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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 고분군(사적), 삼한시대 지방유력 세력 무덤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다호리에 있는 다호리 고분군(사적)이다. 삼한시대 고대국가 형성기에 낙동강 습지와 그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 생활공간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다. 가야초기 널무덤 70여기와 삼국시대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청동검, 청동거울, 오수전, 철검, 손칼, 쇠도끼, 쇠갑옷 등 철기제품과 칼집, 활, 화살, 붓, 부채 등 칠기제품, 그리고 민무늬 토기, 와질 도티 등이 있다. 청동거울과 오수전 같은 유물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에서 1세가 후반 사이 유적임을 알려주고 있다. 통나무를 파서 만든 목널은 다른 지역과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문자생활의 증거인 붓과 현악기 등이 나왔으며, 청동거울과 오수전을 통해 중국, 낙랑과 활발한 교역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창원 다호리고분군(사적)>

<다호리고분군 유적 분포>

다호리 1호 무덤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속을 파낸 통나무널이다. 널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청동검, 철검, 쇠도끼, 중국거울, 붓 등이 남겨진 대나무 바구니를 묻었다. 이 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무덤 형태로 삼한시대 해상교역을 통해 번성했던 이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1호 무덤이 발견된 지역(도로 건너편)>

다호리 널무덤이 발견된 곳은 다른 지역 가야 고분과 달리 실제로 눈으로 보이는 봉분은 없다. 늪지가 논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거의 없고 논이었다가 유적이 발굴된 지역임을 알려주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늪지에 있어 유물이 훼손되지 않아 무덤의 구조는 물론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도로 옆 유적지 조망장소>

 <창원 다호리 1호 무덤(나무널 무덤), 기원전 1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식 동검>


<청동투겁창>

<쇠도끼>

쇠도끼는 당시 철이 많이 생산되었던 변한지역에서 교역을 위한 화폐대용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쇠도끼>

붓은 나무판에 글을 쓰고, 칼은 나무를 깎아 지우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자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손칼과 붓>

<붓글씨 재현품>

청동거울과 칠기 등의 유물들은 중국 한나라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낙랑을 통해 중국과 교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 허리띠 부속구>

<청동거울(성운문경)과 청동방울>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토기, 칠기, 목기, 대나무 등 여러 재질의 유물에 칠을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칠기법은 같은 시기 낙랑이나 중국의 그것과 달라 독자적인 칠문화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칠그릇>

<칠부채>

<유리구슬>

중국 동전은 교류를 위해 바닷길을 오가던 이들이 남긴 중요한 유물로 이 무덤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경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 오수전>

이 청동고리는 각각의 무게가 5.25g, 10.25g, 11.55g, 22.73g이다.  무게의 배율이 1:2의 비율로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양팔저울의 추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고리>

유력개인의 등장
주남저수지에 인접한 다호리 유적은 평지에서부터 구릉 정상부까지 목관묘, 옹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다양한 무덤이 분포한다. 목관묘는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속을 파서 만든 통나무관과 판재를 조립하여 만든 관이 있다. 통나무관은 1호 무덤에서 실물이 나왔다. 1호무덤은 통나무관 아래에 껴묻거리 구덩이가 있었고, 여기서 청동검, 쇠칼, 여러가지 형태의 쇠도끼, 중국거울, 동전 등 금속기류와 붓, 부채, 검집, 화살통 등 칠기류가 나왔다. 청동과 쇠로 만든 검은 그 형태가 비슷하다. 이것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붓은 2,000년 전 우리나라에서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중국거울과 동전은 당시 중국과 교역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런 유물을 소유한 무덤 주인은 당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부를 통해 권력을 지녔던 사람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호리 유적은 삼국이 형성되기 전에 집단 내에서 개인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여러기의 널무덤이 출토된 지역>

<도로 옆 유적지>

창원 다호리는 낙동강 하류 습지인 주암저수지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이북 밀양과 비화가야가 있었던 창녕, 금관가야 중심지 김해와 항구가 있는 마산과 육로와 낙동강 수로를 통해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습지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적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하고 배를 이용한 낙동강 수운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기때문에 무역거점으로 발전한 것이 보인다.

<유적지 옆 습지>

<인근 주남저수지>

창원 다호리집단의 성장
가야가 건국되기 전인 기원전 2세기 경, 남해안에서 가장 눈에 띠는 교역항은 사천 늑도 유적입니다. 이곳에서는 일본 야오이 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낙랑토기와 한문화, 중국 동북 지역의 토기 등 다양한 문화가 확인됩니다. 한편 내륙지역에서는 창원 다호리 집단이 두각을 드러내어 변한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현재까지 100기 이상의 널무덤이 조사되었으며, 중국 한대의 청동거울과 동전, 철기, 칠기, 왜계토기 등 국제적인 유물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2세기 이후에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이후 이 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유적지에서 출토된 집모양토기를 통해 습지에서 살았던 다호리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집은 구덩이를 파서 만든 움집과 다락집이 있는데  움집은 보통사람들의 살림집으로, 다락집은 창고 또는 지배자의 거처로 추정된다. 다락집은 높은 기둥을 세워 만드는데 이것은 짐승과 습기로부터 곡물을 보호하거나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한나라 유물에서도 비슷한 유물들의 출토되고 있다.

<집모양 토기(복원품)>

<창원 다호리 마을>

<다호리마을 유물전시관>

<다호리 마을>

기원전 1세기경 민무늬토기의 제작전통에 새로운 토기제작기술이 더해져 와질토기라는 독창적인 토기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로는 회전판, 굴가마, 환원염소성, 타날 등이 있다. 와질토기로 밀폐된 굴가마에서 구워 회색을 띤다. 형태는 민무늬토기에서 변화된 것이 많으나 점차 굽다리가 붙는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


<와질토기>

<주머니호>

<주머니호, 항아리>

<손잡이바리, 주머니호>

<야요이 토기>

의창 다호리고분군(사적 237호), 창원시 동읍 다호리
선사시대부터 가야시대까지의 수많은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유적이다. 1988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널과 함께, 칠기, 청동기, 철기의 생활용품과 무기류들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 삼한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밝혀 주었다. 이 유적에서 목재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수분이 많은 지형적 특징때문이었다. 철새도리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 같은 많은 습지는 이러한 지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칠기는 낙랑과의 교류를 다시 증명해 주었으며, 청동기와 철기는 이 지역의 가야사를 되살리고, 기원전.후부터 이 지역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안내문, 창원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창원시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