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광산구 신창동 일대에 있는 신창동유적(사적)는 초기철기시대 마한 사람들이 살았던 생활모습을 살표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1963년 처음 발굴이 시작되어 53개의 독널이 발견되었다. 이후 1990년대 도로광사 과정에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곳에서는 공방지로 흔적과 수많은 목제유물,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모여주는 탄화미를 비롯하야 다양한 동식물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창원 다호리 유적과 함께 삼한시대 생활모습을 모여주는 대표적인 생활유적이다.
유리구슬,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2,000년 전 신창동 유적을 만나다.
사적 제375호인 신창동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거대한 농경복합유적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위치하며, 영산강변에 낮게 솟은 삼각산(해발 98.1 m)에서 영산강의 서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현재 호남고속도로가 유적을 통과하고 있다. 신창동 유적이 최초로 알려진 것은 1963년 옹관묘 조사를 통해서이다. 그 뒤 국도 1호선 개량공사가 진행되면서 1992년 국립광주박물관이 긴급조사를 실시하여 저습지와 함께 토기가마, 도랑, 주거지, 밭 등이 확인되어 초기철기시대의 생산 및 생활, 무덤이 결합된 대단위 복합유적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다양한 유기물과 생활유물이 포함된 저습지 유적은 학술적.문화적으로 중요성이 인정되어 1992년년 9월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국립광주박물관은 20년간 신창동 유적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 2,000년 전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흔적은 4개의 구릉과 3개의 곡간을 따라 확인되고 있다. 유적의 서쪽을 기준으로 첫번째 구릉에서는 옹관묘, 두번째 구릉에서는 토기가마.도랑.밭, 두번째와 세번째 구릉사이에는 저습지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네번째 구릉의 동쪽은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며 영산강과 만나는데, 이곳에서 도랑(환호)이 확인 되었다. 그리고 두번째와 네번째 구릉의 비교적 높은 지대를 따라 송국리식 주거지와 후행하는 마한계 방형주거지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두번째와 네번째 구릉을 따라 환호와 함께 주거영역이 형성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는 토기가마와 밭, 곡간과 충적대지에는 저습지와 논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에서는 칼.활 등 무기, 괭이.낫 등 농공구, 원통모양칠기를 비롯한 각종 용기, 발화구.신발골.베틀 부속구.현악기.빗 등 다양한 목기와 칠기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거나 최초로 발견된 것들로 국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이와함꼐 다양한 토기, 골각기, 동식물 유체가 출토되어 한국 고대 문화의 여러가지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보습, 신석기시대, 여수 화태도, 여수 송도패총, 여수 안도패총 외
세계와 우리나라의 농경
약 1만년 전 부터 시작된 신생대 제4기의 마지막인 전신세는 흔히 후빙기라 하기도 한다. 이 시기는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해면의 변동, 강수량의 변화, 산림과 색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인류는 이러한 생태환경 변화와 인구 증가 등의 요인에 적응하면서 채집단계를 벗어나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계의 농경은 각지에서 고유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최초의 농경은 약 1만년 전 이른바 비옥한 초생달지역으로 불리는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ㅌ 나일강유역에서 시작되었다. 홍수나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충적토지대를 배경으로 밀과 보리 등이 재배되고 개, 염소, 양, 돼지, 소 등이 가축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중국 양자강 하류지역에서 벼농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으로 절강성 하모도 유적에서는 다양한 농기구와 함께 불탄 쌀, 벼껍질 압착층이 확인되어 이 지역이 동아시아 벼농사의 기원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초기 농경은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는 조.피.기장 등 탄화된 잡곡과 함께 최근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조사된 밭 유구는 신석기시대부터 농경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청동기시대로 전환되면서 벼와 같은 새로운 재배작물과 농사도구가 등장하고 농경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농경은 지속적으로 발달하는데, 초기철기시대의 광주 신창동 유적은 이 시기 대규모 농경복합사회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재배작물 씨앗과 함꼐 괭이.따비.낫.절구공이 등 다양한 목제농사도구, 각종 의례유물이 확인되어 당시 농경기술의 복원과 농경의례에 대한 접근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호미형석기, 신석기시대, 여수 월호도, 여수 개도, 돌칼, 신석기시대, 여수 화태도, 여수 안도 외
괭이, 신석기시대 여수 송도, 보성 동산리
고무래, 청동기시대, 광주 동림동,
고무래는 논이나 밭의 흙을 덮을 때 사용되는 도구이다. 이 고무래는 장방형의 목재에 둥근 구멍을 뚫어 자루를 끼우고, 양끝에는 흙받이를 결합할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뚫었다.
땅을 일구는 도구
밭의 이랑을 만들거나 경작에 필요한 땅을 일구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괭이.삽.보습.따비 등이 있으며, 나무자루를 묶어 사용하였다. 괭이와 삽.보습은 신석기시대 이래 계속 사용되는 도구로 돌로 만드는 것이 기본이나 뼈로 만든 것도 확인된다. 신창동에서는 평괭이와 쇠스랑모양괭이 두 가지 형태의 괭이가 확인되었다. 괭이의 날과 자루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이후 대부분의 농기구는 철로 만들어지는데 이는 농업생산력의 증가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돌칼, 청동기시대, 보성 봉갑리 외
돌낫, 청동기시대, 곡성 현정리, 돌칼, 청동기시대, 장흥 송정리 외
수확도구
경작한 곡식을 수확하는 도구로 돌칼과 낫이 있다. 신석기시대의 농경의 시작과 함께 출현하며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많이 확인된다. 돌칼은 평면이 타원형 또는 반원형이며 중앙부에 1~2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끈을 꿰어 사용한다. 중국 화북지방 농경문화와 관계가 있으며 처음에는 잡곡의 수확도구로 만들어졌다. 이후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벼농사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낫은 형태 상 등과 날로 되어 있으며 한 쪽 끝에 자루를 묶어 사용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신창동 탄화곡물,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신창동 유적의 벼농사와 작물
신석기시대에는 조.기장과 같은 잡곡 위주의 농경이 이루어지다가, 청동기시대로 전환되면서 벼농사가 새로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두류.맥류 등 다양한 재배작물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는 벼, 조, 밀, 들깨, 오이, 삼 등 다양한 재배작물이 확인되었다. 재배벼는 크게 자포니카와 인디카의 두종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자포니카는 낟알의 길이가 짧고 폭이 넓은 단립형이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벼는 전형적인 자포니카로 판명되었다. 특히,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등의 벼종에 해당하는 자포니카 열대형인 자바니카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DNA분석 결과도 재배벼인 단립미이며, 열대형의 자포니카로 분류되는 결과를 얻었다. 이는 이 시기에 새로운 벼종의 유입가능성을 보여준다.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다량의 벼껍질과 불탄 쌀 등은 대부분 유적 주변의 논에서 재배되어 수확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양한 목제 농구와 최소 500여 톤을 능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벼껍질 압착층의 확인은 대규모 수전의 가능성을 증명해 준다. 한편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밭 유구의 흙을 분석한 결과, 벼를 재배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신창동 유적이 논벼와 함께 밭벼의 생산기반이 갖춰진 것으로 증명되었으며, 우리나라 벼농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볍씨 자국 토기,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그릇을 빚을 때 묻었던 볍씨 자국이 가마에서 구운 이후에도 석고에 모양을 뜬 것처럼 남아 있다. 이처럼 바닥에 볍씨 자국이 남아 있는 토기편들이 확인되었다.
농사도구
농사도구는 크게 굴지수, 수확구, 곡물가공구로 구분된다. 굴지구는 땅을 일구는 괭이와 따비, 수확구로는 돌칼과 낫, 곡물가공구로는 갈돌과 갈팔, 돌확과 공이, 절구공이 등이 있다.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농사도구가 출토되었는데 괭이, 따비, 낫자루, 절구공이 등이 있다. 괭이는 날이 달린 몸체와 자루로 구성되며, 평괭이와 쇠스랑형괭이의 두종류가 있다. 괭이는 머리 부분에 네모난 구멍을 만들고 자루를 결합한다. 괭이의 앞면에서 자루를 끼운 뒤 밖에서 자루의 중심에 쐐기를 박아 고정하였는데, 신창동 유적에서만 확인되는 독창적인 결합기술이다. 따비는 두 개의 날을 가진 상날따비로 농경문청동기에 보이는 것과 유사한 형태로 복원이 가능하며, 민속품에 보이는 따비와도 비슷하다. 낫은 31점으로 많이 출토되었으며, 작은 자연목 또는 가지를 막대모양으로 자르고 낫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을 뚫었는데, 고정을 위한 홈을 만든 것도 있다. 절구공이는 원형의 목재를 이용하여 중앙부에 손잡이를 만들고 양끝을 공이로 이용한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쌍날따비,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따비는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일구는데 사용하는 굴지구이다. 날의 수에 따라 외날따비와 쌍날따비로 구분된다. 농경문청동기에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최근까지도 사용된 대표적인 농사도구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평괭이,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괭이는 땅을 파고 고르는데 사용된 도구로 날과 자루로 구성된다. 이 괭이는 판상의 목재에 네모난 구멍을 만들어 자루를 결합하는 형태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평괭이,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쇠스랑모양괭이,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괭이는 땅을 파고 고르는데 사용된 도구로 날과 자루로 구성된다. 이 괭이는 뾰족하고 긴 날이 2~3개 달려 있는 목재에 네모난 구멍을 만들어 자루를 결합한 형태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0
낫자루,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철낫을 장착해서 사용하는 도구로 작은 자연목 또는 가지를 막대 모양으로 잘라내고 낫을 끼울 수 있도록 구멍을 뚫었다. 낫과 나루를 묶기 위한 홈을 만든 것도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활,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활은 탄성을 이용하여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이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활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만든 직궁으로 양쪽 끝 부분 일부가 남아 있다. 시위를 거는 부분에 탄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가 달려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사슴, 멧돼지
그물추,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자돌구,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그물추, 그물 끝에 매달아 그물이 물 속에 가라앉게 하는 어로 도구이다. 신창동에서 확인된 그물추의 형태는 원통형과 구형이 있다. 모두 그물에 매는 구멍을 가운데에 뚫어 만들었다. 자돌구, 길이가 길고 한쪽 끝이 뾰족한 형태로, 사슴의 앞다리 뼈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자루의 끝에 끼워 수심이 얕은 곳에 있는 물고기를 찔러서 잡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가리,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데 사용하는 어구로 싸리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위가 좁고 아래로 점차 바라진 형태이며, 가운데가 열려 있다. 고깔모양으로 복원이 가능하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논 어로의 출현
식물성 식량은 채집과 농경을 통해 확보하는 것임에비해 동물성 식량은 사냥과 어로, 가축사육을 통해 확보되었다.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는 잉어, 가물치, 숭어, 참돔, 가오리류와 넙치류 등의 어류와 재첩, 작은말조개, 굴 등의 패류가 확인되었다. 논은 벼농사를 위한 생산지이지만, 예전 우리의 농촌에서 볼 수 있었던 논 물고기잡이도 이루어졌다. 통발과 가리, 자돌구, 토제 그물추가 달린 어망을 이용하여 논의 용수로나 방죽에서 붕어와 잉어 등 민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이렇게 논 어로를 통해 잡는 어류는 논농사의 시작과 함께 논 환경에 적응하여 특징적인 생활양식을 갖게 된 어류이다. 이와함께 재첩, 우렁이, 다슬기, 메기 등 민물어패류 등의 채취도 논의 관개시설, 즉, 수로와 방죽.보 등지에서 행해졌다. 대체로 농사기간 중 여가를 이용하여 행해진 어로작업은 농민에게는 동물성 단백질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봄, 소, 사슴, 오리
여름, 잉어, 가물치, 숭어, 오이, 밀, 살구, 다슬기, 박
가을, 가래, 재첩, 말조개, 밤, 벼, 도토리, 머루
겨울, 수달, 멧돼지, 자라, 기러기, 꿩, 넙치, 가오리, 참돔
나무방망이, 절구공이,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나무방망이, 나무방망이는 물체를 단단하게 다지거나 빻는 등 생활 속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밖에 견과류의 껍질 분리 등의 용도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절구공이, 원형의 목재를 이용하여 중앙부에 손잡이를 만들고 끝을 공이로 이용한 쌍공이 형태의 절구공이이다. 끝부분이 둥근 것은 껍질을 벗기는 용도로, 편병한 것은 곡물을 빻는 용도로 보기도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시루,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옹형토기와 뚜껑,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국자,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음식을 조리기에서 식기로 옮기는 데 사용되는 취사도구이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국자는 손잡이 부분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이지만, 현재 사용하는 국자의 모양과 거의 같은 형태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주걱,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음식을 조리기에서 식기로 옮기는 데 사용되는 취사도구이다. 현재 사용하는 주걱과 비슷한 모양이다.
뚜껑, 시루와 항아리,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조리도구와 식기
조리는 재료의 씻기, 벗기기, 삶기, 끓이기, 데치기, 튀기기, 찌기 등의 여러가지 행위를 말한다. 구석기시대에는 주로 날것으로 먹거나 구워 먹는 방법이었으나, 토기가 등장하면서 인류가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의 종류가 확대되고, 다양한 조리법도 가능하게 하였다. 철기의 등장과 함께 시루, 솥, 국자와 같은 취사도구와 취사설비의 개량과 보급으로 조리법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시루는 찌는데 사용하고, 옹형토기는 주로 삶거나 끓이는데 사용되었다. 다른 조리도구로 밥과 같은 음식을 조리기에서 식기로 옮기는데 사용된 주걱, 국이나 죽과 같은 음식을 옮기는 국자가 있다. 신석기시대에 성립된 바리모양 토기는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옹,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으로 기능분화가 시작된다. 이러한 분화는 도작농경의 전파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더욱이 초기철기시대가 되면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추가된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식기는 토기와 목기, 칠기로 구분된다. 토기로는 굽다리접시, 검은간토기, 바리, 대접, 컵형토기, 접시 등이 있다. 목기로는 굽다리접시, 원통모양칠기, 칸막이고배, 사각용기, 완, 접시, 굽다리항아리가 있다. 이러한 기종구성은 이후의 시기에도 변화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창동 유적이 형성된 시기에 이미 오늘날의 식탁 위의 식기의 전 기종이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국자, 굽다리접시, 뚜껑, 완, 바리,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토제식기식기로는 굽다리접시, 검은간토기, 바리, 대접, 접시, 귀때토기 등이 있다. 신창동 유적이 형성된 시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식기의 전기종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손잡이 달린 사각용기, 사각용기, 칸막이 고배, 완,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목제용기는 굽다리접시.원통모양칠기.칸막이고배.사각용기.완.접시 등으로 토기와 기본 구성이 동일하다. 칠 용기는 의례용 또는 신분이 높은 계층을 위한 고급 식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손잡이 달린 호,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손잡이 달린 호,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손잡이 달린 호, 호형토기
고상가옥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건축부재와 집터 등을 통해 복원한 건물이다. 지금도 동남아시아 지역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로 곡식 등을 저장하기 위해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식량의 저장
신창동 저습지에 인접하여 직경 22 cm 내외의 참나무 기둥이 세워진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집의 출입시설에 해당하는 문짝, 집을 만드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건축부재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고상가옥 형태의 집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상가옥은 기둥을 세우고 바닥면을 지면보다 높게 만들어 사다리를 통해 출입하는 마치 원두막과 같은 형태의 건물이다. 이 고상가옥은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부경과 같이 창고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이 창고는 곡식을 비롯한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 만들어졌다. 토기는 기능에 따라 조리기와 식기, 저장용기 등으로 구분된다. 항아리는 주로 저장용기로 사용되는데, 내년에 파종할 씨앗이나 식량으로 사용할 곡식을 담아 습기와 동물의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고상가옥 안에 보관하였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