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절터인 미륵대원지(사적)이다. 경주 불국사 석굴암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고려시대 석굴사원이 있던 절터이다. 석굴은 큰 돌을 다듬어 축대와 벽체 등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 등 목조 건축물을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고려초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의 석조여래입상(보물)를 모시고 있다. 석굴 앞에는 오층석탑(보물), 석등이 일렬로 나란히 세워져 있어 규모나 격식을 제대로 갖춘 모습을 하고 있다.
절터는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명승)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이 길은 조선초 문경새재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고려시대 한강유역 주요 사찰과 마찬가지로 주요 교통로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역할을 했던 사찰로서 절 앞에는 별도로 큰 규모의 여행자 숙소였던 원(院)이 있었던 건물터가 있다. 고려시대 주요 교통로에서 번창했다가 조선시대 이후 폐사된 여러 사찰 중 하나이다.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있었던 고려시대 절터이다. 경주 석굴암을 모방하여 조성한 석굴사원과 하늘재 고갯길을 이용하던 여행객이 묵을 수 있는 원(院)이 있었다.
<미륵대원지 공간배치도>
불상이 모셔진 석굴사원을 중심으로 사찰영역이 조성되어 있고, 하늘재 고갯길 옆으로 숙소로 사용된 원(院) 건물터가 있다.
< 절터에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
충주 미륵대원지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낸다. 현재 지주와 간대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 있는데 간대 윗 면에는 2중의 원각선을 양각하였다. 지주는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전체 크기를 알 수 없으나 윗부분 바깥면에 6엽 연화문을 양각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통일신라시대보다 상대적으로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고려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절터>
석조여래입상이 모셔진 석굴과 그 앞으로 석등, 오층석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원래 있던 바윗돌 위에 돌을 올려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튀어 나온 부분이 적고 경사가 심해 벽돌로 쌓은 전탑처럼 보인다.
<오층석탑과 석굴 사이 공간에 있는 석등>
통일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8각석등이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등
전형적인 8각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하대석은 4각형이며 윗부분에 연꽃을 새겼다.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을 두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석조여래입상(보물)>
5개으로 돌로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얇은 돌로 만든 갓을 올렸다. 얼굴 형태 및 세부적인 표현에서 단순하고 투박하면서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석굴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절터>
오른쪽(동쪽)편에 요사채 등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굴사원 옆 건물터>
<해체.수리 중인 석굴 축대에 사용되었던 석재들>
<왼쪽편 건물터 앞에 세워져 있는 사각석등>
고려시대 이후 유행했던 석등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
이 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 화사석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사용된 기법으로 고려 수도인 개성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지역에 4각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절터 왼쪽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공간>
큰 돌로 축대를 쌓아 건물터를 조성하였다.
<사찰 옆쪽 건물터 아래에 있는 석조귀부>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하고 있으며 길이 605 cm, 높이 180 cm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받침이다. 귀갑문은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살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부의 등 가운데에 비좌가 있었으나 비를 세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며 수차례 발굴조사에서 비석조각조차 찾지 못했음을 볼 때 원래 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절터 오른쪽으로 작은 개울>
<절터 앞을 지나는 큰 길>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까지 연결되는 고갯길이다. 길 옆에 고갯길을 오가는 여행객을 위한 숙소인 미륵리 원터가 자리잡고 있다.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갯길 하늘재(명승)로 연결되는 길>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 명승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까지 연결되는 고갯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 3년(156)에 개통되었는데, 이는 죽령보다 2년 앞선 것으로 가장 오래된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로 고구려가 남진할 때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신라가 북진할 때에도 길목이 되어 충주지방을 확보하는 통로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 고개를 넘어 금강산으로 향하던 중 보물 제96호로 지정된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조성하였으며 태자의 누이 덕주공주는 석조여래입상과 마주 보이는 월악산 영봉 아래 덕주사 마애불을 조성하고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계립경은 시기마다 이름이 달랐는데 신라시데에 계립령, 고려시대에 대원령으로 물리웠으며 대원령을 풀이하면 한울재가 되는데, 한울재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하늘재로 바뀌었다. 한훤령은 하늘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부근에 한훤령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충주 미륵리 원터>
하늘재 고갯길 옆으로는 사찰에서 운영한 여행객을 위한 숙소로 사용된 원(院)이 있었다.
<미륵리 원 터>
건물은 회(回)자 모양의 행각 형태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당 한 가운데는 말을 묶어두는 마방이 있다. 꽤 큰 규모의 건물이다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리>
<여행객이 쉴 수 있는 방들이 있던 건물터>
방과 툇마루로 구성된 전형적인 행각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충주 미륵리 원터, 고려시대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 창건과 더불에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곳에 원을 별도로 세우고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터는 고려초기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립령로(지금의 하늘재)에 위치하며 충주를 넘어가면 문경 관음리에 절터가 있는데 이 또한 원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조령(새재)이 개통되면서 미륵리의 원은 점차 그 기능을 상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두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건물의 형태는 ‘回’자 구조로 가운데 말을 묶어 두는 마방을 두고 주변에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에 자리했던 이 원터는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지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미륵리 원터 뒷편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해 세운 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리3층석탑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초기의 일반형 석탑으로, 높직한 2중 기단 위에 3층의 몸돌 부분을 형성하고 그 위에 노반을 얹어 놓고 있다. 매우 안정감을 주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시대 정형화된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중원미륵리사지의 동쪽 200 m 떨어진 한적한 곳에 탑을 세운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비보사탑설(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이론)에 의해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절터에 남아 있는 불상 머리>
석굴에 모셔진 석조여래입상처럼 또다른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미완성 석불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리 불두
높이 138 cm, 최대너비 118 cm의 대형 화강암 불두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남아 이다. 눈매는 일자형으로 보이며 입도 일자형으로 다소 작게 표현되었고 입술 윤곽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사실적으로 음각 주름선이 나타나 있고 귀는 길며 코 끝은 오똑하지 않고 다소 편평하게 처리하였다. 미완성의 석불로 보이며 고려시대 지방 불상양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충주 미륵대원지, 사적 317호
이 절터는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의 지릅재 사이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 있어 불교 사찰의 역할 뿐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말부터 3차례에 걸쳐 절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미륵당, 미륵당초 등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고 지금도 이 일대가 미륵리로 불리고 있어 석굴사원의 이름은 미륵대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사역내에 석불, 석탑, 석등, 당간지주, 돌거북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 화려했던 절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특히 석불을 둘러싼 ‘ㄷ’형 석실은 경주 석굴암의 조영의사를 따른 것으로, 원래 조각상들이 끼워져 있었으나 몸고 침입시 절이 불타면서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출처>
-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