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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충주목 관아, 청녕헌과 제금당

충북 충주시 성내동에 옛 충주목 관아터이다. 충주시 도심에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충주관아공원’이라 불린다. 이곳에는 옛 동헌 건물인 청녕헌과 별관이었던 제금당, 산고수청각, 충청감영문, 축성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관아 마당에는 수백년된 고목들이 남아 있어 이곳이 옛 관아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령헌과 제금당은 구한말인 1870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지었는데 지방 관아 건물로는 큰 편이다. 동쪽에 위치한 제금당은 별관 건물로 충주를 방문한 주요 인사들이 묵을 수 있도록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살림집인 내아와 가장 중요한 객사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충주목(忠州牧)은 조선시대 충주지방에 있었던 지방행정조직으로 정3품 목사가 고을 수령이었으며 읍치는 현 충주시 성내동 일대이다. 충주목와 관할 범위는 현 충주시와 충주시와 접하고 있는 괴산군, 음성군, 제천시의 주요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고려초 전국에 12목이 설치될 때 충주목이 되었으며 조선 세조 때에는 군영인 충주진(鎭)으로 바뀌었다가 인조 때 다시 충주목으로 복구되는 등 강등과 복구를 거듭하였다. 구한말 갑오개혁 때 관찰부로 승격되면서 충북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후 철도와 도로교통에서 소외되면서 지방 소도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충청도 청주목 관아터>

충주는 조선시대 남한강 수운과 육상교통로의 중심지로 국방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충주목 읍치는 관아가 있던 성내동 일대에 읍성내에 있었는데 충주읍성은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관아 문루>

관아공원 입구로 사용되는 관아출입문이다. ‘충청감영문’이란 현판이 걸려 이다.

<충주목사가 근무했던 공간인 동헌>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양쪽에 방을 배치하였다. 왼쪽 1칸은 약간 높게 만든 누마루 형태의 ㅇ공간이다. 19세기에 새로 지은 관아 건물이다.

<‘청령헌’이라 적힌 현판>

<충주목사가 송사를  비롯한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

<왼쪽편 온돌방과 한쪽 끝 누마루>

<뒷편에서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청녕헌
1870년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의 관찰사가 사용하였고, 이듬해 충청북도 관찰사의 집무실이 되었다. 1908년(순조 2) 5월 25일 도청이 청주로 이전되면서 충주 군수의 정청으로 이용었다. 한말 의병전쟁 때에는 호좌의병장 의암 유인석의 군대가 충주성을 점령하여 한때 위세를 떨쳤던 곳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동헌 동쪽에 위치한 건물인 제금당>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건물로 충주를 찾았던 왕실 관련 인물들이 머물던 공간이라고 한다.  객사와는 별도로 손님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놓고 이다. 남한강 수운과 죽령, 조령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한 충주의 특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뒷편에서 본 모습>

제금당
동헌의 동쪽에 위치한 제금당은 왕실과 관련된 인물이 왔을 때 머물던 별관으로 단청이 화려한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출입문인 내삼문은 1871년(고종8)에 솟을대문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예성별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어 제금당의 다른 이름으로 되었다. 뒤쪽에는 수직청으로 사용되던 산고수청각이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제금당에 딸린 공간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인 산고수청각>

실무자들이 사용하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산고수청각
제금당의 수직청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4칸, 측면 1.5칸인 맞배기와집이다. 구조는 방 2칸에 부엌 1칸이 딸렸으며 정남향을 하고 있다. 동헌인 청녕헌이 충주의 진산인 대림산을 향하여 남서향을 하고 있는데, 별관인 제금당과 산고수청각은 정남향을 하고 있다. 이는 청녕헌은 지방관이 사용하는 아사이기 때문이나 제금당과 산고수청각은 왕부의 건물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제금당 출입문>

솟을삼문 형식을 하고 있어 왕실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예성별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제금당 마당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고목>

<순교비>

전국의 주요 관아터에서 볼 수 있는 구한말 천주교 박해 때 희생들을 기리기 위한 순교비를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순교자 현양비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건립된 순교자들의 현양비, 천주교 박해가 있을때마다 충주 부근의 천주교우들이 충주 동헌에 잡혀와 심문을 받았으므로, 이곳에 서린 순교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충주에서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장소는 봉방당 무학당 주변(현 충주우체국 신축부지)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이기연, 이부춘, 이석중 부자, 권아기련 등 많은 사람이 순교한 사실이 확인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충주 관아공원 앞 골목길>

충주관아골
조선시대 충주읍성 내에 있던 충주목 관아터에 조성한 공원으로, 청녕헌과 제금당 등 옛 관아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 관아건물들은 1870년(고종 7) 8월 화재로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재건한 것이다. 그후 내부를 개조하여 중원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196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충주시에서 복원한 후 그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관아공원에는 청녕헌과 제금당 외에 충청감영문, 산고수청각, 축성사적비, 순교자헌양비 등이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소나무 등의 수목과 어우러져 있어 고색창연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