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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화원으로 불린 승려들

불교에서 신앙활동과 장엄을 목적으로 제작되는 불교예술품들은 대부분 승려 장신들이 만든 것이다. 승려 장인은 출가한 승려이자 전문기술과 예술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들은는 수행자로서의 깨달음과 예술가로서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이들은 활동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활동해 왔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솔거와 담징, 황룡사 목탑을 건축한 아비지, 석가탑을 만든 석공 아사달,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조각승 양지 등 뛰어난 승려장인들의 흔적이 유물 또는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들은 특히 임진왜란 이후 공동체를 이루어 사찰에 필요한 기물 대부분을 만들었으며 계보를 이루어 전승이 이루어지면서 표준화된 조성양식 위에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였다.

조각승 연희가 <금강경(金剛經)>을 새긴 목판이다. 석가모니부처가 제자 수보리를 위해 전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1. 각수승 연희가 금강경 내용을 새긴 목판, 금강경변상도 목판, 연희, 조선 1679년, 통도사 성보박물관>

연희는 울산 운흥사에서 약 20년간 15종류의 불교 경전 간행에 참여하며 직접 경전을 새기며 진행 과정을 총괄하기도 했습니다. 다잇 사찰을 유람하며 연희와 만났던 문인 정시한은 그가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11년째 경전 수천 매를 새기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승려 장인에게는 매 순간 반복된 작업 역시 수행의 일환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 화련인 그린 밑그림이다. 정제된 선으로 다섯 조사와 동자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2. 화련이 그린 서른세 명의 높은 경지에 이른 스님, 쌍봉사 삼십조사 밑그림, 조선 1768년, 종이에 먹, 통도사성보박물관>

부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구도자로서 귀감을 보인 조사(祖師) 서른세 명을 그린 밑그림의 일부입니다. 부처와 보살 외에 조사나 나한 같은 수행자도 불교미술의 주된 소재였습니다. 화련은 강약을 섬세하게 조절하면서 굵고 힘 있는 선으로 암석과 나무의 질감을 살리고, 정제된 선으로 부처의 말씀을 이어온 다섯 조사와 동자를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밑그림이지만 완성본을 보는 듯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우리나라 승려 장인의 역사
승려 장인은 시대에 따라 처한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 성격과 위상이 바뀌었습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장인은 전에 없던 새로운 기술을 갖춘 전문가 또는 지식인으로 우대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더욱 융성하면서 승려 장인의 활동도 세분화, 전문화되었습니다. 유교가 국가 지배 이념으로 채택된 조선시대에는 승려 장인의 지위가 이전보다 낮아졌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활동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은 전국의 사찰을 승려 장인이 중심이 되어 재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사찰으 중심으로 전문화된 직능을 갖춘 승려 장인 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조선 후기에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불상과 불화를 조성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비수갈마천(毘首羯摩天)은 부처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존재로 불교 12천인 중 한명이다. 인도 신화에서 기술과 공예, 건축의 신이다. 그림에서는 망치와 정을 들고 불상을 조각하는 비수갈마천이 표현되어 있다.

<3. 최초의 불상을 만든 이야기가 실린 책, 석씨원류응화사적 권2, 조선 1673년, 종이에 먹, 동국대하교>

석가모니부처 일대기와 제자들의 행적을 정리한 <석씨원류응화사적>에는 기술과 창조의 신 ‘비수갈마천’이 최초의 불상을 만든 이야기가 삽화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가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잠시 하늘의 천궁에 오르자 지상의 우전왕은 그를 그리워하여 그 모습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때 비수갈마천이 장인으로 변하여 석가모니부처의 초상 조각, 즉 최초의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비수갈마천은 성스러운 부처의 모습을 구현하는 조선시대 승려 장인의 자의식과 정체성 형성에 영감을 주었습니다.<금강경(金剛經)>은 석가모니부처가 제자 수보리를 위해 전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연희는 그 가르침을 오래 이어가고자 단단한 나무에 부처가 가르침을 펼치는 장면을 새겼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우리는 비수갈마천이다.
비수갈마천(毘首羯摩天)은 최초로 불상을 만들었다는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천상과 지상의 호화로운 궁전과 성곽 등을 짓는 건축의 달인이자 신통력을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기술과 창조의 신이었습니다. 조선의 승려 장인은 자신들이 제작하는 불상과 불화에도 비수갈마천이 만든 부처의 첫 초상처럼 초월적인 생명력과 성스러움이 깃들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수갈마천의 모임’이라는 뜻의 ‘비수회’라고 부르며 종교적 위상을 높였고, 장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약사십이신장도>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조성한 불화이다. 정교한 필선, 화려한 채색, 회화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문정왕후가 후원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 나라의 안녕을 위해 대비가 발원한 불화, 약사십이신장도, 조선 16세기 후반, 비단에 색, 미국 보스턴미술관>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대비가 솜씨 좋은 장인에게 명하여 조성한 불화 다섯 폭 중 하나입니다. 발원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전기에 불교를 후원한 대표적 왕실 여성인 문정왕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작자는 16세기 왕실 불화를 주도했던 화원 이자실 또는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다른 화원일 수도 있으나 확실치 않습니다. 이 불화는 조선 후기와 달리 시주와 제작에 관련한 이들의 이름이 화기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정교한 필선과 화려한 채색, 풍부한 회화적 묘사가 돋보이는 16세기 왕실 발원 불화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발원기록이나 제작자 등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불상 중 하나이다.

<5. 다밀지 정수사에서 조성한 아미타불상,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조선 1482년, 국립중앙박물관>

1482년 오늘날 경상도 지역으로 추정되는 다밀지(多密地) 정수사(正水寺)에서 조성한 불상으로, 1910년 경상북도 칠곡 천주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좁은 어깨와 긴 허리, 머리에 솟아오른 육계와 그 위에 볼록한 구슬 모양 계주는 15세기 왕실 발원으로 조성한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58년)과 유사합니다. 조선 전기 왕실 불사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 소속 화원과 관아 소속 장인들이 함께 참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고려 후기 조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중국 명나라와 교류하며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였습니다. 비록 왕실 발원 기록이나 제작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전기 불상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국보)>는 1945년 중건된 영주 흑석사 대웅전에 있는 불상이다. 복장유물과 함께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1458년) 법천사 삼존불로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복장 유물 중에는 조성내력과 시주자 명단이 있는 <불상조성권고문>, 불교 서적 등이 있어 당시 불상 조성 내력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6. 불상 조성을 위해 시주를 권하는 글, 아미타여래삼존상 조성 보권문, 조선 1457년, 종이에 먹, 영주 흑석사, 국보>

지금부터 5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은 책입니다. 쉽게 구겨지지 않는 딱딱한 장지를 썼고 표지는 초록색 비단을 덮어 공들여 만들었습니다. ‘대공덕소’라는 제목이 있는 면은 아코디언처럼 펼쳐집니다. 제목이 있는 앞표지를 넘기면 불상을 조성하게 된 연유와 공양.보시.채색.칠 등의 시주 항목이 차례로 나옵니다. 1457년 정암산 법천사에 봉안할 불상 제작에 시주를 권하기 위해 만든 이 책에는 시주자로 참여한 의빈 권씨, 명빈 김씨, 효령대군 등 내명부와 왕실 종친 명단, 불상 조성을 주도한 승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상은 이 글이 작성된 후 1년 8개월 뒤에 완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7. 불상 제작에 뜻을 모으고 참여한 사람들 명단, 아미타여래삼존상 조성 복장기, 조선 1458년, 명주와 종이에 먹, 영주 흑석사, 국보>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와 명빈 김씨, 효령대군, 세종의 부마 등 왕실인사와 장인, 시주자까지 불상의 발원과 제작 과정에 관여한 인물 275명을 187행에 걸쳐 상세히 기록한 3.8미터 길이의 명단입니다. 이 명단은 명주와 백지를 이어 붙여 만들었습니다. 화원을 비롯한 부금(付金), 금박(金箔), 칠, 각수(刻手), 마조(磨造), 소목(小木) 등 일련의 목조불상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업무 분야가 적혀 있는 보기 드문 자료입니다. 당시 관아에 소속된 장인들이 이 일을 했을 것이며, 여기에 언급된 업무 분야는 <경국대전>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원으로 불린 승려들
승려 장인에게 공식적인 직함은 없었던 듯하나 불상의 발원문이나 불화의 화기에는 ‘화원’으로 기록된 사례가 많습니다. 본래 화원은 조선시대에 그림에 관한 일을 도맡아 하는 도화서 소속 관원을 이르는 호칭입니다. 승려 장인은 조선 전기에는 도화서 화원과 함께 왕실 불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관영 수공업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에는 실력을 인정받아 궁궐과 성곽 건축을 비롯한 국가의 토목 사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승려 장인 이름 앞에 어떤 까닭으로 화원이라는 호칭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화원이라는 호칭은 승려 장인이 국가의 공식적인 일에 참여하여 ‘화공승(畵工僧)’, ‘국화승’, ‘화승’ 등으로 불렸던 일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석조지장보살좌상(보물)이다. 높이 33.4cm의 작은 불상으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돌을 깍아 만든 석조불상으로 몸체는 뚜껍에 도금하였으며 대좌에는 붉은 빛 칠을 했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목은 짧으며 다리와 양손을 작게 표현하고 있다. 바위형태 대좌 뒷면에는 불상의 조성경위, 시주자, 제작연대를 밝혀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8. 절학 등 승려 장인이 만든 지장보살, ‘정덕십년’이 새겨진 석조지장보살좌상, 절학 등 2명, 조선 1515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조선 전기인 1515년 승려 장인으로 추정되는 화원 ‘절학’과 산인 ‘신일’이 함께 만든 지장보살상입니다. 한 덩어리 돌을 깎아 울퉁불퉁한 암석 모양 대좌 위에 앉은 지장보살을 표현했고 뒷면에 조성기록을 새겼습니다.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은 조선 전기 지장보살상의 특징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는 사찰에 필요한 상당수의 것들을 승려 장인이 만들었는데, 조선 전기부터 승려 장인들이 활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의 해체.수리과정에서 탑신,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발견된 묵서에 따르면 성종 때 처음 발원하여 불상들이 조성되었으며 인조 6년 인목대비가 발원하여 조성한 불상이 추가로 납입되어었다고 한다. 탑이 중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9. 수종사 석탑에 봉안된 서로 다른 시대의 불상,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나온 금동불좌상, 조선 15세기 1628년, 불교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 금동석가여래삼존좌상, 15세기>


<2. 금동불.보살좌상, 성인, 1628년>

이 작은 금동불들은 1483년과 1628년에 왕실 여인들이 발원하여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안에 봉안했습니다. 1583년에 봉안된 석가여래삼존좌상은 제작자는 알 수 없지만, 태종의 후궁이 시주하고 성종의 후궁이 발원했습니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글에는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면서 금동석가여래좌상을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1628년의 불상들은 인목대비가 발원하고 조각승 성인이 제작했습니다. 조각승 성인은 1622년 광해군 비인 장렬왕후가 발원한 왕실 불사에도 참여했습니다. 둥글고 통통한 얼굴과 미소 띤 표정, 목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를 구부려 웅크린 자세가 앞서 봉안되었던 석가여래삼존좌상과 다릅니다. 같은 탑에서 나온 불상이지만 서로 다른 시기의 불상양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은 종로구 창신동 지장암 대웅전에 있던 불상이다. 높이 117.6cm의 중형 목조불상이다. 광해군의 비 장렬왕후를 비롯하여 왕실 여인들이 발원.시주하여 조성한 불상이다. 조성내력이 적힌 발원문 등에 따르면 당대의 고승과 승려 장인들이 참여한 걸작이다.

<10. 왕비의 부름으로 현진을 비롯한 전국의 승려 장인이 만든 불상,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현진 등 17명, 조선 1622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광해군 비인 장렬왕후가 발원하여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히기 위해 제작한 불상 열한 구 중 하나입니다. 자수사와 인수사는 왕실 여인들의 말년 출가 수행처로, 권래에 있던 내불당과 달리 궐 밖에 있었습니다. 이 불사를 위해 현진, 응원, 수연, 법령을 비롯한 조각승 열세 명과 철을 다루는 승려장인 네 명이 모여 공동작업을 펼쳤습니다. 이 가운데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으로 평가받는 현진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로 남은 조각가 영장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현진, 응원, 수연 등 조각승 집단을 이끄는 거장들이 협업하여 왕실 사찰의 존상을 만든 사례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왕실의 부름을 받다.
조선은 성리학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지만 왕실은 여전히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세의 평안을 빌기 위해 불교에 의지했습니다. 조선 전기 왕실 불사(佛事)는 도화서 화원과 관청 소속 장인, 주지나 대선사(大禪師)를 지낸 비중 있는 승려 장인이 참여한 것이 특징입니다.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승려들은 점차 사회적 입지를 강화하고 경제력을 키워갔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승려 장인은 왕실 발원 불사를 도맡게 되었습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17세기 전반에는 승려들의 총대장이었던 벽암 각성(1575~1660년)이 왕실의 부름을 받아 전국에서 모인 승려 장인을 이끌고 광해군의 비 장렬왕후가 발원한 자수사와 인수사 불사를 감독하기도 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왕실 불사를 맡아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한편 조선의 사찰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가꾸어 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11. 불상을 만드는 바람이 담긴글,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조성 발원문, 조선 1622년, 비단에 붉은 먹,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왕실 여인들의 말년 출가 수행처였던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할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며 남긴 바람이 담긴 글(발원문)입니다. 이 글에 따르면 불사의 재원은 왕실 재산인 내탕금으로 마련했고, 뛰어난 장인을 모집해 불상 열한 구와 불화 일곱 폭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발원문 마지막 부분 상단에는 불사가 교리에 맞춰 진행됐는지를 확인하는 증명 역할에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존경받언 고한 희언과 벽암 각성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불상을 조각한 화원 13명과 철을 다루는 승려 장인 4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상 안에서 나온 신성한 물건들,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복장물, 조선 1622년 무렵, 국립중앙박물관, 보물><1. 후령통과 오색실>


<2. 다라니>


<3. 오천오백물명신주재장밀죄경>

<3. 오천오백물명신주재장밀죄경>

<3. 오천오백물명신주재장밀죄경>

<4. 대방광불화엄경소>

12. 불상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복장물은 불상 조성의 역사도 보여주는 소중한 타임캡슐입니다. 불복장의 핵심인 노란 보자기에 싸인 후령통과 경전을 비롯한 다라니 수백 장으로 이 불상의 내부가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5,500명의 부처 이름과 신비한 주문으로 죄를 없애게 한다는 <오천오백불명주제장멸죄경>은 고려대장경을 다시 인출하여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화엄경> 주석서인 <대방광불화엄경소>는 불상 조성 이후인 1629 ~1631년에 연천 용복사에서 만든 목판을 그대로 찍은 것으로, 불상을 만든 다음에 다시 넣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름무늬가 있는 감색 비단으로 표지를 감싸고 다섯개의 구멍을 뚫어 붉은 실로 묶었습니다. 이외에도 <묘법연화경>과 그 주석서인 <묘법연화경요해서>와 같은 경전이 불상 안에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의 타입캡슐: 화기와 발원문
수천 명이 넘는 승려 장인의 흔적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불화 화면 아래에 적은 ‘화기(畵記)’와 불상 안에 넣어 둔 ‘발원문’에는 제작자인 승려 장인을 비롯한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 그리고 그들의 바람이 적혀 있습니다. 화기와 발원문은 보통 불사에 재정 지원을 한 사람들의 명단인 시주질(施主秩)과 승려 장인을 포함하여 제작 실무를 담당한 사람 명단인 연화질(緣化秩) 등으로 구분해서 기록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직접 손으로 만든 작품 속에 이름 두 자로 삶의 흔적을 남겼고, 마치 타임캡슐처럼 조선 역사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이 불사를 주도했던 조선과는 달리 중국과 일본에서는 전문 장인이 제작하였다. 이들 출가한 수행자가 아니고 혈연관계나 사제관곌르 통해 기술과 명성을 이어온 장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오늘날까지 이런 장인집단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불화는 화려한 색채감이나 섬세한 세부표현이 돋보인다.

<명나라 황실에서 조성한 영혼을 위로하는 불사, 수화, 중국 명 1454년, 비단에 색,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13. 수륙화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외로운 영혼을 구원하는 불교 의식인 수륙회(水陸會)에 사용한 불화입니다. 각 폭에는 부처와 보살, 나한, 명왕, 천중(天衆)과 신중(神衆)을 비롯해 옛 제왕과 문무관, 민가의 여러 영혼이 구름을 타고 의식 공간에 강림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수륙화는 1454년에 중국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황제 전용 가구를 제작하던 여용감의 태감(환관) 상의와 왕근 등이 감독하고 조성했습니다. 명나라 황실 내부에 공식적인 궁정 화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인지전이나 무영전 등에 궁정화가를 두고 황실과 조정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이 그림은 불법을 지키는 여러 수호신을 그린 것입니다. 밝고 화사한 색감과 더불어 황실 발원 불화답게 섬세한 인물묘사가 돋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가마쿠라 시대(13세기) 가이케이파 양식을 따르고 이는 목조아미타여래 입상은 경주 백율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8세기)와 크기나 형태 등에서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14. ‘가이케이(快慶)’ 양식을 보여주는 불상, 목조아미타여래입상, 일본 가마쿠라시대, 13세기, 일본 도쿄박물관>

<경주 백률사 약사여래입상(국보), 8세기>

일본 카마쿠라 시대 게이파(慶派) 불사의 계보를 잇는 가이케이의 ‘3척 아미타’양식을 충실히 따른 목조아미타여래 입상입니다. 가이케이는 자신이 만든 1미터 남짓의 아마타여래입상에 법명인 ‘안아미타불(安阿彌陀佛)’을 마치 서명처럼 사용하여, “교장안아미타불 가이케이(솜씨가 교묘한 장인 안아미타불 가이케이)”라는 묵서를 남겼습니다. 이 상도 왼쪽 발 아래, 상을 대좌에 고정하는 부분에 흐릿한 묵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케이가 만든 다른 상보다 크기가 약간 작으면서, 둥글고 사실감이 떨어지는 얼굴 표현 등으로 보아 가이케이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게이 파의 다른 장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이웃 나라의 불교미술 제작자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존속한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황실이나 민간 발원 구분없이 화사 혹은 화공이라 불리는 전문화가가 불화를 그렸습니다. 불상도 주로 전문 장인이 제작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예부터 불상을 제작하는 장인을 ‘불사(佛師)’라고 불렀고 최고의 불사에게 승려 직위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불사는 혈연과 사제 관계를 바탕으로 기술과 명성을 이어간 장인에 가까웠고 조선의 승려 장인처럼 출가한 수행자는 아니었습니다. 사찰에 필요한 상당수의 기물을 승려 장인이 직접 만든 문화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만의 독자적인 문화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 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조선의 승려장인
1. 승려장인은 누구인가?
승려 장인은 불교의 신앙 대상을 비롯하여 건축, 불구(佛具) 또는 장엄물 등 사찰에 필요한 것들을 만드는 전문 기술을 갖춘 출가 수행승을 말합니다. 승려 장인의 전통은 성스러운 존재를 형상화하여 스스로 수행함과 동시에 중생 구제를 추구하는 불교 특유의 사상과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승려 장인의 활동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가에는 승려 장인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찰에 필요한 기물 대부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승려 장인은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그중에서도 예배의 중심인 불상을 조성하는 ‘조각승’과 불화를 그리는 ‘화승’이 법맥을 이어 가듯 자신들의 계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승려 장인들은 선배들이 일구어 낸 표준화된 조형 양식의 기반 위에서 각자 개성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의 색채가 뚜렷한 불교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수행승이자 예술가
승려 장인은 깨달음의 길을 걷는 출가 수행승인 동시에 사찰에 필요한 기물을 만드는 전문 기술자라는 서로 다른 두가지 정체성을 지닙니다. 승려 장인 중에는 사찰의 주지로 있거나 대선사(大禪師)의 위치까지 올라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이도 있었습니다. 불상이나 불화를 조성할 때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는 증명의 역할도 겸하며 높은 경지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불상과 불화의 상징성을 극대화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종교적 위엄을 갖춘 이상적 모습의 불상과 불화를 만들지 고민하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사찰에 필요한 불사에 임하는 정성 어린 태도와 숙련 과정은 수행자로 하여금 장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