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은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충청.전라자 지역에 있었던 정치집단을 말하면 중국 역사서 <삼국지>에는 마한지역에 54개 소국이 있었으며 그 중 목지국이 맹주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낙랑군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왜와 연결되는 해상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한.중.일 무역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한 지역에서는 청동기 유물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으며 그 수준 또한 높은 편이다. 중국 역사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 기록된 마한에 대한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옥과 구슬을 좋아하고 제사의식에 방울을 사용하는 등이 내용이 있는데 이는 출토유물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목걸이이와 구슬, 고흥장덕리 등.
중국 역사서 <후한서> 등에는 마한사람이 옥이나 유리로 만든 구슬을 특히 좋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한
마한은 기원전 3~2세기부터 기원후 5~6세기까지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존재하였던 정치연맹체이다. 기록에 의하면, 마한은 목지국을 맹주로 하는 54개의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한의 북쪽에는 낙랑이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왜와 접하였고, 동쪽에는 진한과 변한이 있어 삼한을 이루었다. 마한은 규모가 10여만 호에 이를 정도로 삼한 가운데 가장 강대하였다. 중국 서진(265~316)에 사신을 파견할 만큼 어느 정도 정치적인 독자성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마한의 중심세력이 남쪽에 자리잡게 되고, 사비천도 이후인 6세기 후반에는 정치.문화적으로 완전히 백제에 편입된다.(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오수전, 여수 거문도 서도리,
중국 한~수. 마한지역 사람들에 중국과 교역하면서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옥
옥은 휘석, 각섬석, 사문석, 실리카로 구성되는 광물로, 크게 경옥과 연옥으로 구분된다. 넓은 의미로 유사한 성질을 지니면서 장신구로 가공되는 수정, 호박, 마노, 벽옥, 납석 등이 옥에 포함되기도 한다. 옥은 다양한 빛깔과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갖춰 선사시대부터 종교나 의례, 벽사, 장식 등 다양한 목적에 사용되었다. 마한 사람들은 특히 옥을 금이나 비단보다 귀하게 여기는 풍습이 이어 옷이나 신체를 장식하는데 널리 애용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구슬, 담양 태목리, 순천 덕암동, 대롱옥, 광주 선암동,곱은옥, 순천 복성리 상비,
구슬.굽은옥, 곡성 연화리, 여수 평여동 외
송곳.줄, 보성 도안리 석평, 줄.수정, 보성 도안리 석평
수정 원석, 보성 도안리 석평, 수정 가공품, 보성 도안리 석평
옥가는 돌, 보성 도안리 석평, 대롱옥, 영암 옥야리
유리옥
유리는 제작과 가공이 쉽고, 오랫동안 변질되지 않으며,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갖가지 색깔을 만들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유리의 화학조성은 납, 포타쉬, 소다, 알칼리혼합유리 등으로 분류된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3~2세기 무렵의 부여 합송리, 당진 소소리, 장수 남양리유적 등에서 중국계 납-바륨 유리가 출토되었다. 기원전후에는 해남 군곡리패총에서 소다유리가 출토되는 등 원료가 다양해지고, 다채로운 색상과 모양의 유리옥이 장신구의 주요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유리구슬 거푸집, 담양 태목리
곱은옥 거푸집, 해남 군곡리, 광주 선암동, 대롱옥 거푸집, 광주 선암동
유리구슬 거푸집, 광주 선암동
구슬, 고흥 장덕리, 순천 덕암동, 담양 태목리
마한 사람들의이 옷차림
금.보화.비단.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소와 말을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후한서 동이열전>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풍속은 옷과 모자를 입거나 쓰기를 좋아하여, 일반백성들도 (낙랑이나 대방)군에 가서 조알할 적에는 모두 옷과 모자를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인수를 차고 옷과 모자를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병기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풍속에는 금.은.비단.모직물 따위를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서 옷에 꿰어 차기도 하고 또는 머리를 장식하거나 귀에 달기도 한다.
남자들은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진서 동이열전>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목걸이이와 구슬, 보성 봉동 등
주조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철기를 제작하는 공정. 탄소가 많이 포함된 선철을 다시 가열하여 만든 쇳물 사용. 냉각 속도에 따라 백주철, 회주철이 있음. 서서히 식혀 점성이 강한 회주철이 많이 사용됨. 충격에 약해 주로 용기 제작에 사용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송풍관, 광주 신창도, 슬래그, 광양 용강리
쇠도끼, 광주 동림동, 쇠도끼 거푸집, 광양 도월리
단조
가열된 철 소재를 두드려 철기를 제작하는 공정. 가열과 두드림이 반복되는 단야는 쇠의 성질을 단단하게 함. 단야도구에는 집게, 망치, 모루, 숫돌 등이 있음. 고대에는 철기 제작을 위한 중간 소재로 덩이쇠가 만들어짐 주로 칼처럼 예리한 날이 필요한 무기 제작에 사용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쇠손칼, 나주 복암리,
덩이쇠, 해남 원진리,
쇠칼, 순천 용당동, 단야구, 무안 사창리, 숫돌, 무안 사창리
덩이쇠, 해남 원진리, 고흥 장덕리,
전남지역의 토기들,
독널은 시신이나 뼈를 묻는 토기를 말하며, 독널무덤은 독널을 이용한 무덤 쓰기의 한 방식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비교적 크기가 작은 유.소아용 독널이 주로 사용되었다. 삼한시기 진.변한 지역에서는 지하에 깊은 토광을 파고 나무널이나 덧널을 매장하지만 마한 지역에서는 비교적 얕은 토광 주위에 도랑을 돌리는 분구묘 혹은 주구묘가 채택되어 지역적인 차이를 보인다. 광주 신창동유적(BC100 ~ AD100)에서는 토기 2점을 맞물리게 배치한 이음독무덤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널은 점차 대형화한다. 5세기 중엽 ~ 5세기 말경 나주 반남면 일대의 대형 분구묘에는 중심 매장시설로 커다란 전용독널이 설치되어 금강유역의 돌방무덤과 차이를 나타내며, 백제 중앙과는 차별되는 마한 문화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5세기 말경 영산강유역에도 독널무덤을 대체하는 백제계의 돌방무덤이 도입되며,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마한의 토착문화는 백제 문화에 완전히 편입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독널>
독널은 영산강유역 마한지역을 특징짓는 매장방식이다.
마한 사람들의 제사 풍습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 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중국의)의 탁무와 흡사하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라고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의) 풍습은 귀신을 믿으므로 해마다 5월에 씨뿌리는 작업을 마친 뒤, 뗴지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신에게 제사지낸다.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게 하는데, 그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별읍을 설치하여 그 이름을 ‘소도’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단다. 소도의 뜻은 서역의 부도와 흡사하지만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차이가 있다. <진서 동이열전>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소형토기, 해남 군곡리,
새모양토기, 해남 군곡리, 소형토기, 해남 군곡리
토제구슬.곱은옥, 순천해룡면.해남 군곡리
점뼈는 동물 뼈를 불에 달구어 생긴 흔적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던 도구이다. 주로 사슴과 멧돼지의 어깨뼈나 갈비뼈가 사용되었다. 점뼈는 한반도를 비롯해 중국 동북지역과 일본의 규슈지역에도 분포한다. 마한 지역에서는 군산 남전, 해남 군곡리 등 조개더미유적에서 확인되며, 사천 늑도에서도 출토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점뼈, 해남 군곡리
소형토기, 해남 군곡리
새는 영혼을 인도하거나 풍요를 준다는 믿음을 담고 있으며, 새를 형상화한 유물은 청동기시대부터 발견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소도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겼다’는 솟대 관련 기록은 삼한의 새 신앙을 보여주며, 새 모양 토기와 목기,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을 통해 새 관련 의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새모양토기, 왕양 용강리, 담양 대목리,
새모양토기, 광주 동림동, 광주 선암동
이형 토제품, 보성 도안리 석평, 토제방울, 보성 도안리 석평
소형토기, 해남 군곡리
소형토기.국자형토기, 광주 평동.보성 도안리 석평
마한사람들의 주거와 생활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그 크기가 배와 같으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자나 된다. 읍락에 잡거하여 또한 성곽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모양이 마치 무덤 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부분에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장란형토기, 광양 원월리.순천대곡리.순천 성산리 대법, 순천 덕암동, 손잡이달린토기, 담양 대목리, 구멍뚫린 항아리, 곡성 오지리, 짧은목항아리, 담양 대목리, 바리, 순천 대곡리 도름, 시루, 순천 성산리 대법
겹아가리 항아리, 담양 태목리,, 귀때토기, 여주 죽림리 차등, 완형토기, 순천 덕암동.광주 동림동
바리, 화순 용강리.곡성 오지리.순천 대곡리, 깊은 바리, 순천 대곡리
마한의 부엌
마한의 집터에서는 난방과 배연 기능이 강화된 터널식 노지와 여기에 조리 기능을 더한 부뚜막식 노지가 확인된다. 부뚜막 아래 아궁이는 점토로 만든 아궁이를 장식하였으며, 연도 끝부분에는 집밖으로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굴뚝을 냈다. 부뚜막 주변에서는 대개 시루와 솥으로 사용된 장란형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시루는 찜 요리를 할 수 있는 그릇으로 이 시기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외에도 취사와 관련된 각종 연질 토기가 다수 확인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아궁이테, 광주 세동, 장한형토기, 여수 죽림리, 시루, 굴뚝, 광양 용강리 석정
<출처>
-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