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중앙박물관특별전, 이집트보물전] 장례의식

고대 이집트인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들은 그들이 남긴 무덤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생전에 많은 준비를 하였으며 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껴묻거리와 장례절차를 표현한 문서인 ‘사자의 서’에서 이를 잘 살펴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장례방식인 미이라는 이집트 문명을 대표하고 있으며, 다양한 껴묻거리는 후대 다른 문명권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장례방식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초기왕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계속 이어져 왔으며 시대 변화에 따라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관계 등 도 잘 반영되어 있다.

부와 명예의 과시, 장례의식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현재의 삶을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사후세계에서 부활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 자신의 능력을 뛰어 넘는 장례준비를 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값비싼 재료처럼 보이게 하거나, 재료에 상관없이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무덤에 남겨진 껴묻거리를 보면, 금과 같은 비싼 재료를 사용할 여유가 없는 이들은 재료에 도금을 하거나 금색을 칠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은 흙으로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파헤쳐 귀한 것들을 훔쳐 재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인물(이페피) 조각상, 파이윰, 기원전 1870~1750년(제12왕조~제13왕조), 규암.석회석>

죽은이 경제력에 따라 껴묻거리의 적절한 재질을 사용하여 껴묻거리를 만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각상은 주인공의 형편에 따라 껴묻거리의 재질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렴한 석회석으로 제작된 봉헌 탁자 위에 앉아 있는 ‘이페피’ 조각상은 값비싼 규암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봉헌 탁자까지 비싼 재료를 사용할 형편이 안 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인물(세크엠카) 조각상, 사카라, 기원전 2400~2345년경(제5왕조)>

제5왕조의 왕족들은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었는데, 석회석에 색을 칠해서 만든 받침으로 보이는데 재사용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석회석으로 만든 판에는 빵, 맥주, 소, 가금류 등 주인공인 ‘세크엠카’가 사후 세계에서 먹을 봉헌물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껴묻거리가 그려진 관의 일부, 아시우트, 기원전 2006~1875년경(제11왕조 ~ 제12왕조), 나무에 안료.>

무덤에 들어갔던 껴묻거리의 내용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죽은이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왕국 시대에는 관을 사람모양이 아닌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이 안에 미라로 만든 주검을 넣었습니다. 이 나무 판은 관 옆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왼쪽부터 다섯 개의 기름 단지가 놓여 있는 탁자, 미라 제작용 재료가 들어 있는 일곱 개의 아마천 가방이 놓여 있는 침대, 그리고 샌들 한 켤레와 거울이 있습니다. 이 그림의 내용은 미라가 무덤에 들어갈 때 함께 넣었던 껴묻거리를 그려 넣은 것으로 무덤 주인공의 경제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나무판의 두께가 비슷한 시기에 출토된 관들에 비해 얇은 점도 이 주인공의 경제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인물(웬아문) 조각상, 테베(룩소르), 기원전 50년경(프톨레마이오스시대), 석회석.>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신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석회석은 무른 것부터 단단한 것까지 경도가 다양하며, 단단할수록 조각하기 더 어렵고 조각가들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조각상을 제작할 때 무른 석회석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조각상을 대부분 채색하였습니다. 값싼 재료를 사용해서라도 조각상을 만든 이유는 사후세계에서도 죽은 이의 영혼인 ‘카(ka)’가 이 조각상에 머물면서 음식을 봉헌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인물(센네페르) 조각상, 기원전 1938~1837년경(제12왕조), 석회석에 채색>


<인물(사하토르) 조각상, 테베, 기원전 1818~1630년경(제12왕조 ~ 제 13왕조), 석회석에 채색>

조각상을 값비싼 재료로 만들 경우에는 색을 칠하지 않지만, 값싼 재료를 사용할 경우에는 따로 색을 입혔습니다. 이 ‘사하토르’의 조각상도 값싼 석회석으로 모양을 만들고, 색을 칠한 것입니다. 그리고 옷에 봉헌문을 쓴 것은 재료를 아끼기 위함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남성 조각상, 아리카, 기원전 2200~2170년경(제4왕조), 석회석에 채색>


<인물 조각상, 테베 데이르 엘메디나, 기원전 1336~1279년경(제18왕조 ~제19왕조), 석회석에 채색>

이집트 사람들은 조상의 조각상을 집에 모셔 놓고 사후세계에서의 편안한 삶을 기원하였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소통하는 의식에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조각상의 경우에도 경제적인 차이에 따라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의 경우에는 석회석이나 더 비싼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흙으로 조상의 모습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장례용 토기, 테베, 기원전 1479~1279년경(제18왕조 ~ 제19왕조), 토기에 채색>

돌로 만든 그릇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을 거치기 때문에 값이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이 토기를 주문한 아몬의 사제인’네페르헤르’는 돌로 만든 그릇을 가지고 싶었지만 경제적 여건이 허락되지 않은 듯 합니다. 그리하여 ‘네페르헤르’는 토기 겉면에 화강암과 같은 색을 입히고, 무늬를 그리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목축장면 새김돌, 텔 엘이마르나, 기원전 1350~1333년 (제18왕조), 석회석>

염소를 앞세우고 늙은 염소지기가 따라가고 있는 장면이 그려진 새김돌입니다. 염소지기는 작은 솥의 손잡이를 끼운 장대를 왼쪽 어깨에 메고 오른손에는 막대를 쥐고 염소를 몰고 있습니다. 염소지기는 얼굴도 투박하고, 배도 볼록하게 나와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이렇게 나이가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하층민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왕과 귀족은 주로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봉헌 의식 새김돌, 사카라, 기원전 1539~1292년경(제18왕조), 석회석>

죽은 이와 그의 아내는 봉헌 탁자 앞에 앉아 있고 맞은편에는 이들의 아들이 서서 봉헌을 하고 있고, 딸은 아들 뒤편에 앉아 있습니다. 위쪽과 아랫쪽 글자의 형태가 다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것을 재사용한 흔적으로 추측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히에로글리프 새김돌, 라훈, 기원전 1844~1835년경(제12왕조), 석회석>

이 새김돌에 새겨진 히에로글리프는 미라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봉헌과 의식에 대해 기록한 것입니다. 윗부분에 남아 있는 별 모양 무늬는 이 의식들이 밤에 행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발덮개, 기원후 1세기경, 로마시대, 석고에 채색.도금>

<발덮개 바닥에 그려진 그림. 죽은이의 적들이 표현되어 있다.>

발덮개는 부유한 상류층만이 사용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습니다. 가면이나 미라 덮개는 직접 만들어 서라도 갖춰야 할 필수품이었지만, 발 덮개는 그러한 부류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이 발 덮개 바닥면에는 적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죽은 이가 사후세계에서 적들을 물리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미라덮개, 기원후 4세기, 로마시대, 테라코타에 채색>

흙으로 만든 이 미라 덮개는 로마 시대 이집트에서 빈부 격차가 장례물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줍니다. 손으로 직접 얼굴 모양을 빚고, 색을 칠해 얼굴을 완성한 이 덮개는 죽은 이의 가족이 직접 만들었을 것입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영원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 할 물품들을 흙으로라도 빚어서 갖추고자 했음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관 덮개, 게벨 엘실실라, 기원전 1292 ~ 1075년경(제19왕조 제20왕조), 테라코타에 채색>

이 관 덮개는 상감기법을 모방히기 위해 흰색으로 칠한 눈에 눈종자를 파란색으로 그렸습니다. 겉면이 노란 것은 금을 모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남성 미라 가면, 기원후 1세기, 로마시대, 벽토에 도금.채색>

부유한 상류층 사람들은 금박을 입힌 가면을 구입하여 껴묻거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남성 가면은 황금 가면처럼 보이기 위해 점토로 만든 가면의 표면 일부분에 금박을 하고, 나머지 부분은 노란색으로 채색하였습니다. 눈은 상감을 모방하기 위해 희색 바탕에 파란색으로 외곽선을 그렸습니다. 머리 부분에는 주인공의 사후세계에서의 삶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부활과 재생을 상징하는 날개달린 쇠똥구리 모양 장식인 스카라브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머리를 덮는 장식용 천에는 오시리스 앞에 서 있는 미라가 양쪽에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후세계에 들어서기 위한 심판을 암시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여성 미라 덮개, 하와라, 기원후 1세기 로마시대, 암마천에 회칠후 도금.유리.아이앙스>

이 미라 덮개는 머리카락과 옷 주름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눈은 유리로 장식되었고, 목걸이에 보석들이 박혀 있으며, 뱀모양의 팔찌를 양손에 하나씩 차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박을 입혀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전체적인 모습과 재료들로 보아 이 주인공은 상류층에 속하는 여성이었을 것 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미라가면, 기원전 1938~1292년경(제12왕조~제18왕조), 판지>

이 가면은 크기가 작고 금으로 장식된 점에서 상류층에 속하는 아이의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의 앳된 모습을 잘 표현하였지만, 사후세계의 왕인 오시리를 상징하는 수염을 함께 표현한 것이 특이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미라가면, 기원후 2세기, 로마시대, 석고에 채색>

로마시대에 석고로 만든 가면은 이집트이 전통을 이은 마지막 단계의 것입니다. 이 개성적인 로마 양식의 가면은 전통적인 이집트 가면과 마찬가지로 미라의 얼굴을 덮을 때 사용한 것입니다. 머리모양과 수염은 당시 로마에서 유행하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현재는 피부가 하얗게 보이지만 원래는 이집트 초기의 남성 미라 가면처럼 짙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관덮개, 토우라, 기원전 664~352년(제26왕조 ~ 제31왕조), 테라코타에 채색>

흙으로 만들어진 관 덮개는 비교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들은 특징이나 모양새가 제각기 달라 전문적으로 관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 일반인들이 가정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미라 가면, 기원후 1세기, 로마시대, 석고에 채색>

실물보다 다소 작은 이 가면은 젊은 여성들의 머리모양을 보여줍니다. 머리는 모두 뒤로 넘겨 빗어 정수리쪽에서 묶었고, 드러난 이마 위는 짧은 곱슬머리가 살짝 덮고 있습니다. 머리와 눈은 검정색으로 칠했습니다. 목의 양 옆에는 끈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이 여인이 이집트 머리장식을 쓰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바(ba)’가 그려진 관의 일부, 기원전 945~712년경(제22왕조), 나무와 석고에 채색.>

죽인이의 영혼을 뜻하는 사람얼굴을 하고 있는 새의 모습은 그리스신화에서는 사이렌으로 바뀌었다.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인 ‘바’를 사람의 머리를 한 새로 표현하는데, 관 안쪽 면에 주인공으로 짐작되는 이의 얼굴을 한 ‘바’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습니다. 뒷면에는 죽인 이를 보호하는 ‘이시스의 매듭’이 그려져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아이의 관, 기원전 3100~3000년경(초기왕조시대), 토기>

흙으로 빚은 그릇 같은 이 관은 어린 아이의 무덤에 사용된 것입니다. 윗부분에 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뚜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은 가정의 아이들이 이와 같은 형태의 관을 썼을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카노푸스 단지, 기원전 664 ~ 525년(제26왕조), 석회석>

카노푸스 단지는 미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신체 내 장기들을 보관히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보통 한 세트가 네 개로 이루어져 있는 카노푸스 단지의 뚜껑은 각각 호루스의 네 아들인 ‘자칼(두아무테프)’, ‘매(케베세누프)’, ‘사람(임세티)’, ‘개코원숭이(히피)’ 모양으로 표현됩니다. 이 단지들은 미라 제작 방법이 변화하여 장기를 껴내지 않게 되면서 뚜껑이 열리지 않는 단순 봉헌 용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미라붕대, 기원전 332년 ~ 기원후 1세기(프톨레마이오스 시대 ~ 로마시대), 아마천에 잉크>

<미라붕대에 쓰여진 글과 그림. ‘사자의 서’에 포함된 내용들이 주로 표현되어 있다.>

<글과 그림이 있는 미라붕대>

<미라붕대>

<미라붕대>

<미라붕대.>

아마천으로 만든 붕대는 미라 자체를 보호하기도 하였지만, 죽은이를 사후세계로 잘 인도하기 위한 안내서인 ‘사자의 서’의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붕대에는 죽인이가 이집트의 특정한 장소를 지키는 신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 도음을 주는 내용이 있는 ‘사자의 서’ 제112장에서 제116장까지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사자의 서’ 제145장에서 제146장까지의 내용인 ‘갈대밭’에 있는 오시리스의 집으로 들어가는 21개의 문들이 묘사되어 있는 붕대도 있습니다. 각 문에는 이를 지키고 있는 신과 문지기들이 있는데, 이집트 사람들은 이 신들의 이름과 모습을 알아야만 사후세계로 확실하게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의례도구(‘입열기 의식’용), 아크밈, 기원전 3300 ~ 3100년경, 흑요석>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이 석기와 같은 모양의 칼은 고왕국 시대부터 ‘입열기 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입 열기 의식’은 미라를 무덤에 넣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행해지던 의식으로 죽은 이가 사후 세계에서 먹고, 마시고, 말하도록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러한 도구가 선왕조 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입열기 의식’의 기원을 추정해 볼 수 있게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미라의 이름표, 기원전 30년 ~ 기원후 365년, 로마시대, 나무에 안료>

사후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선 반드시 죽은이의 이름을 남겨 두어야 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영원한 삶을 위해 나무로 만든 이름표를 미라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심장 스카라브, 타니스, 기원전 835 ~ 778년경, 제22왕조, 돌.>

스카라브라 불리는 쇠똥구리 모양의 부적은 고대 이집트 유물 중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이집트인의 정신세계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인은 독립된 감정과 생각을 가졌다고 믿었던 심장이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부활을 상징하는 쇠똥구리 모양의 부적에 어떠한 죄도 자백하지 말라는 내용의 글귀를 새겨 미라와 함께 부장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 “이집트 보물전”, 2017년
  2. 위키백과,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