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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대고려] 고려시대 불상

통일신라 불상의 세련된 조각수법, 적절한 비례와 조형미는 통일신라 말 혼란기를 거치면서 투박하면서 토속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때 유행했던 석굴암 본존불같은 촉지인 불좌상들이 계속 조성되었으며 지방호족의 후원을 받은 토속적인 면을 보여주는 거대 석조불상들이 고려초기에 많이 조성되었다. 고려후기에는 원나라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이 조성되기도 했는데 장곡사금동약사여래상(보물 337호)가 떄표적이다. 또한 고려후기에는 개인이 예불을 올리기 위해 소형 전각에 불상을 안치한 금동불감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찰로 가는길
사찰은 불상과 불화로 표현된 부처를 만날 수 있는 신앙의 공간입니다. 신앙의 중심인 불상과 불화에도 고려 문화의 독자성과 다원성이 나타납니다. 거대한 석불처럼 이전 시기나 같은 시기 중국의 것과는 다른 고려만의 독특한 불상이 조성되기도 하였고, 과거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주변의 여러 왕조와 활발히 교섭하면서 새로운 요소가 선별적으로 수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는 외교사절에 의한 공식관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승려의 왕래 등 민간 차원의 빈번한 교류로 송(宋)의 새로운 불교문화를 받아들였고, 동시에 요(遼)와 같은 북방민족과는 정치적 대립과 긴장 관계 속에서 교섭을 이어갔습니다. 남송(南宋)과는 수도였던 절강성 항저우(杭州), 무역항이었던 닝보(寧波)를 통해 민간 교류를 지속하였습니다. 원 간섭기에는 티벳 라마불교가 유입되어 고려 왕실과 상류층의 불사(佛事)에 반영되었습니다. 고려 불상과 불화에 보이는 여러 외래 요소들과 그로 인한 변화 양상에서 당시 통아시아의 복잡다단한 정세와 고려인의 주체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고려후기 개인이 예불을 올리기 위해 만든 불감을 대표하는 유물인 금동삼존불감(국보)이다. 중국 요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이전의 목조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부처와 보살을 모신 작은 집, 고려 11~12세기, 금동, 국보, 간송미술관>

불감(佛龕)은 ‘부처를 모신 작은 집’입니다. 불감은 개인이 사찰 이외의 장소에서 예불을 드릴 때 사용하였고, 바위틈에 안치하거나 탑 안에 봉안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귀한 불감이 우리를 맞아줍니다. 고려의 사원 건축을 충실히 재현한 불당(佛堂)을 형태의 감실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두 어깨를 덮는 법의(法衣)를 입고 허리가 다소 긴 비례의 불상은 요나라 불상과도 유사합니다. 주변국과의 정치적 대립과 긴장 속에서도 문화적 교류를 이어나가며 고려가 이룬 승고함이 이 작은 불감 안에 담겨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고려말 만들어진 금동보살상이다. 화려한 장신구와 장식성이 돋보이는 보살상이다. 조선초 양주 회암사지에서는 보살상을 장식했던 영락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1. 금동보살좌상, 고려 14세기, 금동, 일본 후묘지(普明寺)>

정교한 세부 묘사와 온몸에 걸친 화려한 장신구의 장식성이 돋보이는 금동보살상이다. 오른팔을 올리고 왼팔은 내려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가운데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취하였다. 굵은 장식이 달린 목걸이와 입체감 있게 도드라진 영락은 고려 후기 보살상의 특징이다. 이 상은 영락 장식을 함께 주조했지만, 영락을 따로 만든 후 상에 부착하기도 한다. 양주 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장신구는 보살상을 장식 했던 영락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금동보살좌상, 고려말 ~ 조선초, 금동>

둥글고 넓적한 얼굴은 편평한 편이나 튀어나온 눈꺼풀과 우뚝 선 예리한 콧날, 굳게 다문 입술은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가슴 윗부분과 하반신에는 화려한 장신구를 걸쳤다. 전반적인 모습은 고려 후기 보살상의 전형적인 형식을 계승했지만 자세와 신체 비례, 복잡하게 치장한 장식 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행하는 보살상의 시기적 변화 과정을 보여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3. 보살의 영락장식, 양주 회암사터 출토, 고려말 ~ 조선초, 금동>

목조불상은 나무로 만든 불상으로 일본에서 많이 조성되었다. 제작방시은 하나의 나무를 깎아서 만드는 방식, 2개이상의 나무로 머리 등 주요부분을 나누어서 조각한 후 조립하는 방식 등이 있다.


<1. 목조아미타불좌상, 일본 헤이안 12세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서방 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여래에 대한 신앙은 중국과 고려,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일본에서는 특히 헤이안시대(794~1185) 후기 정토종(淨土宗)의 확산으로 아미타당(阿彌陀堂)과 아미타상이 빈번하게 조성되었다. 아미타불좌상은 아미타불의 아홉 가지 수인 가운데 두 손을 배 앞에서 마주하여 엄지와 검지를 맞댄 상품상생인(上品上生印)을 취하고 있다. 이 부처의 손 모양은 중생의 성품이 모두 다르기에 각 단계에 맞게 설법하여 정토왕생을 돕는 아미타불의 구제 방식을 보여준다. 고려시대 불상 중에서도 비슷한 수인을 취한 아미타불이 조성되어 동북아시아가 공유한 아미타 신앙과 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목조대일여래좌상, 일본 헤이안시대 12세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일본의 헤이안시대(794~1185)는 중국에서 들어온 밀교의 영향으로 밀교의 본존인 대일여래상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왼손 검지를 세우고 이를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智拳印)의 수인은 고려시대 비로자나불의 수인과 통일하다. 그러나 일본의 대일여래가 머리를 높게 묶고 신체를 장엄한 보살의 모습인 점은 고려의 여래형 비로자나불과 다른 점이다. 두 불상 모두 여러 목재를 결합하여 불상을 조각하는 분할조립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 고려말 조선초, 금동, 보물, 대흥사>

한쪽 무릎을 세운 유희좌(遊戱坐)와 윤왕좌(輪王坐) 자세는 송대에 특히 성행한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수용되어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이 보살상은 결가부좌 상태에서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왼팔에 체중을 실은채 머리와 상체를 곧게 세우고 있다. 이 상과 유사한 상이 강진 고성사에서도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 대외 해상무역이 활발히 이루어면서서, 바다와 인접한 해남과 강진에 송대 윤왕좌보살상 도상이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목조대세지보살좌상, 금 또는 남송 12 ~13세기, 나무, 영국 빅토리아엘버트박물관>

두 다리를 접어 편안히 바닥에 두고 오른손을 든 수인을 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다. 높게 묶어 올린 보계(寶髻) 만큼 높은 보관을 착용하였고, 보관 중앙에 보병이 있다. 보살의 중량감 있는 체구, 장신구, 천의(天衣) 처리와 같은 전반적인 특징은 중국 산서성(山西省) 평양부(平陽府) 홍동현(洪洞縣)에서 출토 되었거나 혹은 그곳에 소재한 금대(金代) 불보살상과 공통점이 보인다. 관음보살과 쌍을 이루어 아미타 삼존불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신에 채색의 흔적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목조관음보살좌상, 송, 나무, 영국박물관>

당나라 양식을 계승한 남방의 송과 북방의 요불상은 11세기 이후가 되면 각각 독자적인 특징을 보인다. 송대에는 관음보살은 반가좌(半跏坐)와 유희좌(遊戱坐), 윤왕좌(輪王坐)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한 관음보살상이 제작되었다. 특히 해안가에 위치한 복건성과 절강성 지역에서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수월관음 신앙이 유행하여, 유희좌 혹은 윤왕좌를 취한 관음보살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 상처럼 암좌 위에 앉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발을 대좌 아래로 편하게 내린 유희좌는 북송대 이래 수월관음상의 보편적인 자세로 정착되었으며, 암좌가 없는 경우라도 대개 수월관음상으로 간주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고려 1346년, 금동, 보물, 청양 장곡사>

약사불은 갖가지 질병을 고쳐주고 재단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부처이다. 이 약사불상은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금통불이다. 왼손에 위로 불룩 솟은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뚜껑이 아니라 약이나 음식 같은 내용물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도상(圖像)은 통일신라 후기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 상의 복장에서 다수의 발원문과 직물이 확인되었다. 발원문에는 승려 백운의 이름과 함께 천여 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1346년에 백운의 주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시주하여 불상을 조성했음을 알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고려, 철>

불교의 진리인 ‘법(法)’을 인격화 하여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상이다. 양손은 가슴 부분에 올려 왼손 주먹을 쥔 채 둘째 손가락을 세워 오른손으로 감싸 쥔 형태의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옷 주름은 간략하며 계단 식으로 층층이 표현되어 있고 두다리 밑으로는 형식화 된 부채꼴 모양의 옷 주름이 펼쳐져 있다. 철불은 통일신라 말부터 제작되어 고려시대에 유행했다. 이 불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반 적으로 주조 과정에서 불상의 표면에 가로와 세로의 외형틀 분할선 흔적이 남게 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건칠불상은 삼베나 모시에 옻칠하여 만든 불상으로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전래되어 주로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유물로 합천 해인사 희랑대사좌상(국보333호)가 있다.


<건칠보살좌상, 고려 14세, 건칠과 나무에 채색>

건칠불(乾漆佛)은 삼베나 모시에 옻칠한 후 여러 번 겹친 것을 건조시켜 완성한 불상이다. 이렇게 만든 상을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문헌에서는 협저상(夾紵像) 또는 칠상(漆像)이라고 하였다. 송과의 교류로 중국 건칠불의 제작 전통이 전래되면서 고려에서도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상은 건칠 기법으로 제작된 보살좌상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크며, 광물을 새겨 넣은 장식판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금동보관이 함께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금동아미타불좌상, 고려 14세기, 금동>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에 머물며 설법 하는 부처로, 한없는 광명과 수명을 상징한다. 이 아미타불상은 얼굴이 계란형으로 가름하면서도 부피감이 있으며, 이목구비는 단정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머리의 중간 계주(髻珠), 속옷인 승각기의 띠매듭과 왼쪽 가슴 아래로 드리워진 마름모꼴 장식, 왼쪽 팔뚝 위에 겹쳐진 옷주름 표현 등은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 고려 14세기, 금동, 보물, 문경 대승사>

아미타불은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해주는 부처이다. 문경 대승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불상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불상이다. 양손은 엄지와 약지를 구부린 수인을 취하고 있고, 손바닥에 ‘井’자 형태의 손금이 남아 있다. 불상의 육계 부분에서 대덕(大德) 5년(1301)에 인출된 아미타 삼존다라니(阿彌陀三尊陀羅尼)가 발견되어 제작 시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대리국 11 ~ 12세기, 금동,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천수관음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을 줄인 말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재난을 없애주는 보살이다.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은 중국 당나라 때 유입되어 아시아 각국에 퍼졌다. 고려시대의 천수관음신앙이 기록되어 있지만 조각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2점 정도 밖에 없다. 이 상은 24개의 팔로 천수관음의 형상을 표현했다. 가늘고 긴 허리와 상·하체의 비례, 낮게 걸친 군의(裙衣), 인동무늬(忍冬文)를 채운 보관의 형태로 보아 중국 운남성雲南省 일대에 자리했던 대리국(大理國, 937~1253)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십일면천수관음보살좌상, 고려 14세기, 금동>

천수는 천 개의 손이라는 의미로 이 보살의 능력과 표현 방법이 매우 다양함을 상징한다. 천수관음 신양은 중국을 통해 전해져, 우리나라에서도 관음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 후기에는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기 위해 천수관음을 모신 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천수관음을 조각상으로 표현할 때에는 이 상치형 천수를 대표하여 40주나 42수로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손에 전부 다른 지물을 들고 있는데, 모두 <대비심다라니(大悲心陀羅尼)>, <천수경(千手經)> 등 전수관음 계통 경전에서 규정하는 바와 일치한다. 보상의 머리는 원래 얼굴 1개에 하단에 5개, 중단에 4개, 상단에 1개가 있다. 경전에서는 분노의 얼굴, 크게 웃는 얼굴 등이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 보살상의 얼굴은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1. 금동보살좌상, 고려 11세기, 금동>

요대(遼代, 916~1125) 보살상과 유사점이 많은 고려 전기 보살상이다. 화불(化佛)이 있는 높은 보관의 형태와 보관에 묶은 끈이 흘러 내리는 모양, 5개의 짧은 수직 장식이 있는 목걸이 등에서 요대에 다수 제작된 소형 금동보살상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요대에는 보관에 화불이 있고 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유행했던 점에서 보면 이상 역시 관음상일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금동미륵보살좌상, 요 11세기, 금동, 영국박물관>


<3. 금동대일여래좌상, 요 11세기, 금동,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감실은 신위(神位)나 불상, 영정 등을 모셔두기 위한 공간이다. 고려시대에는 개인이 부처를 모시고 예불을 올리기 위해 만든 작은 불감들이 만들어졌다. 금동이나 목재 등으로 만드는데 아주 정밀하게 조각된 불감은 당시의 높은 공예 수준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유물이 간송미술관 소장 금동삼존불간(국보 73호)이다.

<1. 부처를 모신 작은 집, 고려 14세기, 금동>

금속판을 조립해서 만든 전각 형태의 불감이다. 문 안쪽 면에는 금강역사를 좌우대칭으로 부조하고, 안쪽 벽에는 타출 기법을 사용하여 부처의 모임 장면을 표현하였다. 부처와 두 보살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10대 제자로 보이는 승려들이 서 있다. 불감 안쪽의 좌우 벽에는 각각 사자를 탄 문수보살상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상이 입구를 바라보는 자세로 배치되었다. 천정에는 능화문 안에 용을 새겨 넣었는 데, 전각의 닫집을 연상시킨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비사문천과 관음보살이 있는 작은 불감, 고려 1156년 이전, 은에 금도금>

남원군부인 양씨의 석관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는 작은 불감 이다. 탑을 든 비사문천과 연꽃을 든 관음보살이 감실 형태의 불감에 봉안되어 있다. 문을 열어 예배 할 수 있는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뒷면에는 범자가 있다. 1156년에 부인을 장사 지냈다는 묘지명의 기록이 있어 1156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고봉국사불감, 고려말 조선초, 금동, 송광사>

고봉국사 법장(法藏)이 소지했던 것으로 전하는 순천 송광사의 불감이다. 내부 공간의 깊이가 않은 점에서, 전각 형태로 안들어 불상을 안치하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불감과 구조가 다르다. 정면에 설치한 여닫이식 문의 바깥면에는 금강역사상이, 안쪽 면에는 두건을 쓰고 보주를 든 지장보살과 정병을 든 관음보살을 두드림 기법으로 돋을 새김했다. 지장과 관음이 나란히 등장하는 예는 14세기 고려 불화에서도 보인다. 강실 안에는 중앙에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을 포함하여 총 7구의 상을 새겼다. 감실 바로 위쪽에는 5개로 칸을 구획하고 밀교의 오방불(五方佛)을 상징하는 다라니가 쓰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아미타삼존불좌상, 고려 1383년, 은에 금도금>

아미타불,관음보살,지장보살로 구성된 삼존불로, 드물게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추었다. 삼존상의 주위를 둘렀던 은제 난간과 청동합, 은합이 일괄로 전하고 있다. 관음보살상에서 발견된 복장 발원문에서 1353년이라는 연대와 500명이 넘는 승려, 재가신도들이 삼존상 제작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시주자 명단에 당시 동북면 도지휘사이자 9년 뒤 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도 포함되어 있다. 이성계는 1383년에 2건, 1384년과 1385년에도 연이어 불사에 참여한 기록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불감과 관음보살상, 고려말 조선초, 금동, 은에 금도금(보살)>

2018년 1월에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친구들(YEN)’이 기증하였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으로만 전해오다가 국립중앙박물관회의 노력으로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감실 내부의 가장 넓은 벽에는 본존과 협시보살 주위로 제자와 팔부중이 운집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석가모니의 설법 장면인 영산회상도로 생각된다. 관음보살상 1구가 불감과 함께 남아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