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부산 동래읍성, 동래부 읍치

부산시 동래구 옛 동래부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동래읍성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말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일본과 교류하는 관문역할을 했으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원래 규모는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1km 정도의 일반적인 읍성이었는데 조선후기 영조 때(1731년)에 현재의 규모로 크게 증축하면서 평산성 형태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치 주변 도심의 성벽과 성문은 없어졌으며 마인산 주변 성벽 일부만 남아 있었다. 현재는 북문과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등의 시설과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부산 동래읍성>

<서장대 부근 옛 성벽>

동래읍치 주산인 마안산을 중심으로 동서쪽 구릉과 읍치가 있는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이다. 전체 규모는 둘레 약 3.8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읍성으로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동장대, 북장대, 서장대를, 성문으로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암문을 두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

<북장대가 있는 마안산>

<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편 구릉>


<동래읍성 축성비>

성문은 현재 북문과 북장대와 동장대 사이 언덕에 있는 인생문이 복원되어 있다. 성문은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바깥쪽에 옹성을 설치한 조선후기 성문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앞쪽과 뒷쪽에 별도로 성문이 있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북문(안쪽)>

북문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성문이라기보다는 비상시 퇴각하기 위한 암문 성격이지만 옹성과 문루를 갖추고 있는점이 특이하다.

<북문 바깥 옹성>

<옹성 내부>

<북문 바깥쪽 길>

<복원된 북문 동쪽 성벽(바깥쪽)>

<북문 문루 옆에서 보이는 북문 동쪽 성벽>

<북장대로 이어지는 성벽길>

<북문과 북장대 사이 성벽>

<북장대 아래 치성>

<치성 동쪽 성벽>

<북장대 오르는 길>

북장대는 동래읍치 주산인 마인산 정상부에 있는 군사지휘소인 장대이다. 이곳에서는 동래읍치와 주변지역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북장대>

<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래부 읍치>

<북문 서쪽 성벽(바깥쪽)>

<북문 서쪽 성벽(안쪽)>

<북문 서쪽 성벽(안쪽)>

<북문 주변 성벽>

<북문 서쪽 정상부로 연결되는 성벽>

<북문 서쪽 구릉 정상부>

<북문 서쪽 정상부 성벽과 치성>

북문 서쪽 정상부에서 서장대 사이에는 조선후기에 쌓은 복원전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옛모습이 남아 있는 성벽>

<허물어진 모습의 치성>

<치성 아래 복원된 성벽>

<서장대와 주변 성벽>

<서장대>

<서장대 아래 성벽>

동래지역에는 삼한시대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가야 고분인 복천동고분군(사적)이 북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 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복천동고분군(사적)>

동래 읍성지 (東萊 邑城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 (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 (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 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藝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 여장(女牆)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