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서악서원 (西岳書院)이다.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과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설총과 최치원을 모시고 있다. 조선 명종 때 경주 부윤 이정이 김유신을 모시기 위해 사당건립을 추진하였으며 유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설총과 최치원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이황이 사당을 세울 때 후학양성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권고하면서 ‘서악정사(西岳精舍)’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서악정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며 그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다. 인조대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경주 서악서원>
현재의 서악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것이다. 앞쪽에는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이, 뒷편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강학공간은 강당건물인 시습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앞쪽엔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는 누각인 영귀루가 있다. 뒷편에 사당을 두고 있다. ‘서악서원’이라 적힌 현판은 당대 명필인 원진해가 쓴 글씨라고 한다.
<서악서원 현판>
영귀루는 강학공간 앞쪽에 세워진 누각이다. 건물은 앞면 5칸으로 사방이 뚫려있는 2층 문루 형태의 건물이다.
<영귀루>
강당인 시습당(時習堂)은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서악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강당 대청마루>
<뒷편에서 본 강당>
강당 앞 양쪽에는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서재가 있다. 동재는 조설헌(譟雪軒), 서재는 절차헌((切嗟軒)이라 부르며 2건물 모두 앞면 5칸의 큰 건물이다.
<조설헌>
<절차헌>
<강당 뒷편 건물>
사당에는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유신 장군, 신라가 유학을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던 설총,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큰 업적을 남긴 최치원을 모시고 있다.
<사당 내삼문>
<사당>
강학공간 옆에는 서원을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었던 건물들이 있으며, 마당 한쪽에는 서악서원을 처음 세운 경주부윤 이정의 비가 있다.
<서원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는 공간>
<영귀루 옆에 세워진 비석>
<비석>
서악서원이 있는 마을은 선두산 동쪽편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다. 신라를 크게 중흥시킨 진흥왕릉을 비롯하여 법흥왕릉, 무열왕릉, 김유신 장군묘, 문무왕의 동생으로 삼국통일에 크게 공헌한 김인문의 묘를 비롯하여 서악동 고분군 등이 있다.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서악서원(西岳書院), 경북 경주시 서악동 615
이 서원은 조선 명종 16년(1561) 경주부윤 이정(李貞, 1512~1571)이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당시 경주지역의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이정은 퇴계 이황과 의논 하여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이름하고 손수 글씨를 써서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모두 불탔고, 인조 때 다시 세워져 나라에서 서악서원이라는 이름 (願)을 받게 되었다. 지금의 글씨는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뒤에는 사당을, 앞에는 강당인 시습당을 배치하고, 영귀루를 맨 앞에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자리 배열을 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시습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다. 왼편으로 진수재(進修齋)를, 오른편으로 성경재(誠敬齋)를 두었다. 영귀루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의 누각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