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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팔달문(八達門, 보물), 수원화성 남문

수원 화성 남문인 팔달문(八達門, 보물)이다. 수원화성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한양도성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과 함께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성문이다. 잘다듬은 화강석 쌓아 홍예문을 만들었고, 그 위에 2층 문루를 올려 놓았다. 문루 앞면 5칸의 우진작기붕을 하고 있다. 문루는 조총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판벽으로 막혀 있는데, 조선후기 성문 문루의 특징이다. 바깥쪽에는 구운벽돌로 쌓은 높이 약5m의 옹성(甕城)을 두여 2중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옹성은 무너져 없어졌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으며, 성문 양쪽에 세웠던 좌.우 적대(敵臺)는 무너지고 지금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수원화성 팔달문(보물)>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북경을 비롯하여 청나라 성곽기술을 많이 참조하였는데 팔달문에서 그 특징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성문은 화강석을 쌓은 석성(石城)을 하고 있지만, 옹성은 벽돌로 쌓은 전성(塼城)을 하고 있어 수원 화성(華城) 축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조총과 화포가 일반화된 환경변화에 대응하여 쌓은 성문의 형태로 명.청대에 쌓은 중국 읍성의 성문과 비슷하다. 팔달문은 그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사통팔달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수원화성의 남문이자 정문의 역할을 했다. 서울을 남대문인 숭례문 주변에 남대문 시장이 있듯이 이 곳 팔달문에는 지동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팔달문이라는 이름은 서쪽편 팔달산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북경에서 제일 유명한 만리장성인 팔달령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옆에서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팔달문은 화강석으로 쌓는 전통적인 석축성과 구운벽돌로 쌓은 중국 전성의 특징을 같이 가지고 있는 수원화성 축성방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쪽에서 본 모습>

성문은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홍예를 만들고 그 위에 2층 문루를 올려 놓았다.

<옹성>

옹성은 화포와 조총이 일반화된 조선후기 성곽에서 볼 수 있는 방어시설이다. 팔달문 옹성은 중국 청나라 성곽기술을 받아들여 구운벽돌로 쌓아 올린 전성(塼城)이다. 성벽은 높이 5m 정도로 상당히 높은 편이며, 위에는 조총공격을 피할 수 있는 여장을 설치해 놓았다. 옹성 가운데에 출입문과 작은 문루를 올려 놓고 있다.

<벽돌로 쌓은 성벽과 여장>

<옹성 출입문>

<내부 팔달문 홍예>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았는데, 숙종대에 크게 보강한 한양도성 석축에 비해 돌을 세련되게 잘 다음었다.

<문루>

문루는 앞면 5칸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성문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도로 개방된 조선전기 성문 문루와는 달리 조총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판벽으로 막혀 있다.

<내부에서 본 모습>

<문루를 오르는 계단>

<팔달문 주변 도심>

팔달문은 수원화성 남문으로 정조가 현륭원으로 참배할 때 지나가던 문으로 수원 남쪽 경기남부지역과 연결된다. 정조는 수원에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의도적으로 상업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 팔달문 안팎으로 시장을 조성하였다. 지금도 주변에는 지동시장을 비롯하여 재래시장들이 들어서 있다.

<팔달문 부근 지동시장>

<팔달문 부근>

수원 팔달문(八達門), 보물,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역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18) 2월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19) 5월20일에 완공되었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보물 402호로 지정되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바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출처:수원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