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시 임당동에 있는 임당토성이다. 삼국시대 신라 지방세력 무덤인 임당동고분군(사적 516호) 뒷편에 있는 토성이다. 해발 60 m 정도의 낮은 구릉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데 둘레는 950 m 정도이다. 흙을 다져서 쌓는 평편다짐기법으로 토축을 쌓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5 m 정도이다. 토성은 4세기에 처음 쌓은 후 6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임당동고분군이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압독국 관련 내용 등으로 볼 때 지방세력의 근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토성의 입지조건이나 쌓은 방식 등은 삼국초기에 쌓은 토성인 대구 달성이나 경주 반월성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같은 문화권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토성 북쪽과 금호강 사이 임당저습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다양한 생활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토기, 목기, 골각기, 철제유물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신라 지방세력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경산 임당토성>
영천과 대구사이를 흐르는 금호강 일대 넓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쌓은 토성으로 대구 달성, 경주 반월성과 비슷한 입지조건 등을 갖추고 있다.
<임당동고분군(사적)>
토성 앞에는 10여기의 무덤이 있는 임당동고분군(사적)가 자리잡고 이다. 이곳에서 금동관, 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어 신라초기 압독국이라 불렸던 지방세력의 근거지임을 알 수 이다. 남쪽으로 경산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흙을 인공적으로 다져서 토축>
토성으로 현재 높이 1.5 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고, 바깥쪽은 자연지형을 활용하고 있다.
<토성 안쪽 구릉 정상부>
평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 지배세력 생활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 서쪽편 성벽. 그 위로 목책을 올려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성 북쪽>
금호강과 1 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그 주위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토성 바깥쪽에는 주민들 살았던 주거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성 북쪽>
토성 북쪽 낮은 저습지 일대에서 생활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임당동 유적 발굴.조사 현황도>
<토성 동쪽편 성벽>
<토성 동남쪽 성벽 안 생활공간>
<임당토성 남쪽 성벽>
임당토성
임당토성은 임당동 고분군 북쪽에 있는 방어시설로 1995년에 발굴되었다. 토성은 임당 유적 중 가장 높은 곳(해발 59 ~ 65 m)에 있으며, 주변에 있는 임당 뜰과 금호강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외부의 침입을 막기에 유리한 입지를 갖추었다. 토성의 동쪽과 서쪽 부분 250 m 정도가 발굴되었다. 토성의 성벽은 순수하게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지름 30 ~ 50 cm의 기둥구멍에 나무 기둥인 영정주를 1 m 간격으로 두 줄을 세운 후, 양 기둥 사이 4.5 m 정도의 공간을 평편다짐기법으로 쌓아 올렸다. 그 다음 성벽 바깥 부분도 흙으로 덧붙여 쌓아 완성하였다. 남아 있는 토성의 높이는 1.5 m인데, 이러한 시설을 바탕으로 본래 토성의 전체적인 규모는 동서 길이 120 m, 남북길이 350 m, 둘레 950 m 정도의 타원형이었으며, 토성의 벽은 아래쪽 너비 8.5 ~ 9.5 m, 위쪽 너비 4.5 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토기를 분석한 결과, 토성은 기원후 4세기 전반에 처음으로 만들어져 6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간은 임당 유적에서 신라에 편입된 과거 압독국 유력자들의 무덤인 고총을 만든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토성은 신라에 통합되었으나 세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이 지역 유력자들의 생활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토성의 근처에 있는 임당 저습지 유적에서는 토성과 같은 시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일상생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이로써 당시의 마을을 확인할 수 있어 토성과 주변 마을의 모습과 생활상도 함께 엿볼 수 있다.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출처>
-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 경산 임당 저습지유적 발굴조사, 영남문화재연구원,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