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소산성 아래 옛 부여현 관아와 옛 부여박물관이 있었던 곳에 위치한 관북리유적(사적)이다. 이곳은 백제 왕궁터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과정을 통해 대형 전각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연못, 우물터, 기와로 만든 배수관 등이 확인되었다. 연못터에서는 백제시대의 기와 및 토기편, 목간, 짚신, 금동제귀걸이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진흙을 다져 포장한 도로와 왕실에 필요한 철기, 금속제품을 만들던 공방과 창고 등의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사비도성이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백제 왕궁의 위치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관북리를 비롯하여 여러 유적지를 발굴.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유추할 때 부여시가지 중심부 구아리 지역에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관북리 일대는 왕궁 부속시설이었다가 왕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대형전각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가 끝난 관북리 유적지 대형전각터를 제외하고는 큰 건물터는 없는 대신, 크고 작은 창고와 수조 등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부여 관북리 유적(사적)>
부소산성 아래 옛 부여현 관아가 있던 관북리 일대는 삼국시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 왕궁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국립부여박물관을 중심으로 관광지와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발굴조사를 하면서 옛왕궁터를 정비해 놓았다.
<부여 관북리 유적지 현황>
옛 부여현 관아가 있었던 곳을 중임으로 대형건물지를 비롯한 건물지, 창고터, 연못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이곳에는 백제의 사비시대를 대표하는 생활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옛 부여박물관 주변이 정비되기 전인 2010년 관북리 유적지>
<궁궐로 추정되는 건물터>
서쪽편에는 궁궐로 추정되는대형전각건물지가 발견되었고, 그 외 크고 작은 창고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수부(首府)가 새겨진 기와>
사비의 왕궁과 관아는 어디에 위치하였을까?
사비 왕궁의 위치는 관북리, 쌍북리, 부소산성 일대로 비정되기도 하였으나, 부여 시가지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구아리 정방형 평면구획’이 왕궁지였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성왕은 541년(성왕19) 사비에서 가야 서남부 소국들의 대표를 모아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왕궁과 같은 핵심건물은 완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 북쪽의 관북리 일원은 천도 전후에 왕궁의 부속시설이었다가 왕궁 확대과정에서 정비되었다. 지금까지의 발굴성과로 볼 때 관북리 일대의 저습지에 광범위하게 흙을 쌓아 대지를 조성하는 기초 작업은 6세기 후반에서야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부여박물관>대형전각건물지
동서길이 35m, 남북길이 19.25m로 2층 규모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주춧돌을 놓기 위한 흙다짐기초 부분이 36개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는 궁성의 중요 전각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보이며 백제 사비기 궁성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출처:부여군청>
<대형전각 건물지>
백제사비기 최대 규모의 건물터로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규모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당시 건물 유구 사진>
<건물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궁궐 전각 상상도>
<재현한 모습>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백제 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백제 왕궁.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일본 도다이지 건물처럼 우진각지붕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본 나라 도다이지 금당>
동양 최대의 목조건물인 일본 나라 도다이지 금당. 백제 기술자들이 세운 건축물로 당시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을 통해 백제 왕궁 건물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연꽃무늬 수막새, 관북리유적지 출토>
<얼굴무늬 토기 조각, 부여 관북리>
지하창고
창고는 이곳을 중심으로 6기가 확인되었는데 대체로 1.5~2m 이상 판 지하식으로 재료에 따라 목곽과 석곽으로 구분된다. 이 일대에 군집하여 설치된 창고는 백제왕실에 공급하던 식자재 창고이며 이곳이 백제왕궁터와 밀집한 관련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출처:부여군청>
<관북리 유적지 입구에 복원해 놓은 목곽창고>
목곽창고
창고에서는 당시의 식물체가 출토되었는데 참외, 다래, 복사나무, 살구, 수세미, 오이 등의 원예작물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창고시설들은 이러한 식물체를 보관하고 저장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 창고시설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곡물을 저장하고 관리하기 위한 시설이다. <출처:부여군청>
<목곽창고 내부>
백제왕실에서 사용할 곡식이라 채소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4호 목곽창고
이 창고는 남북길이 4.4m, 동서길이 2.4m 규모의 목곽창고이다. 바닥면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뒤편에 긴 판자를 잇대어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창고 내부에서 많은 양의 토기와 ‘공(空)’자가 찍힌 기와와 호자(虎子)가 출토되었다. <출처:부여군청>
<4호 목곽창고>
대형건물터 앞에 위치하고 있다.
<목곽창고 발굴 사진>
1호 석곽창고
이 창고는 직사각경의 구덩이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규모는 남북길이가 5.2m, 동서길이가 1.8m이다. 내부에서 발견된 8개의 기둥자리는 지붕구조를 떠받드는 기능과 내부를 3칸으로 분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출처:부여군청>
<1호 석곽창고>
구덩이를 파고 작은돌로 석축을 쌓아 만들었다.
2호 석곽창고
이 창고는 남북길이 4.6m, 동서길이 1.6m, 최대깊이 2.2m 규모의 석축창고이다. 그 내부에는 나무기둥 흔적과 함께 많은 양의 토기편과 참외씨앗 등이 발견되었다. <출처:부여군청>
<2호 석곽창고>
<석곽창고 발굴사진>
<옛 부여박물관 서쪽 대형전각 건물지 주변>
기와깐 시설
남북 7.5m, 동서 7m의 장방형 대지에 기와를 한 겹으로 깐 시설이다. 기와 중에는 인장이 새겨진 기와, 연화문수막새, 소문수막새 등이 함께 덮혀있다. 이 유구의 기반층은 저습이이며 상부에 굵은 모래층이 일정하게 깔려 있어 방습시설로 보여진다. <출처:부여군청>
<대형 건물 뒷편에서 발굴된 기와 깐 시설>
<발굴 사진>
<유적지에서 출토된 기와조각>
<유적지에서 출토된 석재들>
장대석 유구, 방형초석 등이 있다.
1호 목곽수조
1호 목곽수조는 경사면 위에 흘러내린 지표수를 목곽수조에 유입시킨 후 기와를 사용해 만든 도수관로를 통하여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발견된 기와도수관로는 목곽수조로부터 17.5m 구간까지 잔존하고 있다. 사비기 가장 마지막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폐기되었다. <출처:부여군청>
<1호 목곽수조>
물을 공급하던 작은 수조이다. 발굴된 1,2,3호 목곽수조는 대형건물지보다 높은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 로마나 중세 이슬람 문화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급수시설과 비슷하다. 조선시대 왕궁에는 급수시설을 두고 있지 않다.
2호 목곽수조
이 목곽수조는 1호 목곽수조와 서쪽으로 12.6m 거리를 두고 1호의 물이 도수관로를 통하여 이곳으로 모이게 된다. 수조는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사각형의 형태로 구덩이를 판 후 한 변의 길이가 2.3m, 깊이는 0.8m 정도의 규모로 판자를 결구하여 만들었다. 입.출수관로는 암키와를 연결하여 깐 다음 그 위에 수키와를 여러겹 겹쳐서 관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암키와를 덮고 흙으로 메웠다. <출처:부여군청>
<2호 목곽수조>
3호 목곽수조
이 목곽수조는 사면 위로부터 유입된 물이 목곽수조안에 차올라 배출되는 구조이다. 장방형 구덩이를 파고 설치한 수조는 길이가 3.5m, 너비는 1.5m 크기의 목재를 결구하여 틀을 만들었다. 도수관로는 전체길이가 80m 정도로 추정되며 토수기와 두매를 맞대어 기와관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중간지점에는 T자형 접합부를 두어 물의 일부가 다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였다. <출처:부여군청>
<3호 목곽수조>
<1,2,3호 목곽수조 발굴사진>
<부여 석조(보물)>
백제 왕궁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보물). 사찰 입구에 놓여 있던 손을 씻고 샘물을 받아 먹던 기존의 석조와는 그 형태와 용도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工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가 형태를 하고 있는 이 석조는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사찰과 마찬가지로 성역화된 궁궐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던 유물이다. 국립부여박물관 중앙에서 볼 수 있다.
<석조>
부여 관북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또 다른 석조이다. 배모양을 하고 있는 이 석조들은 사찰 등에서 출토되는 석조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정원에서 볼 수 있다.
<수조>
관북리 유적지에서 발굴된 또 다른 수조. 백제 왕궁에서는 상당히 많은 수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로마나 이슬람 사원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불교를 받아들일 때 서역의 영향을 받은 부분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수조를 볼 수 없다.
<건물지 뒷편>
건물지 뒷편에도 많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목곽수조와 기와깐시설이 발견되었고 눈에 띄는 건물터는 발굴되지 않았다.
<대형건물지 동쪽>
대형전각건물지 동쪽으로는 지하창고, 연지(蓮池), 건물터, 공방건물터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백제왕궁 부속 건물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로 보이는 곳>
앞면 3칸 규모의 크지 않은 건물터이다.
연지(蓮池)
규모는 동서 10.6m, 남북 6.2m의 장방형 형태이며, 깊이는 1~1.2m로 주변에 5~6단의 가공된 석재를 이용하여 쌓았다. 연못의 북쪽에서 수키와를 이용한 배수관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연못으로 연결되는 입수시설이다. 또한 바닥에서 발견된 연꽃의 줄기와 뿌리 등으로 보아 백제시대 조경을 위한 시설물이며 백제시대의 기와 및 토기편, 목간, 짚신, 금동제귀걸이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처:부여군청>
<발굴된 위치에 복원해 놓은 연지(蓮池)>
이곳에 삼국시대 백제 생황유물들 다수 출토되었다고 한다.
<연지 발굴 사진>
<관북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정병>
예불을 올릴때 사용하는 정병으로 보인다.
<등잔, 그릇, 관북리 출토>
<뚜껑사발>
<전달린 토기, 접시>
<굽다리 바리, 뚜껑사발>
<자루솥>
<소조인물상, 연꽃모양 불상 받침, 소조인물상, 부여 관북리>
<일근’이 새겨진 거푸집, 사리함 뚜겅>
<도깨비얼굴모양 꾸미개>
건물지
이 건물지는 남북도로를 모두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설계된 건물지이다. 지붕재가 놓인 상태로 보아 네면이 모두 1칸씩으로 기둥구멍 직경이 1.3~1.5m로 비교적 크다. 건물평면 규모에 비해 기둥구멍이 큰 것으로 보아 높은 마루와 지붕을 꾸민 특수한 건축물이 있음을 보여준다. <출처:부여군청>
<연지 동쪽편 건물터>
건물규모가 크지 않고 높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백제 도성이었던 사비성이 도심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자 기능을 갖는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발굴 사진>
큰 규모의 기둥을 받치는 초석 흔적이 발굴되어 높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로
백제 사비도성의 도시계획방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구로서 너비 8.9m의 남북대로와 너비 4m의 동서소로가 확인되었다. 도로의 양측에는 배수를 위한 석축배수로가 있으며 도로의 노면은 점토로 다져 포장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도로유적을 통해 백제의 우수한 도시기반시설 축조 기술을 엿볼 수 있으며, 백제 사비도성이 오랜 기간을 준비하여 체계적으로 계획되고 건설된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출처:부여군청>
<도로 유적>
건물 왼쪽편에는 석축배수로가 있는 도로 유적이 발견되었다. 도로노면을 점토로 다져 포장해다. 한성백제기 시절부터 토축성 건설에 뛰어났던 백제의 토목기술을 잘 보여준다. 도로를 기준으로 왕궁영역의 경계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로 유적 발굴 사진>
와적기단건물지
백제공방시설이 폐기된 후에 다시 들어선 백제건물이다.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하여 전체규모는 확인 할 수는 없으며 잔존규모는 동서 9.5m, 남북 2.5m 정도이다. 기단은 암키와를 세로로 축조한 형태이며 건물지 내부에서는 백제토기, 중국청자편이 다량 확인되었다. <출처:부여군청>
<와적기단 건물지>
도로 동쪽편에는 공방건물로 추정되는 3곳의 건물이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중 와적기단을 사용한 건물지이다. 이곳에서 백제토기, 중국청자편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원래 공방시설이 있던 곳에 건물을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와적기단건물지 발굴 사진>
공방시설
백제왕실에 필요한 장신구를 제작하던 공방터로 이를 분석한 결과 금, 은, 구리, 철 등으로 밝혀졌다. 특히 금의 경우는 순금에 가까울 정도로 양질의 금속을 자체로 제작하였으며 은을 혼입하여 합금을 만들기도 하였다. 왕궁터인 관북리 일대에 대규모 공방 관련 유구의 조성은 이 지역에서 생산된 금속제품들을 왕실에 제공한 점을 보여준다. <출처:부여군청>
<공방터>
뒷편에는 왕실에 공급하던 귀금속제품을 제작하던 공방터가 있다.
철기제작소
동서 2.75m, 남북 3.7m 규모의 철기제작소이다. 철기가공 흔적으로 불에 탄 흙바닥과 숯, 재 등이 확인되었고, 시설로는 담금질하는 원통형 용기와 이를 연결하는 도수관, 노의 시설 등이 함께 확인되었다. <출처:부여박물관>
<공방 건물터 동쪽편 철기제작소로 추정되는 건물터>
유적지 동쪽편으로 아직 주택가가 남아 있는데 발굴조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공방지와 철기제작소 발굴사진>
도가니를 비롯하여 각종 도구들이 출토되었다.
<옛 부여현 관아 앞 관북리유적지>
<관북리 유적지에서 내려다 보이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도성 시가지>
왕궁터에서 남쪽 궁남지까지 주작대로가 연결되어 있고, 그 중심에 정림사지가 자리잡고 있다.
부여 관북리유적, 사적428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관북리유적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왕궁터이다. 그 동안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시대의 대형전각건물지, 연못, 목곽저장고, 석곽저정고, 공방시설, 도로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수부(首府)명기와, 5부(部)명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수부명 기와는 부여 관북리유적이 사비시대의 왕궁 및 주요기관의 핵심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출처:부여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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