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사적)이다. 가야국을 건국한 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 무덤이다. 금관가야 주거유적인 봉황대(사적)와 지배층 무덤이 모여 있는 대성동 고분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 때가 왕릉의 보존상태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세종 때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의 시조로서 왕릉에 걸맞는 수준으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지봉유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는데 당시 순장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무덤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이었다고 한다.
<김해 수로왕릉(사적)>
수로왕릉 능역은 조선시대 왕릉에 준하는 수준으로 정비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시대 수로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선전이 세워졌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역대 금관가야의 위패를 모신 숭안전이 추가되면서 종묘와 비슷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외에 안향각, 신도비각, 제기고, 전사청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수로왕릉 능역>
<능역을 출입하는 숭화문>
<실제 능역이 시작되는 홍살문>
<가락루>
출입문인 가락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수로왕릉이 보이고, 왼쪽에는 수로왕릉에 대한 내력 등을 적은 신도비가, 오른쪽에는 영정을 모신 숭정각이 있다.
<수로왕릉 능역>
신도비각는 금관가야의 역사와 숭전전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기록된 비(碑)이다. 비각은 1885년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 두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면서 보수되었다.
<신도비각>
<신도비>
<숭정각>
<수로왕 영정>
<수로왕비 영정>
<제물을 준비하는 시생대>
수로왕릉은 납릉(納陵)으로도 불리며 지름 22m, 높이 6m 규모의 원형봉토분이다. 왕릉 앞에는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이 배치되어 있다. 납릉 정문은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파사석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물고기 그림이 유명하다.
<출입문인 납릉심문>
<납릉심문 현판>
<파사석탑과 물고기 그림>
<수로왕릉 봉분>
<문무인석>
<마양호석>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가락국기(駕洛國記) > 수로왕과 왕후가 죽다(0189년 03월 01일(음))
왕은 이에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내고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 3월 23일(199년)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 왕후가 죽은 날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이고 둘레가 300보였고, 거기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묘(廟)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을 기다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수로왕릉 동쪽에는 역대 수로왕과 역대왕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과 숭안전이 있다. 숭선전은 구한말 고종때 이름이 내려졌으며, 숭안전은 일제강점기 이후 추가되었다. 금관가야의 종묘와 같은 성격을 갖는 공간이다.
<제향공간 출입문>
<제향공간 영역>
숭선전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과 왕후 허씨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거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경주의 박혁거세를 모신 숭덕전, 미추왕릉 앞쪽에 미추왕,문무대왕,경순왕을 모신 숭혜전, 탈해왕릉 앞에 숭신전 등이 비슷한 성격의 전각이다.
<숭선전과 안향각>
숭선전
가락국 시조 대왕, 시조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 가락국 제2대 도왕 원년(199년)에 창건되어 1698년에 새로이 제각을 건립하였고, 1792년 4칸으로 중건. 1878년에 숭선전으로 선액 되면서 3칸으로 건립되었다. 1926년과 1954년 두번에 걸쳐 중수되고 1973년에 보수되었으며 1987년 능 전면에서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숭안전은 역대 금관가야 왕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종묘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후 김해김씨 문중에서 조상을 모시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숭안전>
<제기고>
<전사청>
대호군(大護軍) 허전(許傳)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효휘전(孝徽殿)께서 돌아가시고 역월(易月)의 상제가 어느덧 지나갔습니다. 장사를 지낼 날짜가 정해져 묘혈(墓穴)을 팔 날이 점점 가까워지니 성상의 슬픔과 애통함은 뭇사람들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구조(舊朝)의 신하로서 늙고 완고하기만 한 채 죽지 않고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세상일에 대하여 함부로 간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한마디 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성명께서는 조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 <생략> _
이에 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지엄하신 성상께 아뢰는 것이니, 천지 부모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굽어 살피시어 가락국 수로왕릉에 특별히 전호(殿號)를 내려 주고 아울러 삼국의 여러 능과 같이 능관을 두어 한편으로는 전성(前聖)의 성대한 법을 따르고 한편으로는 고국(故國)의 영령을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은 지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한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승정원일기, 고종 15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수로왕릉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崇善殿)과 숭안전(崇安殿), 안향각(安香閣), 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배치되어 있다. 납릉 정문에는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모양이 새겨져 있어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묘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능역이 설정되었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 13년(1580) 영남 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크게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인조 25년(1647) 능비를세웠으며, 고종 15년(1878)에는 숭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수로왕릉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는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 숭선전제례는 경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 승정원일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