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의 무덤이다. 헌강왕은 신라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며 뒤를 이은 정강왕과 진성여왕이 동생이다. 불교와 학문을 장려했으며 재위기간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강왕릉과 함께 경주 남산 북동쪽 구릉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쇠퇴기에 조성한 소박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 헌강왕릉(사적)>
헌강왕이 즉위하다 ( 875년 07월(음) ), 헌강왕(憲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이고,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왕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책 보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다 입으로 외웠다.
헌강왕이 죽다 ( 886년 07월05일(음) ), 〔12년(886)〕 가을 7월 5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는 헌강(憲康)이라고 하였으며,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강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릉은 높이 4.2 m, 지름 15.3 m 규모의 원형봉토분이며 둘레석으로 잘 다듬은 화강석을 4단으로 쌓고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무덤은 도굴되었으며 수해를 입어 긴급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내부 형태가 확인되었다. 내부는 관이 놓여 있는 석실이 있으며 천장은 둘글게 모아져 있다. 석실과 연결된 널길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제단이 있던 자리가 남아 있으며 봉문 주위에는 담장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전성기 통일신라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며 문,무인상을 비롯한 석물은 남아 있지 않다.
<뒷편에서 본 모습>
<봉분 둘레석>
<무덤 앞 제단이 있던 자리>
<봉분 주변 담장이 있던 자리>
<헌강왕릉 들어가는 길, 주변 소나무숲>
<왕릉 입구>
신라 헌강왕릉(憲康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5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김정)을 모신 곳이다. 봉분 높이 4 m, 지름 15.8 m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둘레돌을 돌렸다. 내부 구조는 연도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으며,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 m, 동서 2.7 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 cm, 너비 128~9 6cm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이 있다. 헌강왕은 경문왕(景文王)의 태자로서 문치(文治)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處容舞)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993년 왕릉 내부가 조사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