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동 유적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영산강 유역 저습지에서 확인된 초기 철기시대 생활유적이다. 습지라는 자연적 특성으로 이곳에서는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목재용품들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에서 당시 중국과의 교류 등을 통해 상당히 발달된 수준의 목재 가공기술과 생활수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칠기제품이 다양한 형태로 출토되었다.
<목재를 가공해서 만든 수레바퀴(재현품)>
당시 중국과 낙랑 등에서 사용하던 바퀴와 비슷한 형태이다.
경이로운 목기와 칠기의 메카
청동기시대는 경작지 확대와 벌목을 위한 대형의 돌도끼가 등장하고 끌, 자귀, 대팻날의 목공구세트가 완성되었다. 이는 주거건축 기술이 발달하는데 영향을 주고, 다양한 목기의 제작이 이루어져 생활용구의 다양화를 촉진하는 듯 역동적인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 청동기와 철기의 유입으로 공구의 재질이 금속으로 바뀌게 되면서 기술혁신과 생산력이 증대되는 등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목제유물을 용도별로 분류해 보면 무길, 농공구류, 용기류, 제의구류, 방직구, 악기류, 거여구, 건축부재, 생활용구가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생산관련 자료는 철기가 남부지방으로 보급된 시기의 생산기술적인 측면과 함께 변화된 사회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 농경과 함께 목기와 칠기의 생산이 있다. 신창동 유적은 생활, 생산, 무덤 등 다양한 성격의 유구와 유물이 조사되어 당시 문화를 총제척으로 규명할 수 있는 복합유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중 저습지와 주변에서 확인되는 목기, 철기, 천, 토기 등 다양한 생산관련 자료는 초기 철기시대 경제활동과 기술의 발달정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칠용기, 칠주걱, 마연용 천, 칠기 등 철기 생산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어 신창동 유적이 한국 칠기의 메카임이 드러났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자귀자루, 도끼자루,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자귀자루, 본 줄기에서 뻗은 가지를 손잡이로 하고 본 줄와 만나는 부분을 깎아 자귀를 결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질기고 단단한 성질의 참나무를 자용하였다. 도끼자루, 나무를 베거나 분리하는 작업에 사용하는 도끼의 자루이다. 1자 형태의 자루는 네모는 구멍에 도끼를 관통하여 장착하고, ㄱ자형태는 꺾인 부분에 도끼의 공부를 끼워 장착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목제용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굽다리접시.원통모양칠기.칸막이고배.사각용기.완.접시 등이 있다. 칠기로 제작된 목제용기는 제작과정이 복잡하고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어 의례 등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각용기, 접시, 손잡이 달린 사각용기, 국자, 뚜껑,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벚나무와 참나무.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목제품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수종들이다.
벚나무,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두 번째로 많은 수종이다. 현악기, 바디, 검집, 부채자루, 고깔, 칸막이고배, 완, 뚜껑 등에 사용되었다. 특히 오리나무류와 함께 칠제품에 선택적으로 사용된 용재이다. 참나무,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가장 많은 수종이다.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등이 이에 속한다. 괭이와 따비, 방망이 등의 농공구와 수레 부속구, 말뚝 등에 사용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대팻날도끼, 조갯날 도끼, 홈자귀
농구와 공구의 자루
농구는 괭이, 따비, 낫자루, 절구공이 등이며 절구공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날과 자루부분을 결합하여 사용하게 된다. 낫은 쇠로 만들어진 날이 나무로 만든 자루에 장착되지만, 괭이와 따비는 날과 자루를 모두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자루는 대부분 적당한 굵기의 나뭇가지를 사용하였는데, 괭이와 자루의 장착은 자루의 끝부분을 쪼개고 쇄기를 박아 결합을 강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낫자루의 경우에도 쇠로 만들어진 날 부분을 홈에 삽입한 뒤 쐐기 등으로 고정하였다. 공구는 도끼와 자귀자루가 대표적이다. 도끼와 자귀는 장착된 날의 방향에 있어 차이가 있는데, 보통 도끼날은 작업시 팔의 운동방향과 평행하게 장착되고 자귀는 직교한다. 도끼와 자귀자루는 장착방법에 있어 두 가지로 나뉜다. ㄱ자 형태의 도끼와 자귀자루는 줄기에서 뻗은 가지를 자루로 하고, 줄기부분을 사용하여 도끼 등을 장착할 수 있도록 가공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신창동 공방에서 만들어졌던 목재도구들.
조선시대 농기구 등을 만들었던 대장간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신창동 공방
목공구는 도끼, 자귀, 대팻날, 끌, 새기개, 송곳, 손칼 등이 있다. 이러한 목공구는 대부분 나무나 뿔로 만들어진 자루에 결합하여 사용하는데, 신창동에서는 도끼와 자귀자루, 손칼손잡이가 출토되었다. 목기의 제작과정은 적합한 나무의 선정과 벌체에서 시작하며, 각 과정에 적합한 도구를 사용하였다. 농공구 자루는 참나무류로 만들어졌다. 목제용기와 칠기는 벚나무, 단풍나무, 오리나무를 사용하였으며, 북은 버드나무로 만들어졌다. 농공구 자루는 거친 작업에 사용되는 것으로 쉽게 파손되지 않도록 단단하고 질긴 성실을 가진 참나무류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현재도 전통 북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버드나무는 악기를 만드는데 적합한 나무이다. 이처럼 신창동 사람들은 나무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용도에 맞는 적절한 나무를 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제품은 말뚝과 같이 도끼로 가공하여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칸막이고배처럼 옻칠로 마무리되는 것까지 제작과정과 사용도구에 있어 매우 다양하다. (안내문, 광주박물관,2018년)
원통모양칠기, 초기철기시대,광주 신창동,
원통모양칠기는 통나무나 얇은 판재를 원통모양으로 가공하여 만든 몸체에 바닥판을 결합시켜 완성하였다. 내외면 모두에 두꺼운 옻칠을 한 고급용기이다.
칠기란?
칠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천연도장재료이다. 칠은 옻나무 수액을 1차적으로 가공한 생칠, 2차 가공된 정제칠로 구분된다. 생칠은 모아진 옻나무 수액 속의 불순물을 걸러낸 것으로 칠하는 목적보다는 광택을 내거나 접착용으로 주로 사용된다. 정제칠은 생칠에 열을 가하면서 수분을 증발시키고 여과하여 얻어진 것으로 투명칠이라고도 한다. 투명칠에 여러가지 안료를 첨가하여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다. 또 칠기는 칠하는 물건의 재료에 따라 나무에 칠하는 목태, 금속에 칠하는 금태, 토기에 칠하는 도태 등으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칠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방부, 방수, 방충의 기능과 내구성을 강화하는데 사용된다. 또, 아름답게 장식하여 미적인 감각을 표현하고 강력한 접착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칠기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오랫동안 만들어지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칠주걱,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아랫부분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들어 전면에서 보면 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옻칠의 채취 및 가공, 칠기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칠이 담긴 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신창동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내부에 칠이 담겨 있는 것이 있다. 옻칠 재료인 옻나무 수액을 보관하거나, 정제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통모양칠기 몸체,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원통모양칠기 저판,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옻칠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토기에 칠을 하여 표면을 매끄럽고 광택이 나게하여 아름답게 하며, 수분의 침투를 방지하였다. 옻칠토기는 흑칠을 하여 표면이 검은 것과 생칠 후 마연하여 투명한 것이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옻칠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신창동의 칠기
신창동의 칠기 제작기술은 용기제작에 있어 접합 뿐 아니라 다양한 재질에 적용되었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칠기는 대부분 목태이며 장식문양이 없는 흑칠이 기본이다. 금태는 녹 부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칠한 것인데 검집의 연결금구에 유일하게 보인다. 도태는 토기의 안과 밖을 칠한 것으로 표면을 매끄럽게 하고 습기의 침투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신창동에서는 칠주걱과 내부에 칠이 담겨 있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또, 내면 바닥에 칠이 묻어 있는 천 조각이 부착된 토기도 있다. 천 조각은 토기 내면을 칠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창동 유적에서는 완성된 칠기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칠기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는 2,000년 전 신창동은 고도의 칠기제작기술을 소유한 생산 집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유적 주변의 영산강을 칠천이라 칭하였던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