.중금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각 금당지에는 남북과 중앙에 돌계단이 있고, 같은 양식의 이중 기단과 높은 초석이 있다. 초석은 한 변이 105 cm 정도의 정방형 초반석 위에 긴 정방형의 초석을 올려 놓았는데 밑의 초반석 각 변의 중앙에 위의 긴 초석의 모서리가 위치하도록 하여 초석을 누르는 건물의 전체적인 무게를 8곳으로 분산시켜 받도록 하였다. 각 초석의 정면에는 초석의 움직임을 막고, 그 위에 마루를 깔기 위한 나무보가 놓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홈이 파여 있다. 삼금당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칸수는 같지만 각 칸의 너비에 따른 기단의 전체적인 크기는 중금당이 동서 금당의 2배정도이다. 삼금당 중 동금당이 제일 먼저 소실되었다. 동금당지에서는 금동제 장식과 납유리가 출토되었다. 서금당지에서는 토제 나발과 연우 글자가 있는 기와가 나왔다. 이것은 같은 시대의 암수 막새가 많았다.  이로써 서금당지에서는 고려말까지 건축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2017년까지도 해체.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해체.복원 작업 중 발견된 사리엄장구가 표현되어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국보) 복원 작업 현장(2009년)>

석탑 대부분이 해체되었고 바닥면만 남아 있다. 가운데에서 미륵사지가 새롭게 자랑할 수 있는 문화재인 사리장엄 출토지가 있다.

<금제 사리봉영기, 金製舍利奉迎記, 639년, 익산 미륵사지>

2009년 발견된 것으로 미륵사지 석탑 창건 내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이었던 사택(沙澤)씨 출신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사리봉영기는 금판의 앞뒷면에 도자(刀子)를 이용하여 음각하고, 각 획을 따라 주사(朱唦)를 입혀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전체 193자로 앞쪽에는 99자, 뒤쪽에는 94자를 새겼습니다. 좌평(佐平) 사택덕적(沙澤德積)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을 정확히 밝힌 것입니다. 미륵사 서탑 창건의 주체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임이 밝혀져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설화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삼원식(三院式)인 미륵사의 창건에 선화공주를 포함한 서로 다른 발원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금동제 사리외호.금제 사리내호, 639년, 익산 미륵사>


<2001년 해체 전 미륵사지 석탑>

앞면만 남아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로 보강하여 석탑 구조물을 지지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서탑(2019년 복원 후)>

<서탑 뒷편 서금당터>

건물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로 중금당과 같은 형태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글자가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까지 금당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탑(재현)>

서탑의 형태를 추정하여 9층 석탑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하얀 화강석으로 석탑을 쌓았는데 목조 건물을 그대로 석탑으로 구현해 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물로서의 고풍스러운 멋은 거의 없지만, 미륵사지 석탑의 형태를 이해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석탑이다.

동원 구층석탑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하여 그 기단의 규모와 출토 유물을 조사한 결고,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원 구층석탑은 동원 탑지에서 출토된 기단석, 옥개석,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재 남아 있는 서탑 등을 통해 고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료했다. 복원된 탑은 하층기단이 1변 12.5 m, 상층기단이 105 m인 2층 기단이다. 탑 높이는 지면에서 상륜부까지 총 27.8 m 이다. 탑에 달린 풍탁은 동원 탑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탑 복원에는 기존 탑 부재와 같은 재질인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2,000여 개와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2개를 포함, 2,700여 톤이 사용되었다. 석탑 복원 기록과 사리장엄은 5층 심주석에 봉안하였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동탑 뒤편에 있는 동금당터>

서금당터와 같은 크기와 형태이다. 금당 앞에 석등이 세워졌다.

<옆쪽에서 본 동금당터>

<목탑과 중금당터에서 보이는 사찰 뒷편>

목탑, 중금당과 함께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승려들이 기거했던 승방건물터가 있다.

<중금당터 뒷편 회랑 건물터>

<상당히 큰 건물이었던 것으로 모이는 강당터>

강당은 앞면 13칸, 옆면 4칸으로 내부는 통칸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현재까지 확인된 사찰 강당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강당 건물 좌우로 통로가 있다. 강당 양쪽으로는 회랑과 연결돤 큰 승방이 되어 있다.

<강당과 승방을 연결하는 통로>

회랑 형식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당 앞 마당 동쪽편에 배치된 승방>

남북 64 m 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마당 서쪽편에 배치된 승방>

승방지
동서 승방지는 남북 65 m, 동서 14 m 정도로 같다. 동서 승방지 내부에는 한변 6 m 크기의 방 두개가 남북으로 한 조를 이루며 4조씩 있다. 발굴당시 동원의 승방지에서 구들시설과 아궁이의 흔적이 있었지만 완전한 구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를 비롯하여, 주름무늬 토기 병, 돋음 무늬 병, 불에 탄 곡식 및 중국 당나라의 백자완 등이 출토되었다. 큰항아리 편 하나에는 [대중십이년미륵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대중은 당의 연호로서 그 12년는 통일신라 헌안왕 2년(858)이다. 이것은 함께 출토된 다른 토기 및 기타 유물의 편년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북편 기단 외부에서는 치미가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양식의 백제 치미는 부여의 부소산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강당 뒷편 마당>

<강당 뒷편에 있는 북승방지>

길이 133.4 m의 단일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다.

<강당 옆에 있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우물>

북승방지는 강당 북편에 강당지와 나란한 동서방향으로 자리한다. 가람으 북쪽 구역에 자리하고 있어 북승방지로 부르는데 미륵사지에서 단일 건물지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초기 건물지는 동서 길이 133.4 m로 동.서원 승방지 동.서쪽 기단 끝에 동쪽과 서쪽 끝이 놓여 있으며, 기단 폭은 14 m이다. 후대에 증축된 승방지 서측 부분까지 합하면 동서 길이는 160  m이다. 내부구조는 한 변의 크기 6 m인 방 두개가 동서 방향으로 한 조를 이루고 있어 동.서원 승방지의 구조와 같다. 이같은 방 2개씩의 구역이 16개가 있는데 이는 동.서원 승방지의 구역을 합한 것과 같다. 북승방지의 서측에 후대에 증축한 부분은 평면구조가 초기 승방지와 다른데 남겨진 시설들에 의하면 도구를 만드는 작업장이나 창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승방지의 남쪽에 있는 동.서 방향의 배수로 동쪽 끝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우물이 하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미륵사지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유물>

이곳에 전시된 석조물은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7년간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것이다. 동원9층석탑 부재, 석등 부재, 당간 부재, 건물기단석, 맷돌, 다양한 형태의 건물 초석 등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보물)>

당나라의 동물다리 모양 향로를 바탕으로 통일신라 초기의 여려 형식들이 반영된 향로이다.  8세기 전반 이전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