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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김제군 관아, 동헌과 내아 (사적)

전북 김제시 교동에 위치한 옛 김제군 관아이다. 관아터에는 김제군수가 근무하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 동헌에 딸린 작은 정자인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관아근처에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동헌은 조선중기 숙종 때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으로 지방 관아 건물 중 비교적 큰 편이다. 살림집은 내아는 ‘ㄷ’자형 안채만 남아 있다. 피금각은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군수로 재임할 때 지은 것으로 그 규모나 형태가 전남 담양에 있는 정철 후손들이 지은 송강정과 비슷하다.

김제는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특히 조선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다. 유력한 정치세력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경제력을 바탕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으로 파견된 지역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관아 건물도 다른 지역에 비해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내 서원이 많지 않아 향교도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김제시 도심에 남아 있는 옛 김제군 관아>

지방 관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김제군수 집무공간인 동헌>

앞면 7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동헌 건물로 중앙부처나 감영 동헌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처마와 공포>

겹처마와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는데 건축수법이나 자재가 고급스럽다. 농업생산력이 풍부했던 김제군 관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옆쪽에서 본 동헌>

<동헌 뒷면>

한쪽에만 온돌방을 두고 있다.

김제동헌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맡아보던 청사로 동헌이라 하였다. 김제동헌은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워 근민헌이라 칭하여 오다 숙종 25년(1699)에 동헌을 고쳐지어 사칠헌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기둥, 처마, 지붕에 쓰인 부재나 장식이 장중하여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관아 중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예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 받아 2007년 7월 3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근민헌이란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란 의미로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동헌 앞 언덕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피금각>

가운데 작은 온돌방을 두고 툇마루로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다.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군수로 재직할 때 지은 것이라 한다.

<뒷편에서 본 피금각>

<동헌 뒷편 김제군수가 거처했던 살림집인 내아>

<내아 안채>

건물은 ‘ㄷ’자형을 하고 있는 안채만 남아 있다. 가운데 중문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동헌 방향으로 방문과 툇마루를 두고 있다.

<내부 모습>

내부는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방관아 내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내아에 딸린 작은 부엌>

일반 주택에 비해 부엌이 작은 편이다.

김제 내아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 관아는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이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의 처소이다. 김제 내아는 내동헌으로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운 문화재로서 현재는 동쪽이 트인 <ㄷ>자형 안채 건물 하나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춧돌이나 기둥, 처마에 쓰인 목재가 모두 질이 좋고 정성껏 다듬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헌과 함께 남아 있는 내아로서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김제 향교>

김제 관아에서 약 13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제향교. 중등교육기관을 담당하던 곳이다. 김제 지역에는 유력 양반세력이 없어 서원이 발달하지 않아 오랜 기간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

 김제 옛 관아(동헌.내아), 사적, 전북 김제시 교동
김제 옛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치소로서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 현재 김제관에는 동헌과 내아,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대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실례가 되고 있다. 김제군 수령의 공무집행 공간이었던 동헌의 경우 1667년(현종 8) 김제군수 민도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이라 칭하였으며, 1699년(숙종 25)에 중수하여 명칭을 사칠헌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1667년 이전에 이미 김제 동헌에 대한 시문이 전해지고 있어, 건립시기는 수령의 살림채인 내아(내동헌)과 함께 1500년대 중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1633년(인조 11)에 지어진 피금각은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 재임 시 동헌에서 업무를 마친 후 가야금과 바둑, 서책을 읽으며 휴식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다. 김제 관아는 현존하는 동헌, 내아, 피금각 이외에 외삼문과 내삼문, 호적고, 사령층 등이 김제지방도(1872년)에 보이며 외삼문의 경우 중층 문루형식에 상층엔 징벽루, 하층엔 벽지아문이라 편액하였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