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바다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과 풍부한 철자원을 바탕으로 중국 및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가야 유적지에서는 당시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 중 지리적,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중국 북조와 남조를 비롯하여 멀리 서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도 보인다. 청동솥, 거울, 방패꾸미개, 적갈색토기 등은 가야와 주변국가와의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들이다. 또한 신라, 백제, 고구려와는 정치, 외교적 상황에 따라 적절히 교류했는 백제로부터 받은 금동관모와 쇠자루솥, 신라로부터 받은 유리그릇 등이 대표적이다.
<갑옷과 투구, 5세기, 지산동 30호 주변 1~3호묘, 함양 상백리고분, 국립대구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가야연맹체가 있었던 경남지역은 고대 이래 한,중,일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삼한시대 이전부터 왜(倭)의 대외교류 창구이기도 했다. 삼한시대 이후 교류는 김해지역 금관가야가 주도했으며 백제가 왜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자 입지가 좁아졌고 광개토대왕의 정벌 이후 급격히 약해졌다. 이후에는 고성 지역의 소가야와 섬진강유역을 장악했던 대가야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남해안 일대 주요 거점에서는 왜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말갖춤, 5~6세기, 2. 말띠꾸미개,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3. 발걸이,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녹각장식 철검, 5세기, 4. 함안 말이산 3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유리구슬, 5세기, 거제 장목고분, 국립김해박물관>
<왜의 청동거울, 6세기, 6. 산청 생초 9호묘, 진주 중안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경상대학교 박물관>
<넓은입 구멍단지, 7.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진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뚜껑접시(스에키계 토기), 5세기, 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왜계토기(스에키계 토기), 6세기, 9. 산청 생초 9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왜계토기(스에키계 토기), 6세기, 9. 산청 생초 9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와 왜
가야와 왜의 교류는 지리적인 이유로 일찍부터 있었지만, 4세기 이후 백제가 급부상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왜와의 교류를 주도하던 가락국은 366년 왜가 백제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자 입지가 좁아졌고, 400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남쪽을 정벌한 이후에는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가락국이 연결한 왜와의 교류는 5세기 이후, 남해의 해상왕국 고자국과 섬진강 일대를 다스리던 가라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남해안 일대 연안항로의 요충지를 따라서 왜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고, 일본에서는 가라국의 귀걸이가 여러곳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백제는 왜와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가야를 적절히 지원하면서 신라를 견제했다. 대가야 고분에서는 백제 금동관모과 귀걸이가 출토되었으며, 여러 지역에서는 백제와 관계를 보여주는 큰칼과 청동그릇 등이 출토되고 있다.
<금동모관, 4~5세기, 1. 경기도 화성 요리1호묘(비교자료), 화성시 향토박물관>
<금동모관, 4~5세기, 2.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금동모관, 4~5세기, 3. 합천 옥전23호묘(복제품), 경상대학교 박물관>
백제에서 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귀걸이가 다라국 최고 지배자의 무덤에 묻혔다.
<금귀걸이, 4~6세기, 4. 합천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5. 합천 옥전 M1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허리띠고리, 6세기, 6. 합천 옥전 M1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청동그릇은 여러 가야가 백제와 각기 자율적으로 추진한 외교의 결과로 추정된다.
<쇠자루솥, 5~6세기, 1. 서산부장리 5호묘, 국립공주박물관>
<쇠자루솥, 5~6세기, 2. 남원 월산리 M5묘, 국립전주박물관>
<청동그릇, 5~6세기, 3. 합천 옥전 M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4. 의령 경산리 2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청동 굽다리접시, 6세기, 5. 고성 송학동 1C호묘, 고성박물관>
<고리자루 큰칼, 4~6세기, 1. 봉황장식, 고령 지산동 73호묘, 대가야박물관>
<2. 상감장식, 함안 마갑총, 국립김해박물관, 4. 봉황장식, 산청 중촌리 3호묘 북토광, 신라대학교 박물관, 5. 천안 용원리 1호묘, 국립공주박물관, 비교자료>
<3. 상감장식, 남원 월산리 M1-A호묘, 국립전주박물관,>
<6. 은장식, 함천 옥전 28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와 백제
4세기 무렵 백제와 고구려 같은 강대국의 출현은 가야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백제는 가야를 적절히 지원하여 신라의 팽창을 억제하기도 하고, 여러 가야 중 어느 한 나라가 커지는 것도 경계하였습니다. 4세기 후엽 백제는 강성한 가락국보다는 가라국과 다라국을 돕기도 합니다. 고령 지산동 73호 무덤에서는 백제에서 만든 금동관모와 귀걸이가 출토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아라국과 고자국 등 여러 가야의 지배자가 소유한 큰칼과 청동그릇 등은 제작기 백제와 정치적 관계를 맺었음을 말해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경남 창녕지역에 있었던 비화가야는 비교적 이른시기부터 신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녕 교동 등 주요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공품이나 마구, 칼 등은 신라식이 많지만 토기문화는 여전히 지역색을 보이고 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으로 보이는 큰칼이나 토기, 유리잔 등이 출토되고 있다.
<세잎장식 큰칼, 1. 의성 학미리 1호묘(비교자료), 국립대구박물관, 3. 용장식 큰칼, 6세기, 경주 호우총, 국립중앙박물관>
<세잎장식 큰칼, 2.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세잎장식 큰칼은 신라가 제작하여 가라국에 전해 준 것으로, 가라국과 신라 왕실이 맺은 정치적 관계를 보여준다. 용머리장식 큰칼은 가라국이 신라 왕실에 선물한 장식대도이다.
<말띠드리개, 6세기, 1.고성 송학동 1C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유리그릇, 5세기, 2. 옥전 M1호분, 경상대학교 박물관>
다라국의 지배자가 가진 유리잔은 신라의 정치적 요청을 받아들인 대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허리띠는 신라나 백제로부터 받은 허리띠이다.
<관꾸미개, 5세기, 3. 경산 임당 7A호묘(비교자료), 영남대학교 박물관,허리띠, 고성 송학동 1C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관꾸미개, 5세기, 4. 고령 지산동 73호묘 서순장관, 대가야박물관>
<신라토기, 1. 고성 송학동 1B-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3. 합천 옥전 3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신라토기, 2. 고성 내산리 8호묘, 국립전주박물관>
<신라토기, 4. 김해 대성동 73호묘, 성동고분박물관, 5. 합천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와 신라
가야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는 가야를 포섭하거나 회유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습니다. 가령 합천 옥전 M1호 무덤에서 나온 다라국의 지배자가 가진 유리잔은 신라의 정치적 요청을 받아들인 대가였을 것입니다.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 무덤의 주인공이 가진 큰칼은 가라국과 신라 왕실 사이에 이루어진 정치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한편 고성 송학동 고분군에서 나온 신라 토기는 고자국의 지배자가 사망했을 때, 정치적 협력관계를 이끌어내기 위해 신라의 조문 사절단이 들고 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가야 독자외교 – 자율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독자적으로 대외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듯 가야의 고분군에서는 중국을 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왜, 신라, 백제, 고구려 등과 교류한 증거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다라국이 백제로부터 받은 금동관모, 신라로부터 받은 유리그릇, 고자국이 받은 왜와 신라의 토기, 기문(己汶)이 받은 백제의 쇠자루솥과 가라국의 귀걸이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대로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 풍납토성에서는 고자국의 토기가, 신라의 식리총에서는 가라국의 큰칼이 출토되었습니다. 왜에서는 가라국의 귀걸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야의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여러 가야들은 각기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주변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외교적 관계를 맺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