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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박물관 특별전] 오래된 이웃 화교

인천시립박물관에서는 1914년 겨울 “오래된 이웃, 화교”란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이번 전시는 한국에 정착한 화교의 역사와 오늘날 한국 화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역사 이래로 중국 본토에서 국경을 넘어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많지만 이들을 화교라 부르지 않는다. 한국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청나라 오장경 부대를 따로 상인들에서 출발하며, 오장경은 한국 화교의 시조로 여겨진다. 이후 청나라와의 조약을 통해 화교상인들의 유입은 늘어났으며 산동성 출신들이 주로 이주하였다. 화교들은 인천을 거점으로 무역업 등에 종사하면서 전국 각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해방이후 각종 규제조치로 화교들이 쇠락하기도 했으나, 1990년대 중국과의 수교 이후 화교의 사회적 지위나 삶의 환경은 크게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교(華僑)란 본국을 떠나 해외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을 말하며, 1921년에 제정된 중화민국헌법에 따라 정의되 조례에는 ‘僑居國外國民’라 정의되어 있다. 화교가 언제 처음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말에서 남송대까지 북방민족의 침입을 피히 동남아시아로 이주해간 한족(漢族)들을 그 중심으로 보고 있다. 당시 한반도에도 많은 이주민이 있었지만 대부분 현지화되어 한국내 많은 성씨들이 이때 이주한 인물을 조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화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명나라와 청나라때는 서구의 식민지개척에 편승하여 많은 화교들이 이주하였으며, 일부는 화교왕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19세기 노예제 폐지와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노동력부족 등으로 많은 중국 하층민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하였다. 이때 미국을 비롯하여 식민지 각국으로 이주한 중국노동자를 비하해서 쿠리(coolie)라 불렀다.

인천시립박물관 특별전, 오래된 이웃 화교

중화가(中華街): 공간_차이나타운
인천역에 내려 첫 번째 패루 중화가를 지나면 차이나타운이 시작됩니다. 이곳에 중국인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비롯됩니다. 광동의 상인들은 한국에 파견된 청나라 오장경의 부대를 따라왔고, 곧이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면서 화교상인들의 유입은 늘어만 갔습니다. 결국 1884년 ‘인천지구화상지계장정’에 따라 ‘청관조계(淸館租界)가 형성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청관의 명칭은 ‘지나정(支那町)’ 그리고 다시 ‘미생정(彌生町)’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인천은 화교 진출의 거점으로 이용되었고, 화교는 전국으로 퍼져나가 우리 사이 곳곳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해방을 맞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이곳의 명칭은 현재의 선린동(善隣洞)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여러 제약 속에서 화교들이 빠져나가면서 90년대까지 이 지역은 점차 쇠락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최근 인천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다시 부흥하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서울과 경기 등지에서 방문한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거리고, 인천공항과 인천항을 통하여 많은 중국인들이 방문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첫번째 전시주제는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를 인천지역 화교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임오군란과 화교의 영입

임오계림사변과 오무장 사당.

임오군란을 계기로 화교가 인천을 통해 건너왔다고 하며, 당시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오장경을 화교의 시조로 여긴다.

임오계림사변(壬午鷄林事變), 1932년, 미야타 가이코츠(官武外骨)가 정리한 임오군란 관련 신문잡지기사를 임오군란 발생 50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것이다.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 현대, 1885년 고종은 임오군란을 평정한 오장경(吳長慶)의 공을 기려 부대가 주둔했던 옛 동대문운동장 인근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 1969년 명동에 있던 한성화교중학교가 연희동으로 이전되면서 이 사당도 함께 옮겨졌다. 한국 화교들은 오장경을 근대 화교의 시조로 여겨 매년 5월23일 제사를 지낸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임오군란 석판화, 1882년,

일본에서 보도용으로 제작된 다색판화. 1882년 구식군대의 반발로 시작된 임오군란은 일본세력 배척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일본 공사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인천을 통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차이나타운의 형성,

청일전쟁 석판화, 1885년,

청일전쟁은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전까지 조선에 대해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던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 위세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화교의 숫자도 급감하게 되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차이나타운의 형성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 복제).

구한말 개항장 인천을 통해 화교들이 들어오던 시기의 조약들이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1882년, 1882년 8월23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 된 통상조약으로 「고종실록」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조약으로 청 상인들의 내륙까지 들어오게 되어 조선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 1884년, 1884년 체결된 청국 상인들의 거주지역에 관한 조약. 이를 통해 오늘의 선린동 일대 구릉지대의 약 5천 평에 청국 조계가 설정되었다.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 복제), 1899년, 한중 양국의 우호.왕래.통상에 관한 조약으로 거류민의 보호와 무역허용범위, 주택.토지 임차와 관련된 내용 등이 규정되어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제물포항 각국조계도, 1880년대,

1880년대 후반에 제작된 제물포 각국조계의 계획도이다. 중앙의 일본조계를 중심으로 청국조계와 각국조계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제물포항 각국조계도(복제), 1893년,

지금의 북성동 일대 각국조계를 확장하기 위한 계획도이다. 확장하고 했던 땅은 3,565㎡로 혜관과 관련된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마련한 땅으로 보인다. 청국조계와 경계가 표시되어 있으며, 필지 별로 등급이 설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인천부지도(仁川府地圖), 1918년,

지금의 북성동 일대가 지나정(支那町)으로 표시되어 있다. 한일병합 이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새로운 정명(町名)을 만들었는데, 청관.청국 거류지로 불리던 곳을 지나정으로 개칭하였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인천시가안내약도, 1930년대 후반,

인천시가의 주요도로, 철로, 인천항 등을 간략하게 표시한 약도로, 지금의 북성동 일대를 미생정(彌生町)으로 표기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지나정에서 미생정으로 바뀐 결과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의 증가

화교의 인구변화


지나인 집단분포도, 대한제국기,

조선전도에 중국인 집단 분포도를 인원수만큼 지역별로 표시한 지도이다. 지역의 이름과 인구 표시 기호는 빨간색으로 표기하였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대련-조선-북해도 정기선 안내, 청도-인천-상해 관광안내 소책자

대련(大連), 조선, 북해도 정기선, 일제강점기, 대련~북해도 사이의 정기노선에 관한 안내서로 인천과 부산을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다. 정기선의 발착지와 노선도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 청도-인천-상해 관광안내 소책자, 일제강점기, 관광안내용 팸플릿으로 인천-청도, 인천-상해 간 해상노선이 개설된 경위와 관광코스 등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조선우선항로도 사진엽서, 화교영취소맥분상세표.

조선우선(郵船)항로도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한반도로 오는 가장 대표적인 루트는 대련 혹은 산동반도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화교영취소맥분상세표, 1942년, 인천화상상회(仁川華商商會)에서 중화민국 주인천영사분관에 발신한 자료. 밀가루 배급을 위탁받은 화상상회에서 교민들에게 배급한 내용을 보고하는 문서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청관거리 사진 (1920~30년대)

인화문(仁華門): 사람_인천 화교 사람들
인천에 자리잡은 화교들은 주로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품과 잡화를 팔았고,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통해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습니다. 1898년 의화단 운동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가까운 한국으로 피난을 와 화교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화교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한국인들과의 충돌도 많아졌습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적 배경이 달랐고, 일제의 이간책으로 여러 소요들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1931년 중국 길림성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충돌한 만보산 사건이 전해지면서 인천.서울.평양 등에서 화교에 대한 습격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교들은 잡화점, 비단가게, 양장점, 이발소, 요식업 등을 중심으로 점차 그 활동 범위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어지던 화교 사회의 호황은 해방을 전후로 막을 내립니다. 1948년 한국정부는 외국인 입국을 불허하면서 화교의 유입은 종식되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으로 중국과의 교역은 중단되었습니다. 이어 창고봉쇄령과 외화사용 규제로 화교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아. 1961년 내려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과 1970년의 외국인토지취득관리법으로 화농은 밭을 잃었고, 화상들은 점포의 크기를 줄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1998년 이후부터는 외국인의 부동산 관련 규제 완화, 영주권과 지방선거권 인정 등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인천 차이나타운 활성화 계획과 중국경제의 성장으로 화교사회가 재도약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130여 년의 화교 역사는 한국 근대사와 함께 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그들이 걸어온 세월을 실제 화교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보고자 합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두번째 전시는 인천에 정착해 살았던 화교들이 살아왔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oo 이야기
내 아버지는 산동출신 상인어었어, 의화단운동의 혼란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동북지방으로, 다시 토비와 마적을 피해 신의주로 이주해 왔지.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어. 신의주는 화상.화공.화농학교가 있었는데, 가업에 따라 화상학교에 진학하여 상인으로써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네. 내 나이 스무 해가 되던 땐가, 당시 화교상인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인천으로 옮겨왔고, 중국 본토와의 무역뿐만 아니라, 중화요리점에 채마밭에 사업들을 점차 키워나갔지. 그 때, 나 말고도 많은 화교들이 잡화점.양복점.이발소 등을 열었고, ‘쿨리’라 불리는 노동자들도 늘어만 갔어. 그러자 당시 일제하의 조선인들은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걱정이 많아지더군. 결국 만보산 사건이 터졌고, 화교들에 대한 습격 때문에 나는 군산으로 잠시 피신하기도 했지. 이때부터 화교단체의 조직돠 활동에도 힘쓰기 시작했다네. 그렇게 해방을 맞고,곧이어 6.25가 시작된 거야. 젊은 화교들 중엔 한국군에 참여해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는 녀석도 있었어. 내 조카도 그 중 하나였지. 중공군으로 위장하여 함흥에 갔던 녀석은 그 후로 소식을 알 길이 없네.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죽었다나… 전쟁이 끝나고, 전국 각지에는 화교들이 차린 음식점들이 생겨났네. 나 역시 요리점을 하던 차에 중화요식업조합에 참여했고, 여기서는 각지역의 화교업무를 처리하기도 했지. 이것들은 지역의 화교협회로 바뀌었고, 그 중에서 난 인천화교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옛 중화루 사진.

중화는 공화춘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이었다. 원래는 최초의 서구식 호탤에 대불호텔이었던 것을 1918년 청나라 상인들이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중화루(中華樓) 간판, 일제강점기,

1918년 뢰소정(라이샤오징)을 비롯한 청나라 상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로 알려진 대불호텔을 인수하여 중국요리 전문점 ‘중화루(中華樓)’를 개업하였다. 이후 급증한 산동출신 화교 상인과 노동자로 인하여 공화춘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 성장하였다. 아들과 손자를 거쳐 영업을 지속하다가 1970년대 초에 폐업하였고, 1978년 건물마저 철거되었다. 위쪽의 간판은 건물 박공 부분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아래쪽의 간판은 1층 입구 우측에 걸려 있던 것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 상인으로 성장하다.

인천화교협회를 비롯한 상업에 종사했던 화교단체 관련 문서들이다.

인천중화상회 외교문서, 1931년, 인천화교협회의 전신으로 중국 국민당의 지도를 받던 인천중화상회의 외교문서이다. 조선화상무역조합, 1945년, 조선화상무역조합(인천부 미생정 8번지)의 업무관련 서류집으로 1942~1945년의 내용이 담겨있다. 인천화상해산(海産)조합장정, 1937년, 해삼물 수출무역에 종사하던 화상들이 모여 만든 인천화상해산조합의 규정집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 기업 관련 각종 자료

인천화상 동순동고빈유한공사 주식장부첩, 1935년, 동순동고빈유한공사에서 주주 한봉명에게 발급한 주식장부첩이다. 화상 동순동 주식회사 증권, 1934~1935년, 인천의 화상 동순동이 만든 고빈유한공사에서 주주에게 발급한 증권이다.

1942년 화교 세대별 직업분포와 관련기사

화교 삼도(三刀).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고기칼과 채소칼, 양복점에서 쓰는 재단가위, 이발소 면도칼인 체도를 말한다. 화교들은 이 세가지 칼을 바탕으로 중화요리점, 양복점(세탁소), 이발소를 운영하며 현지에 자리잡았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이발도구 세트, 재단가위, 육도, 월병틀,

차이나타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중국 과자 월병을 만드는 틀, 추석날 밤 월병을 빚어 달에 바친 다음, 친척과 친지들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배추(결구백채)의 도입을 장려하는 전단지.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배추는 이때 도입된 종자라고 한다.

결구백채 재배법 전단지, 1940년대, 우리주변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채소인 배추는 원산지가 중국으로 결구백채(結球白菜)라 한다. 화교들은 고향에서 이 백채를 가져왔고, 조선총독부의 장려정책으로 지금은 김치를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재료가 되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인천지역 화교 명부 자료

인천화교 세대별 명부, 1942년, 화상들의 영업점을 중심으로 구성원의 인적사항을 기재함과 동시에 세대별 사항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화교구성원 전반을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여한화상전화번호부, 1972년, 전국화교의 전화번호부이다. 각종 긴급신고 및 주요전화를 시작으로 한성특별시의 사관교단, 잡화상, 한의원, 기타, 부도색인, 주택이 각 도(道)로 나누어져 정보가 기입되어 있다. 이들 정보는 모두 상호, 대표, 전화, 주소로 나누어진 표에 쓰여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밭에 감자며 배추를 도적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 소작인인 중국인 왕서방이었다. ” – 김동인의 “감자” 중 –

‘짱꼴라’는 원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중국놈이라는 뜻으로 ‘청국노(淸國奴, 잔코로)라 부르던 것에서 변한 것이다.

‘짱깨’는 중국 상인이나 점포 주인을 ‘장꿰이(掌櫃)’라고 부르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 신작로 닦아 놓으니 왕서방이 먼저 지나간다.

일제강점기 화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김동인의 소설 『감자』.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왕서방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배금주의자이자 호색한으로 묘사되고 있다.

화교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묘사한 대중가요와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

배금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짱개’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돈상자.

장궤(掌櫃), 일제강점기, 화교들이 사용하던 돈괴. 중국인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는 ‘짱깨’라는 말은 이 물건의 중국발음 ‘장꾸이’에서 온 것으로 이 돈괴를 맡은 사람, 즉 상점의 지배인을 뜻하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경계의 사람

참전용사증서

한국전쟁 당시 많은 화교들이 참전했으나 화교라는 신분상 제약으로 이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참전용사증서, 1999년. 화교신분을 유지하던 김성정씨의 경우 한국으로의 귀화를 선택하고서야 참전용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참전화교들은 공식 기록이 없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참전위령비 하나 받지 못했다. 포장 수여식 사진과 포장증, 1973년, 한국전쟁에 참여한 몇몇 화교들은 그 공로가 인정되어 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화교신분인 관계로 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일부 전쟁에서 부상당한 화교의 경우 치료비를 자비로 해결해야만 했다. SC지대 참전략사,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한국전쟁 당시 사진

SC지대 대원사진, 국내 화교 참전부대인 4863부대 SC지대 김성정씨와 사촌동생 김정의씨의 사진이다. 이 중 김정의씨는 전쟁당시 공작활동을 위해 낙하산을 타고 적 후방에 침투한 뒤 실종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남한 포로 송환을 환영하는 화교들, 인천 화교 각 단체에서 남한 포로 송환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 필름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혼인증서와 인천화교협회 공문

화교등기증, 중화민국 영사관에서 발급한 화교여권

진oo 이야기
내 어릴쩍 이야기부터 해불꼐. 내 어머니는 한국인, 아버지는 화교였지 집안 생활은 여느 한국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어. 다만 집 안에는 관우사당이 있었고, 8살이 되던 해에 화교학교로 진학했을 뿐이야. 이때 내 기억은 아름답지만은 않아. 아버지는 중국말을 하는데, 어머니는 한국말을 해. TV드라마는 한국말을 하는데, 학교에서는 대만교과서를 배운단 말이야. 또 학교를 다녀올 때면 우리 교복을 보고는 다른 한국 애들이 맨날 놀리는 거야. 결국 부모님은 남고 나만 대만으로 갔어. 근데 거기선 또 나를 외성인(外城人)이라 그래. 대만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 그런데 그 와중에 집안 사정은 점차 나빠졌더라고. 한국 정부는 한국경제를 농단한다며 화교 수십명을 감옥에 집어넣질 않나, 화물과 재산을 몰수하질 않나… 그나마 여윳돈이 있던 사람들은 중국집을 차렸지만, 난 뭐.., 가진 것도 없고 화교학교는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지, 취직은 안되지, 결국 중국집 배달을 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온거야.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학교에 진학하다.

화교학교 교과서와 공책, 졸업장 등.

한성화교중학교는 지금 연희동에 자리잡고 있으며, 연희동.연남동 일대에 화교들이 많이 거주한다.

화교학교 교과서, 1990년대, 한국 화교 학생들을 위한 대만교과서로 1990년대에 이용되었다.한성화교학교 공책, 광복이후, 한성화교중학교에서 사용하던 공책으로 대해(해서의 큰 글자)와 작문을 연습하기 위한 것이다. 국어 과본, 1960년, 대만교육청에서 발한한 것으로 인천화교중산중학교의 교과서로 추정된다. 대만에서 교과서를 받아와야 했기때문에 그 수가 맞지 않아 제본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화교학교 졸업장, 인천화교소학교와 인천화교중산중학교이 졸업증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학교 모자, 학생수첩(1978년), 주판

관우사당(재현), 화교들은 가정에 관우를모시는 사당을 두었다고 한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함께 촉나라를 세운 실존 인물이다. 송대 이후 무신(武神)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상업을 수호하는 재물신 불교의 호법신, 마귀를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는 의신(擬神) 등으로 받들어진다. 많은 화교들이 재물과 벽사를 관장하는 관우를 가신(家神)으로 모신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결국 중국집

화교의 주요 규제.

해방 이후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 화교에 대한 차별적인 조치들이 많이 시행되었으며 이런 상황때문에 한국내 화교들은 동남아시아 화교에 비해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중국집 식기류와 공화춘 젓가락, 차주전자, 공화춘부채,

1905년 건립된 공화춘은 짜장면을 최초로 팔기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공화춘은 자리를 옮겨 계속 운영되고 있으며, 원래 자리는 짜장면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중화음식업 동업협정 가격표, 1945년 이후,

중화요식업총회 경기도지부에서 발행한 중화음식업 동업협정 가격표로 음식 종류에는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있다.

선린문(善隣門):이웃, 그리고 변화
한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화교는 중국 산동성 출신이며, 여전히 산동 사투리를 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의 정책에 갇혀 대만 국적을 지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교 이주민의 대다수는 남성이었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 여성들과 결혼하였습니다. 이로써 중국 본적과 대문 국적으로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된것입니다. 화교가 자리잡은 지도 1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화교들은 이제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되었고, 지금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계속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말하는 것, 먹는 음식, 생각하는 것까지 한국 사람과 구별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이들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가장 큰 이유는 모국어와 화교학교 교육이겠지만, 한국 사회의 차별과 한국인의 배타적 성향도 못지않은 이유로 말해집니다. 세번째 패루는 인천 차이나타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선린문(善隣門)입니다. ‘좋은 이웃’이란느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곳의 지역 이름과도 같은 뜻입니다. 그 이름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선린문이라고 한다.

세번째 전시는 중국과의 국교 수교 이후 나아진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화교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강oo 이야기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태어난 나를 사람들은 6.25세대로 부릅니다. 전쟁통에 태어났냐고요? 아니 아니, 화교가정 대부분의 어머니는 한국인이라 세대를 거쳐~ 거쳐 중국 화교의 피는 6.25%만 섞였다는 뜻이랍니다. 화교소학교에 들어갔지만 일반 중고등학교를 졸업해 중국어보다는 한국어가 편하고, 또 친구들처럼 걸그룹을 좋아하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일 뿐입니다.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 부모님은 중국집을 경영했지만,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보따리상을 하였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으로는 그 무렵부터 여러가지가 좋아졌다 합니다. 내가 열 살 무렵인가? 외국인은 땅도 갖지 못하게 했던 게 없어지고, 중학교 무렵에는 영주권도 인정받게 되었답니다. 저 고등학교 때는 지방선거권도 인정받았어요. 내가 살던 차이나타운은 활성화 계획이 잡히면서 관광객도 많아졌지요. 덕분에 우리집 수입도 늘어갔습니다. 하지만 계속 화교로 지내기엔 어려움이 많더라구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인턴원서를 내려 했지만 인터넷 접수창에는 주민등록번호만 넣을 수 있을 뿐 외국인등록번호를 적어봐야 오류라고만 나옵니다. 중국어는 능숙하지만 깡통여권을 가진 나는 출입국도 쉽지 않아 회사에서 원하질 않구요.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취업을 위해서도, 대학에서 만난 여자친구와의 미래를 위해서도 귀화를 선택했고, 지금은 유통회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 땅에 남아 가정을 꾸릴 계획이지만, 형은 미국으로 동생은 대만으로 이민을 갔어요. 그런 게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 누가인가요?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

화교신분에 대해 정의한 중화민국헌법(1912)와 중화인민공화국 관련 법률. 출생보고표, 외국인사항신고서(사본)

중화민국헌법(사본), 1912년 제정된 중화민국헌법에 따라 제정된 화교신분증명조례에서는 화교를 ‘僑居國外國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귀교교권권익보호법(사본),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의해 제정된 화교 정의.

교외국외적 중국인(僑居國外的 中國人), 바이두(百度),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

대만여권(왼쪽)과 화교들이 사용하는 깡통여권(오른쪽).

신분증번호가 없어 한국 화교들은 대만인들이나 한국인들이 받는 무비자 입국 혜택이 없다고 한다. 

깡통여권, 화교들에게 대만 여권은 두가지로 나뉜다. 대만에 호적이 있으면서 신분증번호가 있는 여권과 호적이 한국 등 다른 나라에 있어 신분증번호가 없는 여권이 그것이다. 무비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신분증 번호가 있는 여권일 뿐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과거 입학식과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이면 먹던 ‘짜장면’. 이 음식은 이제 남쪽 끝 마라도에서도 볼 수 있는 한국인이 가장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 ‘짜장면’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을 우리는 ‘화교(華僑)’라 부릅니다. 이들이 우리사회에 들어온지도 130여 년이 지났지만, 사실 화교란 단어가 대주에게 익숙해진 것은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단지 중국인이라 칭해고, 그보다는 ‘되놈’, ‘짱꼴라’로 더 많이 불렀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낯선 이방인이었고,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화교에게 관심 갖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골목에서 무언가 다른 말을 하는 무리와 마주치면 서로를 피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걸까요? 왜 자기 나라인 중국이 아니라 한국 땅에서 살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이땅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중국인’이라는 다수에 속해 있으면서 한국사회 속 소수자인 화교, 이들 화교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됩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