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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반남고분군(사적), 영산강유역 백제 토착세력 무덤

전남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 남아 있는 반남고분군(사적)이다. 영산강 하류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한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 비교적 넓은 지역에 40여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군에는 다른지역에서는 없는 대형옹관을 비롯하여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고리자루칼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른 시기의 것은 땅을 파서 옹관을 안치한 후 봉분을 쌓았으나 후대에는 봉분을 쌓고 정상부에 옹관을 안치하였다. 옹관고분은 영산강 유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매장방식으로 지역토착세력에 의해 완성된 형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영산강유역 토착세력일 살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나주국립박물관에 세워졌다.

<자미산성에서 내려다 본 반남면 일대(신촌리, 덕산리)>

반남고분군은 삼한시대 마한과 삼국시대 백제의 지역 토착세력의 무덤들이다. 비교적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평지에 옹관을 묻고 봉분을 조성한 형태이다. 현재까지 약 40여기의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고분 분포도(안내문, 나주시청, 2009)>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동쪽 신촌리에 9기, 덕산리에 14기 이상, 서쪽 대안리에 12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나주 자미산성>

<나주 신촌리고분군과 덕산리고분군>

반남초등학교 주변 평지에 여러기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신촌리 일대에는 9기가 분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9호분 등이 발굴되었으며 금동관(국보)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금반지, 고리자루칼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덕산리 일대에는 14기 이상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고분들은 5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종되고 있으며 삼국시대 백제 지방세력의 무덤으로 보인다.

<신촌리 1호분>

<신촌리 2호분, 3호분>

평지에 봉분을 크고 웅장하게 쌓은 것으로 봉분을 먼저 쌓고 그 윗부분에 옹관을 묻었다고 한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보)>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과정에서 신촌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지역토착세력이 제작한 것인지, 백제에서 지역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인지는 알 수 없다.

<덕산리 1호분>

신촌리 1호분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에 따라서 분류하기는 했지만 동일한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덕산리 2호분>

<덕산리 3호분>

봉분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것으로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덕산리 4호분>

<덕산리 5호분>

<덕산리 6호분>

<덕산리 7~11호분>

덕산리 1호분에서 남쪽으로 700 m 정도 떨어진 곳에 7~11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봉분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나주 덕산리 고분군, 전남 나주시 반남면 덕산리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 덕산리에 남아 있는 고분들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대의 무덤 가운데 일부가 1930년에 발굴.조사되었는데, 이 때 무덤의 형태와 성격이 밝혀졌다. 당시 발굴된 고분은 바깥 모습이 하나의 봉토를 이루고 있으면서 내부에는 3개의 옹관(토기 항아리 관)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무덤 가에는 물이 흐를 수 있는 도랑이 있었다. 당시 출토된 장신구 등의 유물과 옹관묘는 일본 규수지방의 옹관묘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비교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자미산성 서북쪽에 위치한 대안리 1~3호분>

자미산성 서쪽편에 위치한 대안리 일대에는 12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대안리 1, 2호분>

<봉분의 규모가 큰 3호분>

<4~9호분>

자미산성 서쪽편 언덕 아래에는 4~9호분이 있는데 그 중 3기만 현재 봉분을 볼 수 있다. 그 중 9호분은 반남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반남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인 9분과 그 앞에 있는 작은 8호분>

9호분에서는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등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대안리 7호분>

그 너머로 4~6호분이 있는데 봉분은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나주 대안리 고분군, 전남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의 고분군은 삼국시대의 것이다. 그 모습을 살펴보면 바닥이 둥근 원형고분과 사각형인 방대형고분으로 나뉜다. 방대형 고분인 9호분에는 간단한 도랑이 둘려져 있다. 이 고분들의 관을 들여다보면, 도기 항아리에 시신과 부장품을 넣어 묻는 무덤형식으로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옹관묘이다. 옹관묘는 이 지역의 토착적인 묘제이다. 특이한 것은 원형 고분인 5호분을 발굴한 결과 현실(관을 안치하는 공간)의 4벽과 천상을 판석으로 짠 석실분이라는 것이다. 석실분은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통합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백제 지배계층의 묘제가 일반화되어 나타난 것이라 여겨진다. 6호분은 인멸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시굴조사를 통해 정비하였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반남고분군
이곳 반남 고분군에는 대형옹관고분 수십 기가 분포하고 있다. 대형옹관고분이란 지상에 분구를 쌓고 분구 속에 시신을 안치한 커다란 옹(항아리)을 매장하는 방식이다. 이 고분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구별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독특한 고분양식이다. 대형옹관고분은 AD 3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3세기동안 영산강유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3세기경에는 옹관절반을 지하에 묻는 반지하식이었으나 4세기 붕반부터는 지상식으로 발전하며 이때에는 분구의 규모가 훨씬 대형화되어 그 규모가 40~50 m에 이른다. 대형옹관고분은 나주 반남 일대는 물론 영암, 함평, 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형성되고 있으며, 이 지역 고대 세력의 묘제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 옹관고분의 밀집도로 보아 이곳 반남 지역이 고대 지배세력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옹관고분의 출토유물은 영산강유역 계통의 유물이 주를 이루나 후기에는 백제계, 일본계의 유물이 섞이게 되며 가야계의 특징도 일부 보이고 있다. 당시 사회가 백제, 가야, 왜 등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산강의 고대 수로 조건을 이용한 해상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5세기 말경에는 대형옹관고분이 쇠퇴하고 횡혈식석실분, 전방후원형고분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석실은 토착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 지역의 고대세력이 능동적으로 횡혈식석실분을 채용하면서 사회발전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는 6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지방관제에 본격적으로 편입하게 된다.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