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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박물관] 조선시대 지방통치

상주는 조선초 태종 때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할 때 경상도 감영과 상주목이 설치되었다. 읍치에는 읍성을 쌓았으며 조선시대 작성된 여러 고문서나 지도 등에 그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읍치에는 옛 관아건물로 객사인 상산관, 동헌 문루인 태평관 등이 남아 있으나 일제강점기 도시화 과정에서 읍성은 허물어지고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 지방통치의 전성기를 맞다.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경기.충청.경상.강원.황해.함경.평안도)로 나누는 지방 행정체제가 갖추어지고, 지방통치기구인 군현제가 정비되었다. 속현과 향소부곡을 왕이 임명한 수령이 다스리게 된 것이다. 상주목은 경상감사의 본영이자 영남의 중심지로 경상남도의 일부 군현과 세개의 부곡, 속현 등을 다스리는 거점역할을 하였다. 수령과 그를 보좌하는 향리 그리고 재지사족으로 구성된 향청은 군현 통치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상주는 영남대로의 중요한 요충지로써 도로 교통이 발달하였다. 유곡역과 낙동역 등의 역원은 조선시대 들어와 낙동강과 강창을 연결하면서 그 역할이 부각되었다. 경상도 도선생안과 상주목 목선생안은 지방통치의 효율성을 기하려는 목적을 가지며, 상주 향리의 삶을 담은 연조귀감을 통해 당대 지방통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목선생안, 조선시대

상주목사로 부임한 목민관들의 명단을 기록한 책이다. 상주목제명록이던 것이 새로 개장할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조선 1604년(선조 37)에 부임한 김상용 목사가 체계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 누대 수백 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상주지역의 지방행정 통치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편병, 복룡동 유적, 고려시대


김선치 벼루, 고려시대,

김선치(1318 ~ 1398년)는 고려시대 무신으로 1363년 홍건적을 평정시킨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고,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382년에 상주로 은퇴하였습니다. 이 벼루는 김선치가 당대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명선치년십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경상감사도임 순력행차 (모형)

관찰사는 조선시대 8도에 파견된 지방 통치의 책임자이다. 감사.도선생.도백.방백 등으으로 불렸으며, 행정.군사.감찰.관원임명 등을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임기는 1년을 원칙으로 각종 재원의 수세, 권농, 진재, 형옥, 교육과 주민의 교화, 서적의 출판, 수령에 대한 감찰과 군 지휘관인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역할을 겸하였다. 또한 도내를 다니며 수령을 비롯한 지방직 관원들의 성적을 평가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자기 관할 내의 고을을 살피기 위해 순력하는 행영체제에서 이후 유영체제로 바뀌었다. 관찰의 순력 행차 시 그 행렬의 수가 수백에 달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경상도칠십이관 채색필사지도, 조선시대

경상도 72관이 채색된 오방색 필사지도이다. 좌도 39관, 우도 33관이 표기되어 있으며, 각 지역들이 붉은 선으로 이어져 있다. 다른 지도들에 비해 산줄기보다 물줄기가 굵게 표시되어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연조귀감, 조선시대

조선 정조 때 이진흥이 향리들의 사적을 모아 정리한 책으로 1777년(정조1)에 상주에서 간행하였다. 전국의 향리를 대상으로 고려사를 비롯한 문집.읍지 등을 참조하여 엮은 귀중한 자로이다. 특히 「이직명목해」는 향리에 관계되는 용어를 해설하였으며, 「관감록」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핵심 부분으로 「향리열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국난극복과 임진왜란
1592년 4월 25일 북천에서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중앙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의 선발부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592년 10월 20일 상주 가판관으로 부임한 정기룡장군은 용화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같은 해 11월 23일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정기룡장군은 의병들과 힘을 모아 왜군을 상주에서 몰아냈다. 정기룡장군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1592년 임닌왜란 때 별장이 ㅣ되어 경상우도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거창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고 금산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였다. 상주목사 김해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을 맡았고, 1594년 상주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1610년에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랐으며,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죽었다. 시호는 충의로 상주 충의사와 경남 하동 경충사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북천전투

1592년 4월 15일 부산에 왜군이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4월 17일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상주로 급히 파견하였다. 4월 25일 순변사 이일은 중앙에서 데려온 궁수 60명과 농민군 800여 명을 이끌고 상주 북천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상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조선의 민관군과 왜의 선봉주력부대가 공식적으로 마주한 최초의 전투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이축 추증교지, 조선시대

조선중기 학자이자 의병장인 이축(1565 ~ 1647년)은 상주 함창 출신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습니다. 이 교지는 고종이 이축을 정3품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로 추증하는 내용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징비록, 조선시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이 원인, 전쟁상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제목인 ‘징비’는 『시경』 소비편의 “예기징이비역환”,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정기룡 증시교시, 조선시대, 정기룡장군에게 충의공 시호를 증시하는 교지입니다.

매헌실기 목판

정기룡의 사적을 집성한 실록 목판인데 1718년 후손 윤의 요청으로 채휴징이 연보를 편찬하였고 1746년 사적과 연보를 같이 편찬하였다. 목판의 내용은 정기룡 개인 전기 집성일 뿐 아니라 임진.정유 양란에 관한 귀중한 사료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매헌실기, 조선시대

조선중기 임진.정유 양란에서 전공을 세운 무신 정기룡(1562 ~ 1622년)의 사적을 집성한 기록이다. 정기룡은 임진왜란 때 거창.금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상주성을 탈환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매헌실기」 권1에는 “11월에 상주에 진치고 있던 왜적을 크게 부수고 상주 고을을 수복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돌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에서는 창의군, 충보군, 상의군 등으로 구성된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도처에 머무르고 있던 왜군을 습격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의병은 지역의 양반이나 유학자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자기집 노비나 소작농민에게 무기를 들게 하였고, 흩어졌던 농민과 대오에서 이탈한 군인들을 설득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1592년 7월 30일 상주에서 결성된 창의군은 8월 1일 황령사에 의병소를 설치하였다. 청주에서 활동하던 이봉을 주장으로 하고 중위장에 이천두, 기록에 채천서, 홍경업, 조정을 지휘부로 하였다. 이외에도 신문숙, 신추백, 김경추, 권종경, 권여림, 이사확, 이사회 등 많은 사람들이 적극 참여하였다.충보군은 1592년 8월 16일에 노대하, 임창원, 조익 등이 궁수 10여명을 모아 속리산에서 창의하였다. 김홍민을 대장으로 하고 중위장에 이제경, 장서에 김홍미, 조익으로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상의군은 1592년 9월 13일 경에 정경세, 이전, 이준, 송량 등이 백화산 고모담에 의병 진영을 마련하였다. 김각을 대장으로 하고 소모관에 정경세, 이준, 송량, 장서에 이준, 영병에 감사중, 노함, 김광복 등으로 조직을 이루었으며, 외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상주에는 이러한 세 개의 의병조직 외에도 이축을 선봉장으로 하는 의병 등 다양한 조직이 구성되었다. 1602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으로 인한 질병과 가난을 해결하고자 여러 문중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전국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을 설립한다. ‘존애’는 ‘존심애물’에서 나온 말로, ‘본심을 지키고 길러서 남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존애원에서는 의료활동을 비롯하여, 선비들의 모임인 낙사계와 경로잔치였던 백수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존애원 창설에 동참한 곳은 진양정씨, 홍양이씨, 여산송씨, 영산김씨, 월성손씨, 청주한씨, 상산김씨, 재령강씨, 단양우씨, 화산김씨, 무송윤씨, 창령성씨, 전주이씨 등 13개 문중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임진창의록,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상주지역의 의병인 ‘상의군’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석천 김각(1536 ~ 1610년)의 활동상황을 여러 일기와 기타 기록에서 찾아 모아 기록한 책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선무원종공신녹권, 조선후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선무원종공신에게 발급한 문서로, 공신도감에서 발급한 공신 증서입니다. 1605년에 발급된 선무원종공신녹권을 받은 사람은 9,060명이나 됩니다. 임진왜란 후 민심과 국정을 수습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담겨 있는 문서로 공신들의 신분이나 직역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 증손향약, 조선 17세기

1692년(숙종 18)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향약집입니다. 전래된 각종 향약을 집대성한 것으로 상주 남부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만든 향약입니다. 일명 남촌사면향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면은 상주 남쪽 지방의 청남, 청동, 공서, 공동으로 현재의 청리, 공성, 외남 일부가 이에 속합니다. 이 향약은 당시까지 전해오던 한중 여러 향약을 집대성함과 동시에 상주지방 특유의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증보하여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읍성
읍성은 고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다. 단순한 건축물이라기보다 오랜 기간 그곳에 터를 밪고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는 공간이다. 그 안에 관아, 학교, 민가, 시장 등 삶의 터전이 있어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성에 대한 기록은 사벌에 주위가 1,109보인 성과 홍무 을축에 처음 읍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1380년 왜구 침입으로 1381년 읍성을 짓기 시작하여 1385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읍성의 규모는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데, 조선시대 제작된 여지도와 상주성도, 해동지도 등의 고지도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지도에는 읍성의 주요 시설이 그려져 있는데, 현존하는 유적으로 상산관, 태평루, 상주향청 등이 있다. 상주읍성은 1912년 상업 활동 편의와 상가요지를 확보하려는 일본 사람들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1929년 증보된 「상산지」 권3에 읍성 철거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실제 1910 ~ 1918년 사이에 측량된 상주지적도에도 읍성 철거 지역 땅 소유자의 대부분이 일본인들로 확인되고 있어 철거 시점의 근거를 뒷받침해 준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현무문 탁본,

상주읍성 북문 문루의 편액이다. 1920년 훼철될 떄 탁본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평루 현판


상주성도, 조선시대,

상주읍성을 중심으로 읍내 반경 5리 이내의 관아 등 공공시설을 그린 지도이다. 동헌 건물인 청유당, 서산서원이 그려져 있어 제작시기는 1827년에서 187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읍치 사진

상주읍치 사진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시대

민지서 간찰, 1871년,

1871년 상주목사로 재직시 북문을 중수하는 등 읍성을 정비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상산지, 1929년,

상산지는 1617년 이준에 의해 처음 편찬된 상주읍지이다.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편찬된 상산지 가운데 하나로, 1929년본이다. 임자년(1921)에 상주읍성이 철거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상주;명 자기병, 복룡동유적, 조선시대

‘상’자명 석편, 복룡동유적, 시대미상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