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북부동에 있는 경주 읍성(사적)이다. 조선시대 경주부 읍치가 있던 읍성으로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이나 고려말 우왕 떄(1378) 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해 해안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빼앗긴 경주읍성을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다시 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경주읍성은 조선초부터 여러차례 수리를 했으며 그 내용이 기록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향일문(동문) 남쪽 성벽 일부와 치성 2곳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일부 복원되어 읍성을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경주 읍성 (사적)>
<문종실록>에 따르면 읍성은 둘레 1,904 m, 높이 약 5.4 m 정도였다고 한다. 읍성 성문으로는 징례문(남문), 향일문(동문), 망미문(서문), 공진문(북문)이 있었으며 징례문 문루에는 성덕대왕신종(국보)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벽 앞으로 돌출되어 성문을 호위할 수 있는 치성(雉城)과 성벽 바깥에는 물이 있는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 남쪽 약 50 m 정도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동쪽 성벽과 향일문을 복원하였다.
<경주 읍성>
<50 m 정도 남은 동쪽 성벽>
<안쪽에서 본 모습>
<안쪽 성벽>
<동문 남쪽 치성>
<안쪽에서 본 치성>
<동문 남쪽 2번째 치성>
<남쪽에서 본 치성과 성벽>
<주택가로 바뀐 2번째 치성 남쪽편 성벽터>
<복원된 동문과 동쪽 성벽>
경주읍성
이 성은 경주시 동부동, 북부동, 서부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축읍성으로 둘레는 2,409 m이며, 현재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 왕건 이래 역대 고려왕들은 경주를 중요시하여 940년에 안동대도독부를 설치하고 994년에는 동경유수관을 두는 등 지방통치의 중심으로 삼았다. 성은 고려 현종 3년(1012년) 축성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는 3.6 m 정도이나 시가지 확장에 따라 대부분이 헐리고 90 m 가량의 성벽만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