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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모악산 금산사(사적), 통일신라 법상종 근본도량이었던 사찰

전북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에 있는 큰 사찰인 금산사(사적)이다. 금산사는 화엄종과 함께 통일신라 불교를 이끌어왔던 법상종의 근본도량이다. 삼국시대 백제 무왕 때 처음 창건되었으며, 통일신라 때 진표가 미륵존불을 모시는 장륙전을 세우는 등 사찰을 크게 중창하였다. 이후 후삼국시대 견훤이 이곳에 유배되기도 했다. 고려 문종 때 왕사인 혜덕이 다시 중창하였는데 금강계단(보물 ), 오층석탑(보물) 현존하는 석조유물들은 이 때 조성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사찰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승려 수문을 중심으로 다시 중창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옛 장륙전의 모습이 남아 있는 미륵전(국보)를 비롯하여 목조건축물들은 이때 다시 지어진 것들이다. 임진왜란 때 금산사 승려를 중심으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기때문에 국가와 지역사회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는 삼국시대 장륙전의 모습이 남아 있는 미륵전(국보), 주불전으로 보이는 대적광전, 목탑이었던 대정전(보물)을 비롯하여 나한전, 원통보전, 명부전 등 많은 불전들을 두고 있다. 또한 고려초에 조성된 석가모시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보물), 오층석탑(보물), 육각다층석탑(보물), 노주(보물), 석련대(보물), 석등(보물) 등 많은 석조유물들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 때에는 미륵존상을 모신 장륙전을 중심으로 공간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시대 이후 수계의식 등 사찰 주요 의식을 집행하던 공간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주불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제 모악산 금산사(사적)>

삼국시대 장륙전을 연상시키는 미륵전이 동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주불전에 해당하는 대적광전과 금강계단을 비롯한 주요 불전들이 북쪽에 배치되어 있다. 미륵전 앞에는 목탑에 해당하는 대장전이 있었으나 바깥쪽으로 옮겨졌다.

<금산사 들어가는 길>

금산사는 전주 남쪽에 위치한 모악산(764 m) 서쪽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전주와 김제 주변 넓은 평야지대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삼국시대 이래 큰 사찰을 유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앞을 흐르는 계곡>

<첫번째 출입문인 금강문>

<금산사 당간지주(보물)>

기단과 받침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며 조각수법과 조형미가 우수한 통일신라 전성기 작품이다. 금강문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 이곳이 사찰 입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간지주 주변에 볼 수 있는 오래된 고목들>

<2번째 출입문인 천왕문>

<강당>

천왕문을 들어서면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강당 건물을 볼 수 있다.

<미륵전(국보)>

삼국시대 장륙전의 모습이 남아 있는 미륵전(국보)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장류전을 복구한 것이다. 조선시대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지만 그 규모나 형태에서 거대한 미륵삼존상을 모시는 옛 장륙전의 웅장함을 느끼게 해준다.

<미륵전 맞은 편에 대장전(보물)과 석등(보물)>

원래 미륵전 앞 불경을 보관하던 목탑건물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된 후 1층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에 현위치로 옮기면서 불전으로 바뀌었다.

<금산사 중심영역에 해당하는 금강계단(보물)과 오층석탑(보물)>

통도사에서 볼 수 있는 석가모니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과 비슷한 형태이지만 그 앞에 다시 오층석탑을 두고 있다. 왼쪽편 주불전인 대적광전과 함께 사찰의 주요 의례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대적광전은 불상을 모시는 불전으로 바뀌고 오른쪽에 불상이 없는 적멸보궁이 새로 지어졌다. 금강계단과 석탑을 같이 두는 등 사찰 공간배치에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금강계단(보물)>

통도사 금강계단과 비슷한 형태로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석종형 탑이 올려져 있다. 기단 네면에 돌기둥이 남아 있으며,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석종형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 추정된다.

<금산사 오층석탑(보물)>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강계단과 오층석탑이 같이 있는 특이한 형태의 공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금산사 주불전에 해당하는 대적광전>

금강계단과 함께 사찰 중요 의식을 행하는 공간으로 원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을 모시는 공간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구하면서 극락전, 약사전에 모셨던 불상들을 같이 모시게 되었다. 원래는 보물47호로 지정된 불전이었으나 1986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1990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육각다층석탑(보물)>

원래 금산사 봉천원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고려초 사찰을 크게 중수할 때 조성한 것으로 흑색 점판암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석련대(보물)>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으로 그 형태가 특이하고 매우 큰 편이다. 원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노주(보물)>

불상을 얹는 대좌처럼 보이지만 꼭대기 꽃봉우리 조각이 있어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조유물이다. 다른 석조유물과 마찬가지로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적광전 뒷편에 있는 나한전>

임진왜란 때 참전하면서 큰 역할을 했던 승려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

진표율사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미륵신앙 대가람으로 일으킨 중창 조사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완산주 만경현에서 아버지 정진나마와 어머니 길보랑 사이에서 태어났다. 율사는 12세에 우연히 아버지의 사냥길을 따라 갔다가 연못에 놀고 있는 개구리를 잡아 화살촉에 꿰어두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듬해에 우연히 그곳을 다시 지나다가 전 해에 잡다둔 개구리들이 가엾게 울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자신으 지난 행동을 마음 속 깊이 뉘우쳤다. 이에 출가하여 금사사의 순제법사를 은사로 득도하였다. 율사의 나이 23세가 되어서는, 1년 동안 간절히 공부하면 무수보살의 현신계를 받을 수 있다는 은사의 가르침에 따라 변산의 부사방에 들어가 몸을 바위에 던지는 망신참법으로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각을 이루지 못하자, 율사는 내생을 기약하며 벼랑에 투신하였더니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율사를 구하였다. 그 후 다시 7일간 용맹정진하여 지장보살의 현전 수기로 계율을 받았다. 그러나 율사는 미륵보살에 뜻이 있었으므로 변산의 영산사로 자리를 옮겨 수행한 끝에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 두권과 증과의 괘쪽을 받았다. 이후 율사는 금산사로 자리를 옮겨 금당(미륵전)을 짓고 그 안에 미륵장육상을 봉안하는 등 금산사를 미륵도량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해마다 단을 만들고 널리 설교하니 단을 베푼 좌석의 정결하고 엄숙한 품이 말세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현세에 용화세계를 건설하고자 전생에 지은 악업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열가지 선업을 닦도록 한 것이나, 미륵으로부터 전해 받은 점찰경을 바탕으로 점찰법회를 봉행한 것 등은 모두 율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불법의 교화가 삼한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금산사를 중창한 후, 율사는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 등으로 자리를 옮겨 미륵신앙의 대중화에 노력하였으며, 삼국통일 이후 이반된 민심을 위로하는 일에도 크게 애쓰셨다. 이에 경덕왕은 진표율사를 경주에 초청하여 보살계 계단을 열게하고, 율사의 미륵신앙 대중화 운동을 크게 지원하였다. 이에 율사의 미륵신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여기에 간략히 기록하여 둔다. (안내문, 김제 금산사, 2009년)

<명부전>

<관음보살을 모신 공간인 원통전>

<삼성각>

<미륵전 뒷편에 위치한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들>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 진표율사가 금당에 미륵장육상을 모시고 도량을 중창하여 법상종을 열어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하여 유폐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문종 33년(1079) 혜덕왕사가 대사구, 봉천원, 광교원 등을 설치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에는 처영뇌묵 대사 등 일천여 승병들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정유재란 시 80여 동의 전각과 산내 암자가 왜군의 손에 전소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선조 34년(1601) 수문대사가 10여명의 도반들과 함께 35년 간에 걸쳐 복원불사를 추진하여 대사구 지역만 일부 재건하였다. 이조 말엽에는 환성지안대사가 수많은 스님들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 산림법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으며 용명 스님의 순교 등 수 많은 고승 대덕 스님들이 주석하던 절이다. 한국 불교의 정화와 중흥을 위해 진력하던 월주 화상이 1961년 주지로 부임한 후 도영.도법 등 도제들과 사부대중의 원력을 모아 대적광전, 미륵전, 대장전, 하서전, 방등계단, 삼성각, 적멸보궁 등을 중건 중수하고 보네루, 일주문, 상서전, 서래선원, 범종각, 종무소, 향적당, 보현당, 설법전, 만월당, 성보박물관, 적묵당, 나한전, 조사전 등을 새로 건립하여 대사구를 완전 복원하고 확장하였다. 1986년 원인 모를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나 월주화상의 원력으로 도제들과 사부대중의 협력을 받아 복원하였고 전주시내에 전북불교 회관을 건립하여 전북지역의 포교를 맡고 있는 호남 제일의 수도와 교화의 중심 도량으로 그 면모를 갖추어 미륵십선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안내문, 김제 금산사, 2009년)

<출처>

  1. 안내문, 김제 금산사,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4. 위키백과,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