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군 중앙로(영월읍)에 있는 영월부 관아(사적)이다. 영월부(寧越府)는 조선시대 영월지역을 다스리던 지방관청이다. 삼국시대 때 고구려에서 내성군을 서러치했으며 고려떄는 원주의 속현이었다가 고려말에 영월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후기 숙종 때(1698년)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승되고 장릉으로 천릉하면서 영월부로 승격하였다. 영월부 관아는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 청령포에 머물다 홍수가 나면서 관아 객사 동익헌(관풍헌)에 머물렀던 유서깊은 곳이다. 관아터에는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는 객사와 단종이 자주 올라서 시를 지었던 곳으로 전해지는 자규루(子規樓)가 남아 있다.
<영월부 관아(사적)>
<영월부 관아 위성사진>
<영월부 관아 지도, 월중도(보물)>
영월을 부사로 승격하고 김시습에게 증직과 사제를 행하도록 명하다
“장릉(莊陵)의 헌관(獻官)은 의당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차정(差定)하여야 하니, 영월을 부사(府使)로 승격시켜 사체(事體)를 높이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2월 10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영월부 객사는 조선초 태조 때(1396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면 정조 때(1791년)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청은 앞면 3칸, 서익헌은 앞면 4칸 규모이며 단종이 머물렀다는 동익헌(관풍헌)은 앞면 5칸 규모이다. 다른 지방의 객사 건물과는 달리 동익헌은 온돌시설이 있어 단종이 머물렀던 숙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에 그려진 월중도(보물)에 그려진 객사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과 동일하여 조선후기 중수 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월부 객사>
<관풍헌>
<정청>
<서익헌>
관풍헌(觀風軒)
영월객사의 동헌으로서 조선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단종께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던 중 홍수를 피해 이곳으로 이어하시어 머무르시다가 1457년(세조 3) 10월 24일 승하하셨다. 1997~1998년 드잡이 및 번와 등 전면보수를 하였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관아 앞쪽에 위치한 자규루(子規樓)는 조선초 세종 때(1428년) 처음 창건된 누각 건물이다. 단종이 청령포를 떠나 영월군 관아에 머물 때 자주 올르 자규시를 읊은 것을 계기로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원래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단종이 복위된 조선후기 이후에 다시 중건했다.
<자규루>
자규루(子規樓)
이 누각은 세종 10년(1428)에 창건, 신숙근이 중근. 신숙근은 연산조에 영월군수를 역임하였다. 후에 단종께서 관풍헌으로 이어하시어 머무시는 동안 이 누각에 오르시어 자규사 및 자규시를 읊으신 것이 계시가 되어 자류루로 불리게 되었음. 그후 선조 36년(1605) 큰 홍수로 인하여 이 누각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나 정조 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과 영월부사 이동욱이 의논하여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영월부 관아(寧越府)
영월 객사와 관풍헌 및 자규로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이곳에 유배되어 노산군으로 강봉된 채 17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해진다. 세조 3년(1457)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홍수가 나게 되자 당시 영월부 객사의 동익헌이었던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침전으로 사용하였고, 자규로(당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린 임금의 비통함과 애처로움이 배어 있는 시를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출처>
-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 숙종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