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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안(西安, Xian), 역대 가장 많은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도시

시안(西安, Xian)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유서깊은 고장이다. 시안(西安)이라는 명칭은 서쪽에 있는 수도란 의미의 서경(西京)과 한(漢)의 수도 장안(長安)이 합쳐진 이름이다. 서주(西周)의 도읍 풍호(豊鎬)와 진(秦)의 함양(咸陽)이 인근에 있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은 위수 이남에 아방궁을 세웠으며 한(漢)의 장안성을, 수.당이 현재 위치에 수도 장안을 건설하면서 국제도시로 크게 번성했다. 당 이후 크게 타격을 받고 침체하였다. 명나라 때 둘레 12 km 정도의 시안 성벽이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6년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가 된 시안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시안은 섬서성(陝西省) 성도이자 중국 서부의 중심도시로 과학연구, 고등교육, 국방 과학기술과 첨단기술 산업기지, 중국의 중요 우주비행, 항공공업센터, 기계제작센터와 방직공업의 중심이기도 하다.

<대자은사 대안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시안 도심>

<시안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심>

시안은 황하(黃河) 중류 관중평원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 진령산맥이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고대 중국 5대강 중 하나인 위수(渭水)가 흐른다. 중국 6대유라시아대륙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교통이 발달되었고 동.서문화교류가 활발했다. 관중평원의 농업생산력, 산맥과 강으로 둘러싸인 지형적인 잇점, 서역 유목민과의 접점이라는 특징으로 고대 이래 중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시안과 주변 고대 도시들,  위키백과, 2020년>

풍호(豊鎬), 서주(西周)의 도읍 풍경(豊京)과 호경(鎬京)

주(周) 문왕(文王)은 중원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풍수(豊水) 서쪽에 도읍을 건설했는데 이를 풍경(豊京)이라 한다. 왕위를 계승한 무왕(武王)은 도시를 강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를 호경(鎬京)이라 하며 두곳을 합해서 풍호(豊鎬)라 부른다. 기원전 1046년 무왕(武王)은 상을 멸망시킨 후 서주(西周)를 건국하고 호경(鎬京)을 수도로 삼았다. 풍경에는 종묘와 정 등의 건축물을 배치하였으며, 호경에는 궁궐과 관청 건물 등이 세워졌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도시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조선의 수도 한양 건설에도 적용되는 등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맹궤(孟簋), 서주, 시안시 장가파(張家坡) 출토>

함양(咸陽, 셴양), 전국시대 진(秦)과 통일제국의 수도

함양(咸陽, 셴양)은 기원전 350년 진효공(秦孝公)이 도읍를 동양(棟陽, 시안시 옌량阎良구)에서 함양으로 옮긴 이후 143 년 동안 진(秦)의 수도 역할을 했다. 셴양은 위수(渭水) 양안에 강둑을 따라 건설되었는데, 전통적인 도시 배치와는 달리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전국시대 다른 국가의 도읍과 함께 셴양은 대규모로 잘 계획된 도시로 건설되었다. 진시황은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제2궁전, 제3궁전이 회랑으로 연결된 웅장한 궁궐로 바뀌고 화려한 아방궁을 다시 건설하였다. 함양궁과 아방궁 궁궐터에서 화려했던 옛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진(秦)의 궁궐이었던 함얌궁과 아방궁>

여산(驪山)이라 불렸던 진시황릉

여산(驪山)이라 불리는 웅장한 진시황릉으로도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진시황릉은 그가 13세 일때 시작하여 37년 동안 수많은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건설하였다. 무덤은 높이 76 m의 여산을 중심으로 당시 수도였던 함양을 본떠서 둘레 2.5 km 의 내성과 둘레 6.3 km의 외성으로 구성되었다. 1974년 여산 동쪽 1.2 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 이후 병마용갱 주변 일부에서만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엄청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진시황릉은 후대 왕조의 왕릉 조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4년 우연히 발견된 병마용갱.>

장안(長安), 한(漢)의 수도 

서한(西漢) 제국이 수도로 장안에 정착하면서 고대 중국 역사상 첫번째 전성기를 누렸다. 실크로드(Silk Road)가 개척된 이후 동서 무역로의 출발지였던 장안(長安)은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이자 세계적인 대도시가 되었으며 중국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웅장한 궁궐, 잘 계획된 도로와 도시기반 시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등을 잘 갖추고 있다.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이 있던 장안성은 수.당 때 형성된 현 시안시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장락미앙(長樂未央) 와당, 한, 시안시 한(漢) 장안성 유적 출토>

 <교육기관인 태학의 벽옹(碧擁)과 미앙궁 전전(前殿)>

한나라 황제 능역

한(漢) 황제 능역은 무덤이 봉분, 사당, 능역 주변의 성벽과 망루 등으로 구성되며, 황제를 호위했던 주요 관리들과 장군들, 가까운 친척들의 무덤도 같이 조성되었다. 서한시대 황릉 11곳중 9곳은 위수(渭水) 북쪽에 있으며 2곳은 장안 동쪽과 남쪽 교외에 위치하고 있다.

<한나라 황제 능역들>

<셴양 싱핑시에 있는 곽거병 무덤>

<한무제 능역(漢茂陵) 곽거병 무덤 앞에 있는 마답흉노(馬踏匈奴) 석상>

수당(隋唐)시대 장안성 

수당(隋唐)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여겨진다. 수도 장안(長安, 현 시안시)은 동시대 셰계에서거 가장 크고 번성했던 대도시였다. 장안은 수(隋) 우문개가 공사를 맡어 건설된 대흥성(大興城)이 모태가 되었다. 도시는 남북 약 7 km, 동서 약 7 km의 규모로 중앙 주작대로를 중심로 양쪽에 시장과 54방씩을 두었었다. 후대 도시건설의 모범이 되었으며 신라의 경주, 발해 상경, 일본 교토가 장안을 모방하여 건설되었다.

<수당시대 장안성>

당 대명궁(大明宮) 유적

대명궁(大明宮)은 당고종 때(662년) 처음 지어져 220년 동안 당나라 황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당나라 초기에는 장안성 안에 있는 수나라 때 정궁으로 지은 태극궁을 사용했으나 습하고 벌레가 많아 이궁(離宮)으로 건설되었는데 당 고종 때 대대적을 수리하면서 정궁이 되었다. 대명궁은 궁궐배치의 기준이 되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원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3문3조(三門三朝)’의 원칙에 따라 황실가족의 생활공간인 내조(內朝), 집무공간인 중조(中朝), 신하들이 집무공간인 외조(外朝)가 담장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당나라 말 황소의 난(875 ~ 884년) 이후 지방 병마절도사들의 반란으로 파괴된 후 황궁의 기능을 상실했다.

<당 대명궁 유적>

<대명궁 정전인 함원전 모형>

<대명궁 한림원터에서 출토된 벽돌들>

당나라 황릉(皇陵)

장안 북서쪽에는 18곳의 당왕조 황릉(皇陵)들이 있다. 황릉들은 위수(渭水) 북쪽 강둑을 따라 평지나 구릉에 배치되어 있다. 황릉은 대부분 산으로 큰 규모의 산으로 만들어지며 세계적으로 큰 규모를 하고 있다. 흉노의 공격이 예상되는 경로에 황릉을 배치한 한(漢)왕조 황릉의 사례를 따르고 있는 듯 하다.

<측천무후 순릉 앞에 있던 사자상(順陵石走獅, 복제품)>


<홍의남장사녀도벽화(紅衣男裝仕女圖壁畵), 당. 시인시 정순황후(貞順皇后) 경릉(敬陵) 출토>

비림(碑林), 고대 중국의 비석을 모아 전시한 곳

비림(碑林)은 고대 중국의 비석을 모아 전시한 곳으로 송나라 때(1087년) 처음 조성되었다. 당나라 말 혼란기에 중요한 비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묘에 집중시켰으며 북송 때(1087년) 유교 주요 경전을 새긴 개성석경비(开成石经碑)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비림에 있는 비석들을 시대 순서가 완전하고 각종 서법의 모범이 되었던 중요한 비석들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동시에 고대 문헌들을 살펴볼 수 있는 도서관 성격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문묘(文廟)의 모습이 남아 있는 비림>

비림박물관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石臺孝經)이다. 당 현종이 효경에 주석을 달고 글과 글씨를 쓴 것으로 745년에 세워졌다. 비석은 4면으로 되어 있으며, 머리에는 용과 구름이 조각되어 있으며, 3층 석재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북송 철종 때(1087년)에 문묘였던 이곳에 옮겨왔다. 비림에 있는 많은 비석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수집된 것이다.

<“비림(碑林)”이라 적힌 현판이 있는 정자와 석대효경>

개성석경(開成石經)은 사회규범의 기본이 되었던 유가 경전을 돌로 새겨놓은 것이다. 당나라 문종 때(837) 전해오던 여러 유가 경전을 모아 돌에 새겨 여러 경전들의 착오를 바로잡는 표준이 되게 하였다. 북송 철종 때(1087)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석경들을 다시 모아 문묘(文廟)였던 이곳에 옮겨 놓았다. 당대에 <논어>을 비롯하여 12경이 새겨졌으며 청나라 강희제 때 <맹자>가 추가로 새겨 13경이 완성되었다. 비석이 처음 새겨진 연대가 당나라 문종 때여서 그 연호(開成)를 따라 개성석경이라 부른다.

<개성석경을 모아 놓은 제1전시실>

<명필 구양순이 글씨를 쓴 황보탄비>

<명필 안진경이 쓴 다보탑감응비>

<사마방잔비(司馬芳殘碑), 서진>

<회소초서천자문(懷素草書千字文), 명 1470년, 회소 글씨>

당나라 장안의 불교 사찰

수당(隋唐)시대 수도 장안에는 수많은 사찰들이 있었다. 또한 많은 사상적으로 다른 다양한 종파가 당대(唐代)에 생겼으며 주요 종파의 근본도량을 장안 도심에 두고 있었다. 당대 불교 6개 종파와 근본도량으로 법상종(法相宗) 대자은사(大慈恩寺), 진언종(眞言宗, 밀종) 대흥선사(大興善寺), 율종(律宗) 정업사(淨業寺), 화엄종(華嚴宗) 천복사(薦福寺), 법성종(法性宗) 초당사(草堂寺), 정토종(淨土宗) 향적사(香積寺)가 있다. 의상, 혜초 등 한반도 불교 역사를 이끌었든 승려들이 젊은시절 유학했던 곳이다.

<장안불교육대조정(長安佛敎六大祖庭)>

<패엽경(貝葉經, 복제품),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

대자은사(大慈恩寺)와 대안탑(大雁塔)

대자은사(大慈恩寺)는 당고종이 어머니 문덕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 등을 보관하기 위해 대안탑(大雁塔, Wild Goose Pagoda)을 세웠으며, 이곳에서 신라 승려 원측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과 함께 많은 불경들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현장의 제자 규기(窺基)가 법통을 이어받으면서 법상종(法相宗) 중심 사찰이 되었다. 당나라 장안에서  으뜸이 되었던 사찰로 대명궁에서 남쪽을 7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자은사 입구 현장법사 동상>

<대자은사 대웅보전과 대안탑>

대안탑(大雁塔, Wild Goose Pagoda)은 당고종 때인 652년 현장법사가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서가져온 불경을 비롯한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세워졌다. 처음에는 5층으로 지어졌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무너진것을 수리하면서 10층으로 증축하였으며, 명나라 때 지진으로 손상된 것을 수리하면서 현재와 같이 7층으로 바뀌었다. 1959년에 현재의 모습을 수리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장안(長安)의 랜드마크가 되었던 유서깊은 탑으로 통일신라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일본 헤이안시대 교토 도지(東寺) 오층목탑과 함께 동시대를 대표하는 탑이다.

<대자은사 대안탑>

천복사(荐福寺)와 소안탑(小雁塔), 당나라 장안 화엄종 중심 사찰

천복사(薦福寺, Jianfu Temple)는 당나라 장안 6대 종파 중 화엄종 근본도량이었다. 당나라 황실을 후원을 받았던 중요 사찰로 중요한 불교 의식들이 거행되었으며 국내외에서 많은 승려들이 불교연구를 위해 모여 들었다. 번경원에서는 많은 불교경전들이 이곳에서 번역되었으며 당나라 장안에서 불경을 번역했던 사찰 중 3번째로 손꼽혔던 중하한 사찰이었다.

<천복사 전경>

종루에는 금나라 때(1192년) 때 만든 높이 3.35 m의 철종이 있었다. 소안탑과 함께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를 안탑신종(雁塔晨鐘)이라 하여 관중팔경 중 하나로 손꼽이는 명승이었다. 지금은 복제품이 종루 앞에 세워져 많은 관람객들이 찾고 있다.

<종루 옆 마당에 있는 금나라 철종(복제품)>

소안탑(小雁塔, The small wild goose Pogoda)은 당나라 때 (707년) 처음 세워졌으며 천복사탑(薦福寺塔)이라 불렸는데 천복사가 화엄종 중심 사찰이었기 때문에 화엄탑(華嚴塔)으로도 불렸다. 벽돌로 쌓은 15층 전탑(塼塔)이었는데 여러차례 지진으로 손상되어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1965년 옛방식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나라 전탑(塼塔)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동시대를 대표하는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복사 소안탑>

대흥선사(大興善寺), 당나라 밀종(密宗)의 중심 사찰

대흥선사(大興善寺)는 서진(西晉) 때(266년) 준선사(遵善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며 당나라 때 인도 승려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이 인도에서 밀교들 들여와 이곳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많은 밀교경전을 번역하였다. 당나라 불교 6대 종파 중 밀종(密宗)의 총본산으로 여겨지며 많은 불경이 번역되어 대자은사, 천복사와 함께 당나라 장안의 삼대역경장(三大譯經場)으로 불렸다.

<대흥선사 전경>

<사찰 입구에 있는 밀교의 대표적인 상징인 금강저(金剛杵)>

당나라 도교(道敎)

당나라 황제들을 자신의 지위를 신성시하기 위해 도교의 신으로 받들어지는 자신들과 성씨가 같은 노자(老子) 이이(李耳)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겼으며, 후기에는 도교와 연금술을 크게 숭상했다. 대명궁 북쪽에 있는 황실정원 태액지(太液池)에는 작은 섬을 두어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구현했으며 연못 북쪽에 황실 도교사원 등이 있었다. 비림박물관에 있는 당경운종은 황실 도교 관청인 경룡관(景龍觀)에서 만들어 ‘경룡관종’으로 불렸다.

<당대명궁 후원 태액지.>

<당 경운종(景雲鐘)>

<노군상(老君像), 시안 비림박물관>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교류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동서양 문화교류의 중심지였던 장안(長安)에는 당시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적들과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중국산 비단, 차, 종이 등이 서역으로 나갈때 이에 비례하여 다량의 교역품들이 장안으로 들어왔다. 수당(隋唐)시대 문화는 문화의 융합과 무역으로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이슬람사원인 대청진사(西安大淸眞寺)와 주변 회족거리에서 서역과 교류했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비림박물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The Nestorian Stele)는 당나라 때 기독교가 전래되어 활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채재악낙타용(三彩載樂酪駝俑), 당, 시안시 출토, 섬서역사박물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The Nestorian Stele)>

대청진사(西安大淸眞寺, The Great Mosque of Xi’an)

시안 중심부 종루(鐘樓)와 고루(鼓樓)를 지나 회족거리에 들어서면 중국에서  회교사원인 대청진사(西安大清真寺)를 볼 수 있다. 당현종 때(742년) 처음 세워졌으며, 송,원,명,청대에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나라 초에 중건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중국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슬람사원(Mosque)이다.

<대청진사 선례루>

<예배대전>

 시안 성벽(西安 城墻)

시안 성벽(西安 城墻)은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도성(都城)이다. 수(隋) 때 현재의 위치에 도성을 처음 쌓았으며 당나라 말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의 성곽은 명(明) 때 주원장 둘째 아들이 진왕으로 봉해지면서 다시 쌓았는 당나라 황성 터의 성을 연장하여 다시 쌓았으며 그 후 여러차례 수리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운벽돌로 성벽을 쌓은 것으로 명.청대 중국 도성(都城)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명.청대 중국 도성의 형식을 잘 보여주는 시안 성벽>

전체 둘레 13.74 km로 남북으로 2.6 km, 동서로 3.5 km 정도의 직사각형을 하고 있다. 성벽은 높이이 12 m 정도이며, 상부 너비 12 ~ 14 m이다. 성벽 바깥에는 땅을 파서 만든 호성하(护城河,해자), 성벽 위에는 갑루, 전루, 성루 등의 누각과 여인장, 타구 등의 방어시설을 두고 있다.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인 장락문, 안정문, 영녕문, 안원문을 비롯하여 18곳의 성문을 두고 있다.

<남문에 해당하는 영녕문>

<갑루와 옹성>

<영녕문에서 동쪽 건국문으로 이어지는 해자>

<치성과 적루>

<마차 2대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넓은 성벽 상부>

시안 종루(钟楼)는 명나라 때(1384년)에 처음 세워졌다. 건물은 높이 40 m 정도 이며, 성문 형식의 벽돌로 지은 정사각형 기단 위에 3층 목조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남문인 영녕문 안쪽으로 600 m 정도 떨어진 도심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260 m 정도 떨어진 곳에 고루가 있다.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종루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경운종(景雲鐘, Jingyun Bell) 등이 걸려 있었다.

<시안 종루>

시안 도심 회족거리라 불리는 옛 시장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고루(鼓樓)이다. 건물은 성문 형식의 기단 위에 3층 누각을 올려 놓은 형태로 명나라 초기인 1380년에 처음 세워졌다. 저녁에 북을 쳐서 하루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곳으로 시안 시민들이 북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높은 건물로 세워 졌다.

<시안 고루>

섬서역사박물관(陕西历史博物馆)

섬서역사박물관은 1,100년 동안 고대 중국 왕조의 수도였던 역사적 배경으로 많은 문화유산들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은 170만 여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 시대와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 3,0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제1전시실은 선사시대 이래 주(周), 전국시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유물들을, 제2전시실은 동.서양 교류를 통해 통일된 중국문화를 정립한 한(漢), 남.북조시대 유물들을, 제3전시실은 남.북조 혼란기를 마감하고 화려하면서 국제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수.당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섬서역사박물관 정문>

<본관 로비에 특별전시 중인 서한류금동마(西漢鎏金銅馬), 한, 싱핑(兴平)시 무릉(茂陵) 출토>

<리방준(盠方尊), 서주, 바오지(宝鸡)시 출토 >

<금괴수(金怪獸), 전국 ~ 서한, 선무(神木)시 출토>

<석가불조상(釋迦佛造像), 북위, 수집>

<류금철심동룡(鎏金鐵芯銅龍), 당, 시안시 출토>

<삼채삼화마(三彩三花馬), 당, 셴양시 출토>

<출처>

  1. 안내문, 섬서역사박물관,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