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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박물관 특별전] 청관(淸館), 그 기억을 거닐다

2013년 겨울 인천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짜장면박물관에서는 “청관(淸館), 그 기억을 거닐다”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임오군란 때 출병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서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던 화교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1883년 인천항에는 청국인 5명이 영국, 미국 등 서양 함선에 식류품과 급수를 공급하고, 식료품과 잡화, 해산물 등을 거래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국 조계가 설치되면서 다양 직업의 화교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해방이후 화교의 경제활동을 억압하는 조치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며서 중국요리집 등 요식업에 주로 종사하였으며, 1990년 대 한.중수교 이후 중국 본토와 거래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그 위상을 찾아가고 있다. 전시회에서는 이들 화교들이 살아왔던 다양한 자료 등을 통해 화교들 살아왔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청관, 그 기억을 거닐다” 특별전>

2013년 겨울, “청관, 그 기억을 거닐다”라는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임오군란 이후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온 화교들의 고난했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청관의 근대건축물

<공화춘>

1908년 건립된 중국 요릿집이다. 가운데 정원을 두고 있는 중정형식의 건물이다.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인 ‘주점(酒店)’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중국음식점이 인기를 얻으면서 음식점으로 사용되었다.

공화춘, 공화춘은 1908년 무렵 건축된 중국 음식점 건물이다.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中庭形)의 중국식 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다. 중화요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는 음식점의 공간을 확대하여 대형 연회장을 갖춘 중국음식점으로 196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건물을 매입한 후 건물을 보수하고 내부에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인천 차이나타운의 형성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차이나타운 개발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외국자본의 유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그간의 폐쇄적인 외국인 정책을 개선하고자 외국인에 대한 차별조항을 폐지하고 동시에 투자조건을 유리하게 만들어갔다. 특히 규제가 심했던 토지의 취득과 관리에 대해서는 법률개정을 통해 각종 제한을 전면 폐지하였다. 당시 동아시아 전체 자본의 70%를 점유하고 있던 화교들은 각종 제약이 사라지면서 국내에 투자를 시작하였고 이에 발맞추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화교 정책에 큰 관심을 갖는다. 인천광시와 인천중구는 1995년부터 중국의 지방정부들과 우호교류도시 관계를 맺으면서 차이나타운의 재개발 및 투자유치를 실시해 나간다. 결국 1999년 화교 기업들이 인천의 각종 개발 사업에 3억달러를 투자 유치하는데 성공하고, 2001년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북성동 일원을 지역특화발전특구로 지정받게 된다. 이후 다양한 관광문화 상품이 개발되고, 명품 중화요리점으로 주말에 수도권 관람객이 자주 찾는 인천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에 세워진 첫번째 패루>

경인선 기차 출발역인 인천역에서 나오면 정면에 차이나타운이 있다.


화교 의상,

화교의 직업 변천사
1883년 12월에 청국인 5명은 인천 선린동 지역에 거주하면서 식료품과 잡화를 수입하고 해산물의 중국수출과 영국, 미국, 러시아 등의 함선에 식료품과 급수를 공급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이후 인천구화상조계장정을 통해 청국인은 청국조계에 다양한 상점을 운영하는데 주단포목점, 청(중화)요리점, 이발소, 채소상 등이다. 당시 화교의 직업을 크게 분류하면 무역 및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 도시주변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농민 그리고 ‘쿨리(苦力)’라 불리는 부두 노동자들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쿨리들은 부두 하역장 및 건설현장에서 조선인 노동자와 경쟁을 하면서 생활을 하는데, 만보산 사건 등을 계기로 위기상황을 맞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중일전쟁까지 발발하여 화교들이 활동과 입지는 더욱 위축되어진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광복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거래하던 일부 농업 종사자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상업 종사자들에게는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1948년 한국정부가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하면서 화교들의 사회활동은 감소하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때문에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중화요리 사업에 손을 뻗치게 되고 19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외식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한국인이 중국요리 사업에 참여하고 일부 화교 제재정책으로 요식업에서 화교의 입지는 줄어들고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점도 대부분 사라진다. <출처:짜장면박물관>

대금지불영수정(근대), 고가단(견적서, 1970년대), 거래영수증(1960년대), 화교 이발도구 삭도 (1920년대), 면도칼잡(1960년대), 바리깡(1970년대)

초세유 초상화(근대), 보화한의원 면허증(근대)

복무증명서(1995년), 교사가 사용했던 안경과 펜(근대)

인천화교 신원증명서(근대), 인천화교 진정서(근대)

인천화교 친속증명서와 보증서

인천화교중산학교와 교육정책
타지역 화교와 달리 인천 화교는 95%이상이 산동지역 출신이고, 산동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들 중 90%이상이 인천화교중산학교 출신이라 문화적 동질성이 매우 강하고 거듭된 통혼으로 혈연적 유대관계가 돈독하다. 과거 화교들은 한국사회에서 많은 핍박과 차별정책으로 인해 화교학교를 통해 사회의 결속을 유지하게 된다. 1902년 한국 최초의 화교학교인 인천화교소학교가 설립된 이래 1957년 초중부 창설, 1964년 고중부 증설로 초,중,고중부 고루 갖춘 인천화교중산중학교로 설립된다. 화교의 교육정책 중 특이한 점은 대학 진학과정이다. 과거에 화교들은 대만에 있는 대학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대만의 학위를 국내에서 인정받기 어렵고 한국적 사고 배양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자 최근에는 한국 내 대학을 진학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화교학교를 이끈 사람들

졸업증명서(1976년), 주판(근대), 성적표(근대), 인천화교 중산중학교 조직 장칙(근대), 붓과 벼루

인천화교의 생활모습

화교의 세시풍속
인천 화교의 세시풍속은 초기 중국 산동지방의 전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적으로 한국적으로 변화하였다. 본래 화교들의 가장 큰 명절은 한국의 설과 유사한 춘절(春節0로서 12월23일 조왕신을 맞이하는 날부터 정월보름까지이며, 친지와 이웃을 찾아 새해 인사와 덕담 등을 나눈다. 특히 이 기간에는 아이들에게 홍파오(紅袍)라는 붉은 색 봉투에 돈을 담아 주는데, 설날 때 세뱃돈을 주는 한국의 풍습과 유사하다. 또한 봄이 왔음을 축하하는 청명절(淸明節)이나 노동절, 한국의 추석과 같은 중추철(仲秋節) 등 연후기간에는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모여 폭죽을 터트리거나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화교들은 한국 법정 휴일에 맞춰 휴식을 취하거나 직계가족들과 여행을 가는 등 한국 풍토에 맞게 변모하기 시작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토용(근대), 인천화교 교무위원화 쌍십절 행사자료(근대), 사자상.

향로, 홍파오(紅袍, 세뱃돈 봉투), 의자, 촛대

복래춘(福來春),

복래춘은 “복(봄)이 다시온다”는 의미의 상호명으로 중국의 전통과자를 4대째 이어하는 곳이다.

화교의 음식문화
중국은 광할한 영토를 가지고 있어 지역마다 기후, 토양이 달라 생산되는 산물이 다르며, 한족을 포함한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져 다양한 음식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들은 대부분이 중국 산동 출신으로 산동지역에서 재배되는 수수, 귀리, 보리, 밀, 조 같은 잡곡을 주로 사용하고, 고온에서 단시간 조리하는 볶음요리가 주류이며, 신선하고 짠맛이 주된 특징이다. 대표적인 음식으로 중국의 4대요리인 총소해삼, 청탕연와, 구전대장, 만두 등이 있으며 인천에서 탄생한 짜장면의 기원이 되는 작장면(炸醬麵)과 같은 면류도 유명하다. 이들 대부분의 음식은 고온의 열을 유지하여야 맛을 낼 수 있기에 음식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화로의 화덕도 함께 발달하게 된다.

오리주둥이 항아리(1920년대), 주석주전자(1920년대), 쇠절구(1940년대), 화로(1920년대),

주방칼과 국자(근대), 나무젓가락과 젓가락통(근대) 법랑4층 찬합, 법랑접시

 청관에서 사용되었든 등잔과 등잔대(근대), 화교의 채상(彩箱,음식 등을 보관할 수 있는 바구니)

쌍절곤과 철퇴

인천중화기독교회
1910년 인천은 많은 외국 자본이나 문물 등 상업의 중심지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당시 화교 상인들은 인천과 중국 간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축적하여 화교들이 인천에 몰려오는 계기를 마련하고, 화교들이 거주하던 청관에는 많은 음식점과 숙박시설 등이 생겨난다. 이시기 한성에는 화교교회가 발족되어 서울과 경기, 인천을 중심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가고 있었고, 1917년 도이명(C.S.Deming)과 손래장(孫來章)이 인천에 작음 방을 빌려 화교교회를 열었다. 그후 1922년 땅을 구입하여 인천 화교 최초의 교회를 신축하고 손래장을 교회의 전도사로 임명한다. 이에 손래장은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고 신학 공부에 매진하여 1925년에 인천중화교회 목사 안수를 받아 7년간 목회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인천중화기독교회


종탑에 달려있던 종

화교가 사용하던 성경책

인천 개항과 청관의 탄생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인과 함꼐 온 40여명이 군역상인들이 이땅에 정착하면서 대한민국 화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 저장성 등 남방인들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의 무역을 하였다. 1884년 4월 인천구화상조계장정(仁川口華商祖系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청국조계지가 세워졌고 그해 10월 청국영사관이 건립된다. 1884년 중반부터 청상의 영업허가 비용을 면제하는 등 우대조치를 취하면서 중국의 유력 상인들이 인천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는 남방 상인이 중심이던 화교 사회에서 강소, 강서, 호남, 호북 등 각 지역의 상인과 산동상인을 중심으로 한 북방 상인이 동시에 등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시기 청상들은 청국의 정치적 우세와 청국정부의 지원을 기반으로 활발한 상업활동을 펼칠 수 이었다. 청상은 이와같이 유리한 조건을 기반으로 일부 무역업종을 독점할 수 있었는데, 특히 면포루는 청상이 본국에서 들여오는 주요 수입 품목으로 인천 개항이래 꾸준히 각광을 받는다. 또한 청상은 청국으로 홍삼, 금, 소가죽, 해산물 등을 수출했는데, 당시 홍삼은 중국 남방인이 선호하는 고가품이이었다. 이 시기 청관은 그야말로 전성시대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The illustrated London News, 1856년

청국인 우리탕 고용지원서, 19세기

청일전쟁과 한일강제병합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화교들의 정치적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대부분의 유력 상인은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청일전쟁 후의 인천 화교 사회는 종전과 다른 큰 변화를 갖는다. 우전 법적 보장이 낮은 적성(適性)국민으로 전락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또한 청일조계지 경계주변에서 일본인들과 자주 충돌했고 큰 피해를 입었다. 그뒤 1904년 러일전쟁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을 거치면서 일본 상인과 조선총독부이 노골적인 규제를 받아 화교의 경제는 상세 회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1912년경 조선총독부에 의한 청국조계지의 철폐로 인천 화교 사회는 침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화교여권(근대)

화교엽서(일제강점기), 인천화성 동순동 주식(근대), 동해의 전쟁

순문 글씨, 한일강제병합 이후 청관(1910년대)

1900년대를 전후한 인천 청관지역의 모습

청천백일만지홍기(1910년대)

일제강점기
1894년 청일전쟁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후 인천화교 사회 구성원들의 특징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 인천에 거주했던 화교들이 상인중심이었다면 1920년대 중반부터는 산동지역의 노동이민자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시기의 변화는 중국 산동 지역의 자연재해와 빈번한 범죄발생, 한반도 식민지 건설에 따른 인력부족이 주된 요인이었다. 그러나 조선 노동시장의 급격한 산동 화교 점유율 확대는 조선 노동자와의 갈등 관계를 초래하게 되고 만보산사건과 같은 유혈사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1930년대에 이르면서 청관지역에는 다수의 중화요리점이 생겨나는데 중화루, 동흥루, 공화춘 등이 대표적인 공간으로 정계 및 지역 인사들이 즐겨 찾는다. 그러나 요식업의 발달과 달리 1940년대 이후 일본정부는 대륙침략정책을 기반으로 한반도 북부 지역을 병참기지로 건설하는 정책에 따른 화교 노동 이민정책을 실시하면서 화교들의 입지는 크게 줄어든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화교가 사용하던 봉투, 여권발급 추천서

인천시가도,

만보산사건과 인천사태
1931년5월 중국 장춘 근교 만보산에서 한국 농민들과 중국 농민들이 수로 개설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 중국과 일본 경찰이 출동해 총격전까지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 실제 재산피해는 크지 않았고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국내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이 의도적으로 왜곡 보도하여 많은 조선 농민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인천지역 일부 조선인들은 근처 화교마을을 돌며 화교들을 조롱하고 구타한다. 더욱이 이를 지켜보던 많은 조선인들이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화겨들이 경영하던 이발소, 요리점 등에 돌을 던지고 부을 질렀다. 때문에 많은 화교들이 청관 안으로 몸을 피하기 시작하였고 그 수가 3천명에 육박하기 이르렀다. 당시 일본경찰은 분쟁의 사태가 더욱 커질까 두려워 일방적으로 화교들에게 칼, 몽둥이, 창 등 무기 반납을 종용하였다. 결국 수천명의 조선인은 청관거리에 진입하여 2명의 화교를 살해하고 상점들을 약탈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혔다. 뒤늦게 조선총독부는 경성에서 헌병 경찰대를 급히 파견하여 사태를 무마시킨다. 그러나 약1만명의 화교들을 안전 및 재산에 위협을 느껴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광복과 한국전쟁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화교경제는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으며 1946년과 1947년에 이르러 한반도의 전체 수출입 무역의 80%를 점유하는 호경기를 맞는다. 그러나 1948년 수립된 한국 정부의 외국인에 대한 일련의 규제정책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내에서 중국으로의 이동이 금지되어 화교무역의 배경이었던 중국과의 교역이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직전부터 인천화교들은 사회경제적 난관을 겪는다. 자유당 정부가 6.25 직전 전국에 내린 창고 봉쇄령으로 화교무역상은 큰 타격을 입었고, 외국인에 대한 외화사용 규제책은 화교의 무역업에 족쇄를 채은 격으로 화교의 경제활동이 점차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6.25전쟁 화보, 출납유수(근대)

한국정부의 화교정책 변화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화교들은 더욱 큰 어려움을 겪는다. 두번의 화폐개혁을 통해 화교들의 현금이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외국인 토지 소유금지법이 제정되면서 많은 화교의 소유지가 한국정부의 승인을 거쳐야 했고, 대부분의 토지가 시세에도 못미치는 가격에 매매되었다, 1970년에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어 주거용 200평, 상업용 50평이내, 1가구 1주택 1점포만이 허용되었고, 타인에게 임대도 할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요식업에서도 불리한 세율을 통해 화교들이 세운 많은 명품 중화요리점은 문을 닫는다. 이와 반대로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들이 늘어남녀서 화교들의 중화요리의 입지가 크게 위축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보갑호구책(근대), 화교등기증 신청부(1953년), 거주허가 연장신청 명단(1967년), 인천화교 전화부

오늘날 화교
20세기 초반의 화교 사회는 중국본토와 밀착되어 중국문화를 흡수하려는 요소들이 강한 반면 20세기 후반에는 중국 문화에서 탈피하여 현지 문화를 받아들이고 현지 사회와 일원화되려는 현상이 강해진다. 이러한 변화의 주된 요인은 이념과 국익에 입각학 정착국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는데, 화교의 경제활돌을 압박.제약하고, 문화적 독자성을 포기하고 현지 사회에 동화시키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중국인의 이민과 정치활동은 제한되었다. 특히 외국 국적화교의 경제활동은 철저하게 금지하였고 강제적인 재산몰수와 이주가 행해졌다. 결국 화교의 자체적 경제활동을 억제하여 토착화를 통해 자국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많은 화교들은 현지 문화를 받아 드리고 현지어를 사용하였으며 때로는 중국 이름이 아닌 현지 이름으로 바꾸기도 한다. 특히 지역사회와 타협하여 나가면서 철저하게 화교 고유의 문화를 숨기게 되었다. 그러나 화교의 현지화가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화교 사회에서도 현지 사회에 자발적으로 동화하려는 의식이 생겨났고 현지에서 출생한 3세, 4세들이 늘어나면서 화교들의 현지화는 촉진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화교의 자본
21세기 중국 경제는 미국과 경쟁할 수 있을 만큼 급성장하였다. 중국의 성장에는 많은 요인들이 있었지만 그 중 해외에 나와 있는 화교들이 숨은 주역이다. 현재 화교들은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대부분에 거주하며 미국이나 유럽의 자본을 압도하고 있다. 화교는 20세기초부터 동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가 초기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전략적이고 지속적인 경제활동으로 막대한 부와 중국 경제 도약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된다. 화교 경제는 유럽연합(EU)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같은 제도적 통합체가 아닌 동일 민족을 바탕으로 한 기능적 통합체이기 때문에 결속력, 특히 경제적 협력에 있어서 어떤 통합체보다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바야흐르 21세기 세계 시자에서 화교는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중요한 집단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청관(淸館), 인천화교의 어제와 오늘

청국영사관 회의청, 1910년 청나라 영사였던 가문연(賈文燕)이 건립한 곳으로 舊청국영사관 뒤쪽에 남아 있다. 지붕은 일식으로 개수되었으나 나머지 개구부, 가구방식, 창호형태 등은 모두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1층 목구조로 측벽은 조적으로 마감되어 있고 전면 벽체는 흙벽 위에 회칠로 마감되어 있다. 이 건물 현관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왼쪽 현판은 조선 총상회에서 사용했던 당시의 명판으로 중화민국 11년(1923)에 설치한 것이고, 중앙에 걸려 있는 현판은 1919년에 허문연이 건립하였다고 되어 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선린동 화교주택,1939년대의 중국인 주상복합건물로서 청국 조계지에 세워진 건물로 현재도 화교가 거주하고 있다. 조적조 2층으로 지붕은 슬레이트로 되어 있고 벽체는 조적구조이며 창호와 2층 발코니는 목조로서 아치 형태를 하고 있다. 평면형식은 한가운데에 중청을 두고 사방에 방을 두는 공간ㅂ치 형태로 중국의 전통 주택유형 중의 하나인 사합원 구조의 축소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도 사합원 주택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고 특히 2층 발코니 형태 및 창호 등이 이색적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청국영사관, 청국영사관은 청국의 첫번째 해외지계인 인천 청국조계지가 설치된 1884년에 세워진 것으로 청일전쟁 후 잠시 폐쇄되었다가 1898년에 다시 개청하였다. 청국영사관은 청관 중앙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현재 인천화교 중산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터에 위치해 있었다. 청국영사관 안에는 약141평의 본청 외 순포청,전보국 등이 있었으며, 신포동에 분청을 두었다. 이 중 전보국은 통신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설치되었다. 당시 청국영사관은 벽돌조 1층 건물로 일본식 기와이음을 중국풍의 궁자형아치로 장식하였다. 이 장식 수법은 당시 청국조계지 내 중국인 주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현재의 선린동 중국인 주택에서도 볼수 있는 특징이다. 중문으로 추정되는 출입구는 4개의 사각기둥 위에 활모양의 아치3개를 올린 아케이드이다. 이 건물보다 낮은 건물을 좌우에 두어 이 부분이 솟을대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3개의 아치 가운데 좌우 아치에는 쇠창살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출입은 중앙부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짜장면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