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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박물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상주는 영남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특징으로 삼국시대 이래 관리가 파견되었다. 고려초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할 때 경상도를 관할하는 절도사가,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상주읍치 동문 부근 복룡동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취락유적이 확인되었는데 다양한 시기의 주거흔적과 함께 토기, 도자기 등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통일신라 이래 남장사, 북장사 등 많은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다양한 시기의 불교유물들이 전해오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무덤과 토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 상주지역의 고분들은 이전의 돌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화하녀서 이전의 많은 양의 껴묻거리는 소박하게 변했다. 또한 화장묘가 유행하는 등 매장에 대한 관념도 서서히 바뀌어 갔다. 돌방무덤은 지상에 깬돌이나 판돌로 방의 내벽처럼 쌓아 올려 널방을 만든 형식이다. 널방의 네 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기울어지듯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천장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널방 바닥에는 주검받침대가 있고 한쪽 벽에는 통로인 널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무덤의 변화와 함께 토기에서도 변화상이 확인된다. 이전의 삼국시대 토기의 특징인 높은 굽이 퇴화되고 뚜껑과 그릇 표면에 무늬를 새긴 도장을 찍는 등 통일신라의 새로운 토기 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병, 굽다리입큰토기, 사발 등 새로운 토기 종류가 나타났다. 한편 통일신라 말기에는 굽접시와 도장무늬가 사라지고, 목이 긴 병이나 네모진 병, 그리고 화장 후 뼈를 추려 담은 뼈단지가 유행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뚜껑굽다리접시, 청리고분군, 삼국시대

짧은목항아리, 청리고분군, 통일신라시대, 굽다리긴목항아리, 신흥리고분군, 통일신라시대

병, 뚜껑합, 뚜껑굽다리접시, 청리고분군, 통일신라시대

상주 복룡동유적
복룡동유적은 상주지역에서 처음 발굴 조사된 대규모의 취락 유적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유구들이 동일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조영되고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상주지역의 문화상을 연구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대구.경산의 영남 내륙 지역과 충주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과의 문화상의 연관성이나 연속성을 비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송국리형 주거지가 낙동강 상류지역에서도 확인됨에 따라 청동기시대 문화상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며, 그 전파 경로에 대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돌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복룡동유적의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초창되어 이 지역에서 생활하던 당시 사람들의 주거 공간의 분할과 규모 등 지방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복룡동 유적이 상주읍성지의 북동편 외곽에 위치하며, 우물과 다양한 기능의 수혈 유구들이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의 서민 생활상을 복원.연구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복룡동 유적에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유구들과 함께 다양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상주 시가지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상주 사람들의 사회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납석제 호, 병, 벼루, 복룡동유적, 통일신라

명문 납석제품, 복룡동유적, 통일신라

상주 복룡동 256번지 유적에서 출토된 납석제 유물로 표면에 한자가 새겨져 있다. 한자의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사벌주희”라는 여성 인명을 중심으로 모자 또는 모녀 관계로 추정되는 남자 인명과 6명의 여성인명으로 보인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암키와, 수키와, 수막새, 복룡동유적, 통일신라시대

암막새(통일신라), 수막새, 암막새(고려시대), 복룡동유적

암막새, 복룡동유적, 통일신라.고려

매병, 복룡동유적, 고려시대

분청사기매병, 유개호, 복룡동유적, 조선시대

고려시대 도자기
청자는 고려시대에 중국의 도자기 생산기술에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이후 다양한 기종과 문양, 고급 유약의 개발로 독창적이고 맑은 비색의 청자를 완성하였다. 부단한 노력을 통해 청자는 중국 송나라의 태평노인이 쓴 『수중금』에 ‘고려자기의 비색은 천하제일 중 하나’라고 꼽을 만큼 발전하였다. 청자는 장식기법에 의해 안료를 사용하지 않고 무늬가 없는 순청자, 고급청자의 최절정을 대표하는 상감청자, 인물 또는 동식물을 모방해서 만든 상형청자, 진사나 철회, 철채 등의기법으로 화려하게 무늬를 베푼 화청자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화려한 귀족문화를 대표하는 공예품인 청자는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상주지역에는 청자 가마터로 알려진 곳은 없으나, 무덤이나 사지에서 순청자와 상감청자가 출토된 사례가 있다. 특히 서곡동 폐사지에서 출토된 청백자은구대접은 중국 송나라로부터 수입된 유물로, 당시 상주지역의 높은 문화수준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청자 완, 청자 철화물무늬매병, 상주 출토, 고려시대

청자용무늬 매병, 청자 연꽃무늬 참외모양 주전자, 상주출토, 고려시대

청자 잔과 잔받침, 청자 꽃무늬 잔, 상주출토, 고려시대

청자 완, 상주 청리 출토, 고려시대

청자 물가풍경무늬대접, 청자 버드나무물새무늬 대접, 상주 출토, 고려시대

청자 국화무늬 대접, 청자 여지넝쿨무늬 대접, 상주 출토, 고려시대

청자 국화무늬 팔각접시, 청자 국화무늬 팔각접시, 상주 출토, 고려시대

상주 상판리 자기가마 유적, 경북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
상주박물관이 직접 수행한 최초의 학술발굴조사 유적으로 분청사기 가마 1기와 폐기장 1개소가 확인되었다. 가마는 후구부부터 연소실, 초벌구이칸까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었다. 초벌구이칸은 연통부와 겸하는 곳에 만들었으며, 접시와 대접, 잔탁 등이 중첩되어 있다 당시 가마의 조업상황과 구조파악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발굴된 유물로는 분청사기 대접과 접시를 비롯하여 제기, 잔받침, 고족배 등 고급 제작기술에 의한 다양한 기종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우리나라 가마터 유적에서는 최초로 분청사기 베개가 출토된 것이 매우 주목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분청사기 인화무늬 합 뚜껑, 분청사기 베게, 15세기, 상판리 자기가마유적

분청사기 물고기무늬 접시, 분청사기 용무늬 접시, 15세기, 상판리 가마유적

상주 상판리 자기가마 VI유적, 경북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
상주박물관이 수행한 두 번째 학술발굴 유적이다. 조사결과 자기가마 1기와 폐기장 2개소가 확인되었다. 내부에서 각종 초벌자기편, 일상용기인 대접과 접시, 베개, 향로, 화분, 돈 등의 상형자기, 명문자기가 출토되었다. 가마의 구조와 청자의 전통이 남아 있는 초기 분청사기가 다량으로 출토되는 점을 통해 조선전기 상품자기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인수’명 분청사기대접, ‘관’명 분청사기대접, ‘예빈’명 분청사기대접, 상주출토, 조선시대

명문이 새겨진 분청사기, 조선시대
상주에서 출토된 명문은 크게 관청명, 장인명, 지역명, 기호 등으로 구분된다. 관청명으로는 궁중에서 쓰이는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담당했던 사선사(1372~1420년), 손님을 맞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예빈사(921~1894년), 세자부인 인수부(1400 ~ 1556년)가 있다. 이 외에 장인이름으로 쌍림, 대, 정, 세와 사찰을 의미하는 卍자 등의 글자가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분청사기 ‘사선’명 접시, 상판리 유적, 분청사기 연꽃넝쿨무늬 ‘사선’명 대접, 상주 복룡동, 분청사기 인화무늬 발, 상판리유적, 조선시대

분청사기 국화무늬 접시, 15세기, 상판리 유적

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상주 출토, 조선시대

백자 명기, 백자 접시, 백자 대접, 상주 출토, 조선시대

백자 병, 상주 출토, 조선시대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복제품

상주의 용화사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높이 1.98 m의 석불입상으로 마멸이 심해서 세부수법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다. 불상의 머리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지만 민머리처럼 보이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길고 풍만한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지만 단정한 인상이다. 체구는 단정하며, 양 어깨에 걸쳐 있는 옷자락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 역시 많이 마모되어 가장자리에 새겨진 불꽃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단정한 체구에 다소 경직되고 현실적인 면이 강해진 특징을 가진 불상으로, 통일신라 후기 석불입상의 경향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 석조천인상, 보물

화강암질의 넓은 돌 2장에 높이 1.27 m의 주악상과 높이 1.23 m의 공양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주악상은 인쪽을 향하여 비파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화관을 쓴 머리는 앞 으로 숙이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연주하는 자태는 약간 미소를 머금은 단아한 표정이며, 비파를 타는 두 손의 표현은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어깨에 걸친 옷은 바람에 날리듯이 좌우로 구불거리며 흩날려서 매우 율동적이다. 아랫도리에는 주름이 져 있으며, 윗도리 속에서부터 늘어지는 끈이 좌우로 바람에 날리듯 표현되었다. 공양상은 오른손으로 연꽃 봉우리를 받쳐들고 오른쪽을 향해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자연스럽고 동적으로 묘사되었다. 두 석상이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옷차림은 당시 복식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며, 만들어진 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신해명동종, 서곡동 출토, 고려 1251년, 복제품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다.
상주의 불교문화는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830년(흥덕왕5)에 진감국사가 창건한 남장사를 포함한 ‘상주 4장사’인 북장사, 갑장사, 승장사(절터)등 14개의 전통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음악인 범패의 발상지인 만큼 곳곳에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유물들이 전한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영된 것으로 8세기 ~ 9세기의 상주 공성면 출토 금동보살입상, 증촌리 석불입상과 화달리 삼층석탑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잇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나타난다. 복룡동석불좌상, 목가리 석불입상, 갑장사 삼층석탑, 상오리 칠층석탑 등이다. 서곡동 폐사지에서 출토된 신해명동종, 동제국지, 동제파수부용기, 동제바라 등 우수한 공예품을 통해 불교문화의 발달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장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불 990호)과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923호), 북장사 영산회괘불(보물 1278호), 용흥사 삼불회괘불탱(보물 1374호) 등이 수작으로 꼽힌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동제바라, 서곡동 출토, 고려시대, 복제품

바라는 발자, 동반, 요발이라고도 불리는데 불전에 향을 올릴 때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는 불교 도구입니다. 범패를 행할 때 2점 1조로, 두번 부딫쳐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금동보살입상, 공성면 효곡동 출토, 통일신라, 복제품

동제국자, 서곡동 출토, 고려시대, 복제품

고려시대의 상주
995년(성종 14) 오늘날의 도제를 최초로 실시하여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지방장관인 절도사를 파견한다. 상주는 영남도라 하여 오늘날의 경상도 12주 48현을 관할하는 절도사가 배치되었다. 절도사는 지방관리의 행정을 사찰하고 승진과 면직을 정하는 권한을 지녔으며, 후에 안찰사, 안림사, 도관찰출석사 등으로 바뀌었다. 990년(성종 9) 상주의 옛 이름인 낙양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 하여 ‘낙동강’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1022년(헌종 3) 상주에 안동대도호부를 설치해 경주와 진주를 관할하고, 1014년(현종 5) 안동대도호부를 경주로 옮긴 후 안무사를 배치하였다. 함창은 964년(광종 15) 고령군에서 힘령군으로 고쳤다. 고려시대 왕명 및 공문서 전달, 지방관 및 관원의 파견, 특수물자 수송 등을 위하여 전국에 525개소의 역침을 정비하였고, 중요 간선도로를 주요 지명을 따 22도로 나누었다. 이중 상주를 거쳐 가는 상주도의 속역은 모두 25역이다. 1017년(현종 9)에 상주에 목사가 설치되었고, 관내 7군 18현 2지사부를 지휘 감독하는 계수관을 두었다. 함창은 1018년(현종 9) 함창군으로 바뀌었고,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다. 1254년(고종 14) 몽고군의 6차 침입시 몽고장수 차라대가충주산성.상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은척 황령사 승려 홍지의 반격으로 물러갔다. 1314년(충숙왕 1)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로 바꾼 후 오늘에 이른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