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景福宮, 사적)은 1395년(태조4)에 가장 먼저 창건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경복궁은 궁궐배치의 기준이 되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원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3문3조(三門三朝)’의 원칙에 따라 국왕의 생활공간인 연조(燕朝), 국왕 집무공간인 치조(治朝), 신하들이 집무공간인 외조(外朝)가 담장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 국가적인 행사를 치르던 정전인 근정전,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던 편전인 사정전, 왕의 침전인 강녕전,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잇는 중심 영역을 주축선으로 건물들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을 꾀하였다.
- 경복궁 외조(外朝), 광화문과 궁궐담장, 망루인 동십자각과 출입문들
- 경복궁 외조(外朝), 흥례문과 근정문(보물) 영역
- 경복궁 외조(外朝), 궐내각사와 수정전(보물)
- 경복궁 치조(治朝), 정전인 근정전(勤政殿)과 조정
- 경복궁 편전(便殿), 국왕의 집무공간인 사정전(思政殿) 일원
- 경복궁 침전(寢殿) 강녕전과 교태전, 국왕과 왕비의 생활공간
- 경복궁 동궁(東宮) 영역, 세자가 거처했던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
- 경복궁 자경전(慈慶殿,보물), 대비의 침전
- 경복궁 아미산굴뚝(보물)과 자경전 십장생굴뚝(보물)
- 경복궁, 흠경각(欽敬閣)과 함원전(含元殿)
- 경복궁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후궁들이 거처하는 영역
-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국보)와 연못, 국왕이 개최하는 연회가 열렸던 공간
- 경복궁 후원, 향원정(香遠亭)과 열상진원 샘
-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후원에 세운 이궁(離宮)
-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일원, 고종이 서재로 지은 건물
- 경복궁 태원전(泰元殿) 일원,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
창덕궁(昌德宮, 사적)은 1405년(태종5)에 지어진 궁궐로 상왕이 거처할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창덕궁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는데, 광해군대에 복구하여 경복궁을 대신하여 법궁역할을 했던 궁궐이다.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 불리웠으며, 궁궐격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연지세에 순응하여 편안한 느낌을 주는 궁궐로 조선시대 국왕들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이다. 창덕궁은 오랜 세월 동안 화재 등 크고 작은 사건으로 건물들이 소실.중건되기도 했지만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궁궐로 1997년 후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창덕궁 외조(外朝), 돈화문에서 인정문까지
- 창덕궁 외조(外朝) 궐내각사, 국왕을 보필하던 직속 관청들
- 창덕궁 정전(正殿), 인정전(仁政殿, 국보)과 조정(朝廷)
- 창덕궁 편전(便殿), 국왕의 업무공간 선정전과 희정당
- 창덕궁 침전(寢殿), 국왕의 생활공간 대조전(보물) 일원
- 창덕궁 동궁, 세자 서연(書筵)이 열렸던 성정각과 관물헌
- 창덕궁 낙선재(보물) 일원, 조선왕실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거처했던 궁궐 전각
- 창덕궁 선원전(보물 ) 일원, 역대국왕의 어진을 모신 전각
- 창덕궁 후원, 부용지와 주합루 그리고 영화당
- 창덕궁 후원, 애련지(愛蓮池)와 의두합(倚斗閤)
- 창덕궁 후원 연경당,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공간
- 창덕궁 후원, 존덕정과 폄우사
- 창덕궁 후원, 옥류천(玉流川) 일원
창경궁(昌慶宮, 사적)은 조선 세종때 태종이 거처하던 곳에서 유래하여 성종 때 대비들을 모시기 위해 본격적으로 조성된 궁궐이다. 그후 임진왜란때 경복궁, 창덕궁이 불타고 왕이 임시로 거처함에 따라 궁궐로서 본격적으로 기능을 했다고 한다. 주로 대비와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일제시대때 동물원, 식물원이 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 창경궁 외조(外朝), 홍화문(보물)과 명정문(보물)
- 창경궁 치조(治朝), 정전인 명정전(국보)와 조정(朝廷)
- 창경궁 치조(治朝), 편전인 문정전과 숭문당, 함인정
- 창경궁 연조(燕朝), 침전인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보물)과 양화당
-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 후궁들의 거처
- 창경궁 후원, 춘당지와 관덕정
덕수궁(德壽宮, 사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으면서 궁궐이 되었다. 구한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크게 중건하면서 많은 전각이 들어섰다. 현재의 건물들은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것을 중건한 것이다. 덕수궁에는 석조전을 비롯하여 중명전, 정관헌 등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크게 훼손되었으며, 그 영역 또한 1/3로 줄어들었다.
- 덕수궁 외조(外朝), 대한문에서 중화문까지
- 덕수궁 치조(治朝), 정전인 중화전과 조정(朝廷)
- 덕수궁 편전(便殿), 국왕의 업무공간인 석어당, 즉조당과 준명당, 덕홍전
- 덕수궁 침전(寢殿), 국왕 거처인 함녕전(보물)
- 덕수궁 석조전과 서양식 정원
- 덕수궁 정관헌, 고종이 다과를 즐기던 정자 기능을 하던 건물
- 덕수궁 중명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 경운궁(덕수궁) 양이재, 구한말 황족 교육을 전담한 수학원 건물
경희궁은 조선후기 서궐로 불렸던 큰 궁궐이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허물졌다. 정전인 숭정전 건물은 동국대로 옮겨져 법당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출입문인 흥화문은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흥화문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일부 전각들을 복원하였다.
잠저(潛邸). 조선시대 궁궐밖 사가(私家)에서 머물다 즉위한 왕으로는 영조를 비롯하여 인조, 철종, 고종 등이 있는데 이들이 머물렀던 곳을 잠저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잠저 중에서는 철종의 잠저인 강화 용흥궁과 운현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 운현궁 노안당(老安堂), 흥선대원군이 거처했던 구한말 정치의 중심지
- 운현궁 노락당(老樂堂)과 이로당(二老堂),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
- 운현궁 양관(洋館, 사적), 일제가 흥선대원군 일가에 지어준 서양식 저택
- 강화 용흥궁(龍興宮),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
행궁(行宮)은 국왕이 궁궐을 떠나 전국 각지를 순행할 때 임시로 머무는 거처를 말하며 행재소(行在所)라고도 한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국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물렀던 곳은 많았겠지만, 행궁으로 규모를 갖추었던 곳으로는 세종이 치료를 위치 찾았던 온양 행궁,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의 이유로 설치했던 강화와 남산산성의 행궁, 정조가 능행과 정치적인 이유로 세웠던 화성행궁이 잘 알려져 있다.
- 수원부(水原府) 관아, 화성행궁(사적) 봉수당과 장락당
- 광주 남한산성 행궁(사적), 광주부 관아에 설치된 국왕의 임시 거처
- 강화부(江華府) 관아, 동헌(東軒)과 강화행궁
- 북한산성 행궁지(사적), 국왕의 임시 거처인 양주행궁 터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왕실에서 전해내려오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경복궁 광화문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궁박물관은 1908년 창경궁내 황실박물관에서 출발하였으며, 2005년 경복궁 내 옛 중앙박물관에 ‘국립고궁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물관은 ‘조선 국왕’, ‘조선 궁궐’, ‘왕실생활’ 등 다양한 분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제왕의 학문’이라는 천문학관련 유물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국보)가 이 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고궁박물관은 조선왕실과 제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박물관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며, 세계각국의 고궁박물관들과 연계하여 다양한 특별전시회가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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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자금성(紫禁城)은 명.청시대 국가를 상징하는 정궁이다. 궁궐 규모로는 둘레 약 4km, 건물은 9999칸으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주례고공기에 따라 지어진 궁궐로 치조인 태화전 영역, 내조인 건청궁과 이궁인 영수궁, 후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과 건물배치는 거의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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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이화원(颐和园)은 청나라 건륭제가 여름 별궁으로 지은 공간으로 자금성에서 북서쪽으로 19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곤명호수를 중심으로 궁궐전각, 티벳라마교 사원, 정자 등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세말 서태후가 크게 확장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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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안에 있는 대명궁(大明宮)은 당 고종 때(662년) 처음 지어져 220년 동안 당나라 황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당나라 초기에는 장안성 안에 있는 수나라 때 정궁으로 지은 태극궁을 사용했으나 습하고 벌레가 많아 이궁(離宮)으로 건설되었는데 당 고종 때 대대적을 수리하면서 정궁이 되었다. 당나라 말 황소의 난(875 ~ 884년) 이후 지방 병마절도사들의 반란으로 파괴된 후 황궁의 기능을 상실했다.
일본 교토 어소(御所)는 간무 천황이 746년 나라에서 교토로 수도로 옮긴 이래 메이지 유신으로 수도롤 도쿄로 옮기기 전까지 정궁(正宮)이었던 곳이다. 당나라 장안을 모방하여 교토를 건설하면서 교토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막부시대에 천황이 실권을 잃으면서 133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중국 자금성이나 경복궁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