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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경상좌도 병영성(사적),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병영성

울산시 중구 서동, 동동, 남외동 일원에 있는 경상좌도 병영성(사적)이다. 조선시대 중요 군사조직인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병영성이다. 해발 45 m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골짜기를 둘러쌓은 성으로 조선초 태종 때 쌓았다. 조선후기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약 1.2 km, 성벽의 높이는 약 3.7 m이다. 사방으로 문루를 갗춘 성문을 두었으며 서문과 북문에는 옹성을 쌓았다. 성벽 둘레에는 해자를 팠으며 곳곳에 치성을 두었다. 성안에는 병마절도사가 거처하는 공관, 국왕의 궐패를 모시는 객사를 비롯하여 여러 부속 건물들과 연못, 우물 등이 있었다. 도시화 과정에서 성벽과 부속관청 건물 등 없어지고 북문 주위 일부 성벽만 남아 있다.

병영성은 경주에서 발원한 동천이 태화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요 교통로인 7번국가가 지나가고 있다. 울산에서 경주까지는 30 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고갯길이 없어 군인들의 행군 속도로는 반나절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왜군의 침입이 예상되는 경로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신라는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관문성(사적)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쌓았다. 조선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부산과 거제에는 경상 좌.우수영을 두었으며, 육지에 상륙한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울산과 마산에 경상 좌.우영을 두었다. 임진왜란 이후 마산에 있던 경상 우병영은 진주성으로 옮겼으며 통영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었다.

<울산 경상좌도 병영성>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병영성으로 울산과 경주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내려다 보이는 낮은 언덕위에 성벽을 쌓았다.

<울산 병영성 배치도>

둘레 1.2 km 정도이며, 사방에 성문을 두었다.

<북문 터>

3칸 규모의 문루가 있었으며, 바깥쪽에는 성문을 호위하기 위한 옹성이 두었다.

<북문 옆 성벽>

<북문 안쪽 마을>

북문지
경상좌도 병영성의 옛 북문 자리로 『문종실록』과 『여지도서』의 「좌병영지지도」에서 옹성이 있었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옹성은 적의 침입에 가장 취약한 성문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반원형 또는 사각형으로 성벽에 덧붙여 만든 성문보호 시설이다. 1999년 발굴조사를 통해 너비 8 m 정도의 반원형 옹성 유구가 확인되었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북문 서쪽 성벽>

<북문 동쪽 성벽>

토축을 쌓은 것 같은 자연 지형을 많이 활용하고 있으며 그 위에 성벽을 쌓았다.

<북문 동쪽 치성1호>

치성을 성벽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놓은 방어시설로 성벽을 오르는 적을 쉽게 공략할 수 있다.

<치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울산과 경주를 연결하는 국도7호선과 경주에서 발원하여 태화강으로 흘러드는 동천, 울산공항의 모습 등이 내려다 보인다. 그리 높지 않은 곳이지만 주위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벽 안쪽>

<치성1호와 치성 2호 사이의 성벽>

병영성은 조선초 태종 때 처음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성을 허물어 울산 왜성을 쌓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지금의 성벽은 그 이후에 다시 쌓은 것으로 그 흔적들이 성벽에 남아 있다고 한다.

치성 1호와 치성 2호 사이 성벽
이 구간에서는 전체적으로 후대에 수리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지대석을 비롯하여 기단석과 면석이 1~2단 정도 남아 있으며 기단석은 길이 25~240 cm, 높이 20~70 cm이며, 성벽의 잔존 높이는 100~120 cm이다. 지대석 위에 10~20 cm 정도 안으로 들여서 기단을 쌓았고, 가공한 흔적이 별로 없는 대석을 이용했다. 기단석 사이에는 조그만 할석으로 채워 넣었다. 일부 구간에서는 기단석 위에 흙을 쌓고, 그 위에 다시 30 cm 내외의 벽석을 여러 단 쌓은 지점이 있는데 이것은 초축한 성벽이 유실된 이후에 보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구간 일부는 초축 벽석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 앞쪽에 새로이 30 cm 내외의 석재를 이용해서 1열로 외벽을 쌓아 올린 부분도 있다. 이는 초축 벽석을 찾아서 그 위에 벽석을 쌓아 보수한 것이 아니라 덧대어 쌓아 올린 경우이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치성 2호>

<치성 3호>

치성3호
치성2호에서 남쪽으로 약 97 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치성 3호는 체성 외벽에 덧대어 축조하였으며 지대석을 비롯하여 기단석과 면석이 1~2단 잔존하나 동쪽 벽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규모는 너비 7.8 m, 길이 9.6 m, 잔존 최고 높이 1.2 m이다. 축조방법은 생토층을 일부 굴착하고 자갈과 조그만 할석을 채워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지대석을 놓은 후 안으로 10~15 cm 정도 들여서 기단석을 쌓았다. 남동벽은 지대석을 높이 20 cm 내외의 판석으로 2열로 쌓고 그 위에 기단석을 올렸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치성 3호를 지나 남쪽편으로 이어지는 성벽>

울산 경상좌도 병영성, 사적, 울산시 중구 서동, 동동, 남외동 일원
병영성은 1417년(태종 17)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존속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영성으로 1417년에 쌓았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9,316척, 높이는 12척이었다. 이 성은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성으로 구릉 정상부에 석축을 쌓은 것이다. 사방으로 3칸의 문루를 갖춘 성문을 두었고, 서문과 북문 주위에는 옹성을 쌓았으며 성벽 곳곳에 치성을 두었다. 성의 둘레에는 해자를 팠다. 성 안에는 병마절도사 공관이 체오헌, 객사인 선위각, 객사 정문인 진해루, 우후 공관인 찬주헌 등의 주요 건물이 있었다. 부속 건물로 무기와 군수물자를 보관한 창고 등이 있었고, 연못 3개와 우물 7개가 있었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출처>

  1. 울산시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