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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내물왕릉(사적), 신라 17대 내물왕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의 능이다. 내물왕은 김씨로서 두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내물왕 재위기간 동안 신라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진한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러차례 왜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나 말년에 왜와 가야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여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나 고구려와 북조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물왕 이후 김씨에 의한 독점적인 왕위계승이 이루어 졌으며 왕의 명칭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삼국유사>에 왕릉은 첨성대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경주 내물왕릉(사적)>

나물이사금이 즉위하다 ( 356년 04월(음) )
나물(奈勿) 이사금(尼師今)이 즉위하였다. 성(姓)은 김(金)이고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角干) 말구(末仇)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비(妃)는 김씨(金氏)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흘해(訖解)가 죽고 아들이 없어서 나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말구와 미추이사금은 형제이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왜인을 독산에서 크게 물리치다 ( 393년 05월(음) )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였다. 〔왜인을〕 협격하여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나물이사금이 죽다 ( 402년 02월(음) )
47년(402) 봄 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무덤은 높이 5.3 m, 지름 22 m의 원형봉토무덤이다. 내물왕 시기 신라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일반적이나 무덤의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어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황남대총을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옆쪽에서 본 내물왕릉>

<내물왕릉이 있는 월성 아래 황남동 고분군>

신라 내물왕릉(新羅 奈勿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교동 14
이 능은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을 모신 곳으로 대릉원의 남쪽이자 월성(月城)에서도 가까운 곳이다. 능은 밑둘레 68m, 높이 5.8m, 지름 22m 정도로 흙을 둥글게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조금 큰 돌이 튀어나와 있고 깎여 나간 봉토 밑으로 돌무지가 조금 드러나 있다. 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내물왕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외교와 국방에 힘썼으며, 고대 국가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삼국유사>에는 내물왕릉이 “첨성대(星) 서남(西南)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내물왕릉이 있는 경주 황남동 고분군>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