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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진흥왕릉(사적), 신라 24대 진흥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삼맥종)의 능이다. 진흥왕은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으며, 대가야을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함경도까지 진출하여 신라 최대 영토을 차지하였다. 점령된 지역을 순시하면서 척경비을 세웠다.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게 했으며, 화랑도를 창설하고 경주에 황룡사를 창건했다. 삼국시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다.

<경주 진흥왕릉(사적)>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다 ( 540년 07월(음) )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썼다.이고,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부인(夫人) 김씨(金氏)로서 법흥왕(法興王)의 딸이며, 왕비는 박씨(朴氏)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攝政)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진흥왕이 죽다 ( 576년 08월(음) )
〔37년(576)〕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이곳에 있는 4기의 왕릉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높이 5.8 m, 지름 20 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바깥쪽에는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쌓았다. 왕릉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아래에 있는 3기의 왕릉도 이 능을 형식을 따라서 봉분을 작게 하고 있다.

<뒷편에서 본 진흥왕릉>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신라 진흥왕이 6세기 정복사업으로 새로 차지한 영토인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에 세운 4개의 순수비(巡狩碑)를 말하며, 단양 적성비(赤城碑)는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세운 것으로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 비석에는 진흥왕이 신라영역으로 새로 편입된 지역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을 포항하며, 신하들이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산에 순행하다 ( 555년 10월(음) )
〔16년(555)〕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幸)하여 강역을 넓히고 경계를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0년>

<창녕 척경비(국보)>

<단양 신라적성비(국보)>

왕릉 아래쪽에는 서악동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는 절터가 있다. <삼국사기>에 왕릉들 앞에 애공사(哀公寺), 영경사(永敬寺), 공작지(孔雀趾)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석탑을 기준으로 왕릉의 위치를 추정하고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절터>

절터 뒷편에는 4기의 왕릉 외에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봉분들이 있다.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진흥왕, 진흥왕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인 진지왕, 신라 쇠퇴기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제압한 문성왕과 그 뒤를 이은 헌안왕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절터 뒷편에 있는 4기의 왕릉>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진흥왕의 업적에 비해 무덤 규모가 작은편이고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의 무덤과 같은 장소라 기록되어 있어 태종무열왕릉 뒷편 서악동 고분군 중 위에서 2번째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주 서악동 고분군(사적)>

신라 진흥왕릉(新羅 眞興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삼맥종)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 서북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지름 20m, 높이 5.8m되는 타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묻혔고 몇 개만 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왕은 안으로는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國史』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국력을 다졌고, 밖으로는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漢江) 유역에 한산주(漢山州)를 두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고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시하고 북한산비(北漢山碑), 황초령비(黃草嶺碑), , 마운령비(磨雲嶺碑) 등의 순수비를 세웠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 新羅眞興王 陵考」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眞興)· 진지(眞智)·문성(文聖)·헌안(憲安)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