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산(해발 1,188 m) 북쪽 계곡에 있는 운문사(雲門寺)이다.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 때 한 신승이 이곳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비롯하여 5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진평왕 때 화랑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이 크게 중건하였다. 고려말 고려 태조왕건을 도왔던 보양이 다시 크게 중창하였으며 이때 국왕으로 부터 ‘운문선사’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고려초 숙종 때 학일 이곳에 머물서 크게 중창하였고, 일연은 이곳에서 머물면서 삼국유시 집필을 시작하였다. 1958년 불교정화운동 후 비구니 수행사찰로 정해지면서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 거듭났다. 현재 승가대학과 대학원, 율원과 선원을 갖춘 전국 최대 비구니 교육도량이다.
운문사는 비로전(보물, 옛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오백전, 관음전 등의 불전과 요사채인 금당, 강당인 만세루 등이 있었으며 최근 대웅보전 등 많은 전각들이 지어져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다. 특히,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가 규모도 크고 그 수도 많다. 비로전 앞에는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동.서삼층석탑(보물)를 비롯하여 금당 앞 석등(보물),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석조사천왕상(보물) 등 많은 문화재들이 전해오고 있다. 부속암자로 북쪽 북대암, 남쪽 사리암, 동쪽 내원암 등이 있으며 서쪽에는 대비사가 있어 창건 당시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청도 운문산 운문사>
북대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운문사 전경. 동쪽 지룡산, 서쪽 호거산, 남쪽 운문산 등 높은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는 깊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지만, 비교적 넓고 평탄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 불전들이 있는 중심영역이, 남쪽에 요사채들이 있는 수행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범종루>
<운문사 중심영역>
주불전이었던 비로전을 중심으로 그 앞에 동.서삼층석탑, 서쪽에 나한전에 해당하는 오백전이, 동쪽에 관음전과 강당인 만세루가, 남쪽에 금당을 비롯한 요사채들이 배치되어 있다.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18년(567)에 대작갑사로 창건되었으며, 고려 대조 왕건이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린 이후 운문사로 불리게 되었다. 신라 원광국사가 세속오계를 설하고,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설송대사 이후 여러 차례 중창을 통해 오늘날의 사세를 이루었으며, 1950년대 비구니 사찰이 되어 현재 승가대학과 대학원, 율원과 선원을 갖춘 전국 최대 비구니 교육도량이 되었다.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주불전이었던 비로전>
조선후기 숙종 때(1718) 지어졌다. 최근 만세루 뒷편에 대웅보전을 크게 신축하면서 비로자나여래를 모신 비로전으로 바뀌었다.
<비로자나불 좌상 뒷편 벽면에 그려진 벽화인 비로자나삼신불회도(보물)>
<대웅보전에 있는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보물)>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1653년(조선 효종 4)에 중창하였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고, 좌측에는 신중탱화, 우축에는 삼장탱화를 모셨다. 건축물 자체가 보물일 뿐 아니라 주불전인 비로자나불좌상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후불벽 뒷면에 관음보살과 달마대사가 나란히 앉아 있는 벽화는 보물 1817호이다. 서쪽 천장에 매단 용가와 악착보살로 불리고 있는 청의동자상도 귀중한 불교문화유산이다.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운문사 동.서삼층석탑(보물)>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삼층석탑으로 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적인 비례나 조각수법 등은 양호한 편이다.
<작압전>
운문사의 유래를 알게 해주는 불전이다. 원래는 전탑으로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다. 내부에는 옛 전탑에 있던 석조사천왕상(보물)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가 모셔져 있다.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석굴암 본존불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신체의 비례나 투박한 조각수법 등에서 통일신라말 불상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옛 전탑 감실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조사천왕상(보물)>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의 유래를 알게 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나말려초의 보양국사가 작탑이라는 전탑 형식으로 초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현재의 형식으로 재건되었다. 작압이라는 말은 보양 스님이 까치떼가 땅을 쪼고 있는 곳에 절을 지었다는 작갑사(운문사의 전신)에서 유래한 것이다. 1941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전각으로 바뀌었다. 내부에는 보물 317호 석조여래좌상과 318호 사천왕 석주가 봉안되어 있다.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석가모니 제자인 오백나한을 모신 불전>
수행중심 사찰로서의 운문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최근에 대웅보전을 새로 지으면서 그 옆에 응진전도 새로 세워졌다.
고려 원응국사가 창건하고 운악화상이 중수를 하였다고 전해지며, 근대에 들어서는 금광스님이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오백나한상을 채색하였다. 오백명의 아라한상이 모셔져 있어 오백전이라 하며, 주불로 석가모니불과 좌측 제화갈라보살, 우측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다. 아라한을 줄여서 보통 나한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을 이르는 말이다.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는 운문사 오백나한상 각각에게 공양을 올리는 오백미 전통이 있다.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경내 동쪽편에 위치한 관음전.>
관음전은 1680년(숙종 6) 초창하고 1780년(정조 4) 중수되어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일체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해내리라는 서원을 세운 대자대비의 상징으로, 운문사 관음전에는 1868년 제작한 수월관음도와 1861년에 만일염불회와 관련하여 제작된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건물 안팎에는 『묘법연화경』에서 설한 관세음보살의 공덕이 벽화로 표현되어 있다.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비로전과 만세전 사이에 ‘감로천’이란 글자가 새겨진 물이 담긴 석조가 있다.>
사찰에서 신앙공간으로 들어가기전 몸과 마음을 씻는 다는 의미를 갖는곳으로 옛 대웅전 영역과 새 새웅전 영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
많은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수행하는 운주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옛 대웅보전이 승려와 신도들을 수용하기에 좁아 뒷편에 새로운 대웅보전을 세웠다.
기존의 대웅보전이었던 현재의 비로전에 늘어난 대중을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1994년에 새로 건립하였으며 현재 조석예불을 모시는 주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단에는 과거 연등불, 현재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인 삼세불과 대세지, 보현, 문수, 관음의 사대보살을 모셨다. 좌측에 신중탱화, 우측에 53선지식 탱화를 모셨으며 좌우의 윤장대에는 경전이 봉안되어 있다.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응진전>
대웅보전 앞 마당 한쪽에는 앞면 5칸 규모의 응진전이 있다. 응진전은 나한전의 다른 이름으로 비로전 앞 오백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석가모니 제자들을 중시하는 수행사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응진전 맞은 편 요사채>
<대웅전 뒷편에 조성해 놓은 작은 동산. 뒷편으로 북대암이 있는 봉우리가 보인다.>
<대웅보전과 마주보고 있는 만세전(2020년 공사중인 모습)>
<만세루>
만세루는 조선후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앞면 7칸의 벽면이 없는 형태의 누각건물이다.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법회 등을 열 수 있는 곳이다. 운문사의 수행사찰 전통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원래는 대웅보전 옆에 있는 가람배치를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사찰처럼 대웅보전과 마주보고 있다. 그 사이에 석탑은 없지만 넓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만세루 옆에 있는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가지가 밑으로 처진 모습을 하고 있는 처진소나무 품종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출입문인 범종루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이 소나무를 보게 된다.
<처진 소나무 앞에 있는 칠성각>
다른 사찰에 비해 칠성각을 크게 지었으며, 사찰 입구에 있는 것이 특이하다.
<관음전 옆 명부전.>
신라시대 원광국사가 건립하였고, 나말려초 보양국사가 중창하여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옥 중생을 남김 없이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과 십대왕을 모신 전각으로 지장전이라고도 한는데, 명부전이라는 명칭은 지장보살과 시왕이 머무는 곳이 저승세계 증 명부이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칠성각이 있는 사찰 입구 마당에는 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 가운데 비각에 있는 원응국사비(보물)가 많이 알려져 있다.
<원응국사비(보물)>
고려중기 승려 원응국사 학일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탑비이다. 받침돌과 머릿돌은 남아 있지 않고 비몸만 3조각으로 잘라져 있던 것을 복원해 놓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윤언이가 짓고 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승려 탄연이 쓴 것이라 한다.
<수행공간>
칠성각 앞으로는 대표적인 비구시 수행사찰답게 크고 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그 공간의 규모도 상당히 넓다.
<수행공간을 출입하는 불이문>
<비로전과 마주보고 있는 금당>
승려들이 수행하는 요사채로 오래된 건물이지만 규모는 큰 편이다.
<운문사 금당 앞 석등(보물)>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건물형태의 통일신라 석등 양식을 따르고 있다. 8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옆으로 많은 요사채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운문사 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범종루>
뒤로 보이는 동쪽편 계곡에는 내원암이 자리잡고 있다.
<운문사 동쪽 계곡에 있는 내원암>
<범종루 앞 마당에서 보이는 북대암이 있는 봉우리.>
<운문사 북쪽봉우리 아래에 있는 북대암>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운문사의 경치가 훌륭하다.
<운문사 범종루 앞에서 남쪽 사리암으로 가는 길>
이곳에서 약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사리암이 위치하고 있다. 운문사 남쪽 삼계봉 정상 아래 해발 500 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운문사 시리암>
운문사(雲門寺)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한 신승이 현재의 북대암 옆 금수동에서 3년간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곳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인 오갑사이다. 600년 신라 원광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이때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였다. 이후 후삼국의 혼란기에 폐허가 된 절을 930년에 보양국사가 크게 중창하였으며, 고려태조 왕건이 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 대한 보은으로 937년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전지 500결의 넓은 토지를 하사였다. 이때부터 운문사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중기 가지산문의 원응 학일 스님이 주석하면서 나라의 제2선찰이라 할 정도로 사세가 커졌으며, 1277년 일연 스님이 주지로 머물면서 이곳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불교정화 직후인 1955년부터 비구니 사찰이 되어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77년 이후 명성 스님이 주지로서 도량의 면모를 크게 일신시켜 현재 승가대학과 대학원, 율원과 선원을 갖춘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교육 도량으로 자리매기하고 있다.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출처>
-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