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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암동 석파정(石坡亭), 흥선대원군이 인왕산 계곡에 세웠던 별장

인왕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흥선대원군 별장이었던 석파정(石坡亭)이다. 정자로 지어진 별장 건물이지만 사랑채, 안채, 별채, 정자 등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살림집이다. 건물은 구한말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중국 건축의 영향을 받아 벽돌을 여러곳에 사용하고 있다. 특히 홍지문부근으로 옮겨진 중국풍의 별채와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정자는 기존 한옥과는 달리 벽돌, 금속 등의 건축자재를 이용하여 중국풍으로 지어졌다. 인왕산 계곡에 터를 잡고 있어 숲이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우면서도 경복궁과 서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 석파정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인왕산과 북악산을 연결하는 한양도성과 한양의 진산인 북악산 봉우리, 인왕산 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석파정은 인왕산 계곡 숲을 정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석파정의 내력을 말해주는 바위에 새겨진 각자들이 남아 있다.

<서울 부암동 석파정>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도가였던 김흥근의 별장을 강제로 헌납받아 별장으로 사용하였으며, 고종도 방문하여 쉬었던 행궁 역할도 했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흥선대원군 후손들이 소유해 왔으며 한국전쟁 이후 어린이집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서울미술관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석파정 전경>

석파정은 경치좋은 인왕산 계곡에 세운 별장이지만 사랑채, 안채, 별채 등 7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벽돌로 지은 중국풍 별채는 세검정 삼거리로 옮겨져 있으며, 현재의 위치에는 안채, 사랑채, 별채가 남아 있다.

<인왕산 계곡>

석파정이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계곡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숲이 우거지고 주변경관이 수려하다. 석파정은 계곡 한쪽편에 터를 잡고 건물을 지었다.

<사랑채>

<툇마루>

앞면 5칸에 누마루를 두고 있는 건물이다. 구한말에 많이 볼 수 있는 사랑채 건물 형식으로  누마루에 벽돌을 이용하여 문양을 만들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난을 그리는 등 예술활동을 하였던 유서깊은 곳이다.

<사랑채 마당에 있는 석파정과 오랜 역사를 함께 한 노송>

<사랑채 툇마루에서 보이는 북악산과 한양도성>

북악산에서 자하문(창의문)을 거쳐 인왕산으로 연결되는 성벽이 보이는 위치이다.

<서쪽편 인왕산 봉우리>

<안채>

<아래에서 본 모습>

석파정은 경치좋은 곳에 세운 별장이지만, 일반 살림집처럼 안채를 제대로 두고 있다. 폐쇄적인 ‘ㅁ’자형 건물로 골목방향으로 창문이 있는 도심형 한옥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국왕의 행차에 동행한 왕비와 수행인원들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별채가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본 안채>

<사랑채에서 뒷편 언덕에 세워진 별채로 들어가는 작은 협문>

벽돌로 장식한 중국풍 건축 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 뒷편 언덕 전망이 좋은 곳에 세워진 별채>

고종이 석파정에 머물때 일행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별채>

건물은 앞면 6칸에 넓은 대청마루, 온돌방, 누마루를 두고 있는 건물이다. 양반들이 경치좋은 곳에 세웠던 정자와 비슷한 형태이다.

구한말 세도정치를 이끌었던 안동김씨 일원으로 철종때 영의정까지 올랐던 김흥근이 세운 별장으로 흥선대원군은 집권한 뒤 반강제적으로 헌납받아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고종도 이 곳에 가끔 머물렀기때문에 행궁의 역할도 했던 건물이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경치좋은 숲과 계곡이 많았던 부암동에 자리잡은 이 별장은 주변에 인왕산, 북악산 등 바위산이 많아 흥선대원군은 ‘삼계동(三溪洞) 정자’라 불리웠던 것을 ‘석파(石坡)’라 이름집고 자신의 호도 ‘석파’로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흥선대원군의 후손들이 소유하다가 한국전쟁 후 고아원.병원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사설미술관인 서울미술관 후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얼마전까지 미술관 건축때문에 일반에 공개되지 않다가 최근에 완공되어 미술관을 통해 석파정을 둘러 볼 수 있다.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벽돌로 지은 중국풍 별채 건물>

지금은 세검정 부근으로 옮겨져 있다.

<삼계동 각자>

석파정의 내력을 말해주는 ‘삼계동’이라 적힌 각자가 남아 있는 바위. 석파정은 구한말 안동김씨 세도가였던 김흥근이 별장을 지었을 때는 ‘삼계정’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삼계동 각자(三溪洞 刻字)
석파정이라는 이름은 흥선대원군이 석파정을 소유하면서 별서에 붙인 이름으로, 김홍근이 별서를 지어 이를 경영할 당시에는 삼계동정사, 삼계정, 삼계동 산정 등으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현재 석파정 사랑채 서측 후면 암반에 새겨져 남아 있는 삼계동이라는 각자와 소치 허련이 집필한 ‘소치실록’과 양의영의 ‘유북한기’ 등 일부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이곳을 소유한 후 별서의 앞산이 모두 바위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로 바꾸고 또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 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출처:서울시청>

<석파정 입구 바위에 글자를 새긴 ‘소서운련암 각자’>

이 글자는 김흥근이 별장을 조성하기 이전부터 사대부들의 별장 등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소수운련암 각자 (巢水雲簾岩刻字)
김흥근이 석파정을 조영하기 이전에 석파정의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석파정 초입 사랑채 맞은편에 커다란 암반이 있고, 거기에 “소수운련암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김홍근 이전에 석파정에 대해 추정하게 한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으로, 한수옹(권상하, 1641~1721)이 벗 정이(조정만, 1656~1739)에게 신축(1721)년에 글을 써주다”라는 뜻의 이 글귀는 매우 운치있는 시적 표현으로 자연을 대하고 노래하는 조선시대 선비의 심성을 느끼게 해준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조정만의 별서조정에 관한 기록은 따로 전해지지 않으므로 더이상 고증된 자료는 없지만, 이 암각을 통해 석파정 현재의 위치에 18세기 초 또는 그 이전부터 별서가 조성되어 경영되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출처:서울시청>

<석파정 안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풍 정자>

  김흥근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화강암 석재로 쌓은 기단 위에 금속재를 이용하여 지었다. 비슷한 형태의 정자를 중국 북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중국풍 정자
중국풍 정자라 불리는 이 정자는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중국(당시 청나라)의 건축양식이 적절히 조합되어 있다. 석파정을 조영한 김홍근이 청나라 장인을 직접 불러와 조영했다는 설이 있지만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정자에 남아 있는 청나라풍의 문살문양과 평석교의 형태 등을 통해 건축 당시 이국 취향의 정자가 주었던 독특한 아름다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바닥을 나무로 마감하는 한국의 전통정자와는 달리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감한 점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특이하다 하겠다. <출처:서울시청>

<정자 아래로 흐르는 인왕산 계곡>

<중국풍 정자 안쪽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는 큰 바위>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

서울 석파정(石坡亭),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은 조선 철종과 고종때의 중신 김흥근(1796~1870)이 조영해 별서로 사용한 근대유적으로, 인왕산 북동쪽의 바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김흥근이 언제 석파정(당시 삼계동 정사로 통칭)을 조영하였는지에 관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부 문헌을 통해 그 시기를 대략 1837~1858년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후일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집권 뒤 이를 인수하여 별서로 사용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된 1863년을 전후하여 흥선대원군이 석파정을 소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원군이 사랑채에서 난을 치는 등 예술적 활동을 했던 장소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의 행전이나 행궁, 즉 임시거처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채 7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던 석파정은 오늘날 안채, 사랑채, 별채와 같은 살림채와 중국풍의 정자 등 4개동이 남아 있다. 높은 자리에 위치한 별채의 구성과 별채로 진입하는 협문, 과거에 있었던 꽃담 등은 왕이 묵던 곳으로서 손색없게 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별서들 중 석파정과 같이 안채 이외에 별채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더불어 현재 남아 있는 중국풍 정자와 종로구 홍지동으로 이전되어 남아 있는 중국식 별당 역시 석파정의 독특한 특질을 잘 드러내는데, 김홍근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보았던 모습을 이곳에 재현듯하다. 석파정은 수려한 건축뿐 아니라 빼어난 산수와 계곡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사랑채 서쪽 뜰에 위치한 노송은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60호로서, 유구한 세월동안 석파정과 운명을 함께 해 왔다. 흥선대원군의 사후에도 석파정은 대략 50년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어 오다가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골롬바 어린이집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민간에 이양되어 운영되어 왔다. <출처:서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