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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奎章閣)] 조선왕조실록과 의궤(儀軌)

유교사회인 조선왕조에서는 역사기록을 매우 중요시 여겨 당대의 집권자들이 정치를 함에 있어서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하여,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게 하고자 했으며, 편찬된 역사서들은 후대 사람들이 행동을 함에 있어서 모범이 되게 하였다. 조선왕조는 실록이외에도 <승정원일기>와 의궤 등을 통해서 국왕과 관련된 행사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에 대한 기록을 철저히 남겨 놓고 있다. 물론 실록을 제외하고는 전시대에 걸쳐서 고르게 역사기록을 남겼다고 보기는 힘들고, 주로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의궤를 포함한 많은 기록들을 남겨 놓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가 시작된 이래 철종까지 42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국왕과 관련된 정치뿐만 아니라 외교,경제,군사 등을 비롯하여 민간생활까지의 다양한 내용들을 기록한 역사책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역사책이다. 조선왕조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을 두어 왕이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 참석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실록의 편찬은 왕의 사후에 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근간으로 해서 당시의 모든 자료를 참조하여 실록을 작성했기때문에 그 내용의 객관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승정원일기와 함께 1997년에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복제본), 숙종실록(肅宗實錄,복제본).

실록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 또한 최근에 규장각에서 완성한 것으로 보이며, 인터넷 등을 통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때가지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조선전기에는 한양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에 사고를 짓고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벌렸다.

강화 정족산 사고.

임진왜란 이후 실록은 한양 춘주관, 평창 오대산, 봉화 태백산, 강화 정족산, 무주 적장산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 중 원본에 해당하는 전주사고본은 정족산사고에서 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조 무인사초(仁祖 戊寅史草).

조선후기 인조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사초이다.

무인사초

원래 사초는 실록작성시 제출하여 실록완성시 세검정에서 세초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초 작성자가 개인적으로 복사본을 남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등으로 혼란한 시기였던 인조대의 문란상을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세검정

조선시대 실록을 작성하고 작성했던 사초를 씻는 세초(洗草)작업을 했던 평창동 세검정.

인조(仁祖)대에 승지를 지낸 이현이 작성한 가장사초(家藏史草)이다. 본서에는 저자와 연대가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제1책의 ‘戊寅六月十三日’이라는 제목과 표지 이면에 기록된 관직 및 성명, 그리고 <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통해 이현이 1638년에 기록한 사초임을 알 수 있다. 1638년 6월 13일에서 9월 17일까지 매일의 사초가 1책씩 편집되어 있는데 중간에 빠진 날짜가 많이 있으며, 1책당 3장에서 5장 정도씩 묶여져 있어 전체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수록된 내용은 신료들의 계문(啓聞)이나 승정원에서 정무를 처리한 사항, 관리의 인사이동 등에 관한 것이다. 가장사초(家藏史草)는 사관이 개별적으로 작성하여 보관하다가 국왕 사후에 춘추관에 제출하여 실록편찬의 자료로 사용된 다음 세초(洗草)되어 없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본 사초가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부본(副本)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규장각>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太祖)로부터 철종(哲宗)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완질의 분량이 1,707권 1,188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통신.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일시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국왕 사후에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왕대의 실록을 편찬한 것이 대대로 축적되어 이루어졌다. 실록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등 정부기관 기록, 개인문집 등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史官)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들은 내용을 직필한 것으로, 사관 이외에는 국왕조차도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였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1부씩 보관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 있던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사고에 보관하였는데,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춘추관과 충주.성주사고의 실록은 소실되고 전주사고본만 남게 되었다. 이에 전쟁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재간행하여 춘추관.정족산(강화도).태백산(경북 봉화).적상산(전북 무주).오대산(강원 평창) 등 네곳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중국이나 월남 등 다른 국가의 실록과 비교해 볼 때,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존.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등록되었다. 현재 규장각은 정족산본 1,187책, 오대산본의 낙질 27책, 기타 97책 등 총 1,311책의 실록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정족산본 실록은 전주사고본에서 이어진 것으로, 조선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일본이다. <출처:규장각>

의궤(儀軌), 왕실과 국가적 행사의 기록

조선시대 역사를 기록한 자료로는 국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실록>과 일상을 세세히 기록한 <승정원일기>, 왕실 주관의 각종 행사를 기록한 <의궤> 등을 들 수 있다. 의궤는 국가와 왕실이 주관하는 각종 행사의 주요 절차와 내용을 그림과 함께 정리한 기록이다. 의궤에는 최고급 안료를 이용하여 최고의 전문화가들인 도화서 화원들이 그림을 그렸기때문 기록화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 그림들이다. 오늘날 주요 행사에는 기념촬영 등을 통해서 행사장면을 남겨놓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그림으로 중요한 행사장면들을 남겨 놓고 있다. 특히 의궤는 조선후기 문예중흥기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대에 특히 많이 그려졌는데 1760년 청계천 준설 공사를 마친 뒤 이를 기념하여 베푼 무예시험 장면을 그린 <준천시사열무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화성원행반차도>, 1817년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그린 <익종대왕 입학도> 등이 유명하다.

영조묘호도감의궤(英祖廟號都監儀軌), 1890년.

구한말에 작성된 의궤로 어람용과 일반용 의궤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왕이 보는 어람용 어궤는 상당히 고급스럽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889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묘호(廟號)와 시호(諡號)를 고쳐 올리고, 영조와 영조비의 존호(尊號)를 추가로 올리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1889년 12월 5일에 영조의 묘호는 ‘영조(英祖)’, 시호는 ‘정문선무희경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로 고쳤으며, ‘중화융도숙장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이란 존호도 추상(追上)되었다. 이와함께 영조비 정성왕후(貞聖王侯)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존호도 추상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이듬에 정월에 종묘에 친상(親上)되었고, 3월에는 원릉(元陵)에 새로운 표석(表石)도 건립하였다. 초록 비단과 완전한 형태의 5개 국화동과 변철은 어람용 의궤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분상용 의궤의 삼베표지와 구별된다. <출처:규장각>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1876년.

구한말에 작성된 궁중에서 사용하는 도장을 개보수한 기록이다. 의궤에는 그림으로 그 형태와 목적, 기능 등을 아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붉은 선을 두른 어람용 의궤이다.

검은 선을 두른 분상용의궤와 그림으로 묘사된 국왕의 도장

1876년 궁중에서 사용하는 보(寶)와 인(印)의 개주, 개조, 수보 과정을 기록한 의궤. ‘보인’은 국왕 사용한 옥새와 도장을 의미한다. 1876년 11월 8일 궁중에서 사용하는 각종 보와 인이 닳았으므로 무위소와 호조가 그 수리 및 개조를 담당하라는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의궤의 기록은 1876년 11월8일부터 1877년 1월 4일까지이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된 도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고 사자관(寫字官)이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쓰고 붉은 선을 두른 어람용 의궤는 저주지(楮注紙)를 사용하고 검은 선을 두른 분상용 의궤와 구별된다. <출처:규장각>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801년.

수원 화성 축조의 전과정과 소요된 비용, 인원 등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화성성역의궤>이다. 의궤에는 건설과정과 관련된 내용들이 그림과 함께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수원화성이 18세기에 축조된 읍성이지만, 이런 세부적인 기록이 뒷받침 되었기대문에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읍성으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궤에 묘사된 수원화성의 성문.

화성(수원성)을 축조한 뒤에 그 공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기록한 의궤. 화성 축조 공사는 1794년 1월부터 시작되어 1796년 8월까지 계속되었는데 본 의궤는 1796년에 완성되어 1801년 활자로 간행되어 보급되었다. 성곽의 축조와 관련된 공식문서와 참여인원, 소요물품, 건축 설계 등에 관한 기록과 그림이 함께 수록되었다. 공사의 총책임은 채제공(蔡濟恭)이 맡았으며, 정약용은 축성법과 공사에 사용된 거중기 등 기계류 제작에 공헌하였다. 18세기 건축공사에 들어간 비용, 물품, 참여인원 등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나 있어서, 건축술과 함께 당시 국가의 경제력을 살펴보는데도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출처:규장각>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 1743년.

성균관에서 행한 활쏘기 시합인 대사례를 기록한 의궤이다.

1743년 윤4월에 영조가 성균관에서 행한 대사례 의식을 기록한 의궤. 대사례는 국왕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서 활을 쏘고 그 맞힌 수에 따라 상벌을 행하는 의식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477년에 처음 대사례가 시행되었으며, 1543년, 1743년, 1764년에 각각 시행된 기록이 있다. 의궤의 앞면 에는 <어사례도(御射禮圖)>,<시사례도(侍射禮圖)>,<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대사례의 구체적인 모습을 접할 수 있다. 또 대사례에 참가한 이들의 명단, 시행세칙 및 의례, 관련 경비, 궁시(弓矢), 과녁 등 행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 1827년.

의궤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조선후기 한글이 대중화되어 생활 깊숙히 파고 들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은 실제로 궁중에 일하는 여자들을 중심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

1827년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뒤에 익종으로 추존)가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할 때 순조(純祖) 내외에게 존호(尊號)를 올린 것을 기념하여 자경전(慈慶殿)에서 치른 진작례(進爵禮)를 거행한 사실을 기록한 의궤를 번역한 책. 3권3책의 필사본으로 중궁(中宮)과 세자빈(世子嬪)에게 보이기 위하여 한글로 번영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규장각>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복제), 1759년.

정조대왕의 화성행궁 반차도와 함께 의궤에 실린 그림중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간략하면서도 아주 세밀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앞부분

왕이 거동할 때 호위와 경비를 총괄하는 금군(禁軍)의 우두머리인 금군별장(禁軍別將)이 갑옷으로 중무장한 모습이다. 그 뒤에는 교련관 3명이 뒤따르며 바로 뒤에 둑(纛, 대장깃발)과 교룡기가 등장한다. 중앙에는 주작기와 황룡기를 든 사람이, 이들 좌우에는 홍개(紅蓋)를 든 사람과 금과 북을 치는 사람이 있다. 이어 보마(寶馬) 2필이 따르고, 상서원 관원을 중앙에 두고 내시 2명이 좌우에 보인다. 중앙에는 차례대로 천하태평가, 교의(交椅, 의자), 각답(脚踏, 받침), 군왕천세기(君王千歲旗)를 들고 가는 사람이 있고, 이들 좌우에는 말을 끌고 가는 관원들이 보인다. <출처:규장각>

<앞장의 그림과 이어지는 모습이다>

. 관자(灌子, 주전자), 우자(盂子, 그릇) 등을 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행렬 좌우 바깥쪽에는 각종 의장물들이 어우러지면서 행사의 위엄과 화려함을 더해준다.중앙에 교의, 각탑을 든 사람과 함께 4필의 장마(仗馬)가 보이고 그 뒤로 옥교(玉橋, 왕이 타는 간단한 가마)가 나타난다. 행렬 바깥쪽에는 부장(副將)과 긴 칼을 높이 치켜든 월도차비(月刀差備)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출처:규장각>

가운데부분

중앙에 나타난 사복시 정(司僕寺正, 사복시의 우두머리, 궁중의 가마나 말을 공급하는 일을 관장)에 이어 봉래원의 관리들인 좌통례 1명, 인읜(引儀) 2명, 우통례 1명이 뒤따른다. 뒤따르던 부련(副輦)은 사고를 대비해 제작한 빈 가마다.  수정장(水晶杖), 양산, 금월부(金鉞斧)를 든 이들이 나란히 서고, 이어 운검차비(雲劒差備) 2명, 인배(引陪) 2명, 옥당(玉堂, 홍문관)의 관원 4명이 뒤따르며, 그 옆으로는 어마(御馬) 2필을 각각 끌고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규장각>

뒷부분

노란옷을 입은 내취 8명의 모습이 보이는데 앞에 선 2명은 나발을 들었다. 내취의 좌우에는 별파진(別破陣, 조선시대 각 군영이 둔 군대의 하나로 조총, 화포 등을 주무기로 하여 편성된 특수부대)이 호위한다. 내취의 뒤를 이어서 사금(司禁), 무겸(武兼), 선전관(宣傳官), 총부낭청(總部郎廳), 병조낭청(兵曹郎廳) 각 2명씩 뒤따른다. 모두 왕을 호위하는 이들이다. 오위장(五衛將), 병조당상(兵曹堂上), 총부당상(總部堂上), 패운검(佩雲劒), 봉보검(捧寶劍) 각 2명이 뒤따르는데, 이들 역시 왕의 경호 임무를 띠고 있다. <출처:규장각>

뒷부분

왕의 측근에서 시위하며 죄인을 적박하는 업무를 맡았던 별군진(別軍職) 6명이 앞서가고, 어가의 앞에서 분위기를 돋우는 전부고취(前部鼓吹) 10명과 전악(典樂) 1명이 따른다. 좌우에는 갑옷으로 무장한 금군(禁軍)과 특별히 발탁한 군사들인 가전별초(駕田別抄), 장교복을 입은 호위군관이 호위하고 있다. 중앙에 촛불을 든 봉촉(奉燭) 10명이 뒤따르며, 초록색 복장의 별감 10명과 총을 든 무예별감이 뒤따른다. 좌우측에 역시 호위를 맡은 각종 병력의 무장한 모습이 보인다. <출처:규장각>

뒷부분

드디어 국왕 영조가 탄 개방형 가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왕의 모습은 그리지 않았다.) 무예별감, 나장 등이 어가 옆에서 호위하며, 가후별초(駕後別抄)의 모습도 보인다. 어가의 바로 뒤로는 청선(靑扇)을 든 두 사람이 지나가고 이어 후방에 배치하는 깃발인 현무기와 후전대기가 나타난다.어가 뒤에서 흥취를 돋우는 후부고취(後部鼓吹) 10명이 붉은색의 복장을 하고 행렬을 따라가며, 협련장(挾輦將), 전악(典樂), 내시, 내승(內乘, 사복시에서 말과 수레를 담당한 관리), 어의(御醫)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규장각>

뒷부분

행렬의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악공고취(樂工鼓吹)의 등장. 피리, 나팔, 해금 장고 등 각종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를 든 18명의 악공과 이들의 뒤에 악대의 책임자인 전악(典樂)이 있다. 중앙에 봉촉이 나타나고 이어 너울을 쓴 기행나인이 말을 타고 간다. 좌우 바깥쪽에는 궁중의 어린 내관인 귀유치(歸遊赤)가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행렬을 따라가고 있다.

뒷부분

 보행나인, 상궁, 시녀 등 여인들이 부쩍 늘었다. 별감 2명의 인도를 받고 왕비의 연이 드디어 선을 보인다. 좌우측의 기행 시녀 6명은 너울을 쓴 채로 왕비의 가마를 호위한다. 왕의 가마와 달리 사방이 막혀 있으며 12명의 가마꾼이 메고 간다. 청선을 높이든 2명이 인물이 보이며, 바로 뒤에 연배여군(輦陪餘軍, 예비 가마꾼)이 손을 맞잡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어 시복시 정(正)을 가운데 두고 내시 4명과 의관 4명이 나타난다. 모자를 쓴 의녀의 모습도 보인다. <출처:규장각>

1759년 6월에 있었던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김한구의 딸)의 결혼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 왕비 후보를 뽑는 삼간택의 과정을 비롯하여 납채(納采, 청혼서보내기), 납징(納徵, 결혼예물 보내기), 고기(告期, 날짜잡기), 책비(冊妃, 왕비의 책봉), 친영(親迎, 별궁으로 가 왕비 맞이하기), 동뢰연(同牢宴, 혼인 후의 궁중 잔치) 등 왕실 결혼의 구체적인 절차들이 나타나 있다. 말미에 그려진 반차도는 친영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왕이 별궁인 어의궁(於義宮)으로 가서 왕비를 모셔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표지의 ‘오대산상(五臺山上)’은 제작 후 오대산 사고에 보내졌음을 의미한다. <출처:규장각>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795년.

정조의 명으로 발간된 이순신 장군 관련 자료 모음이다. 이 책자에서 거북선을 비롯한 당시 무기의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고, 오늘날 이 책자를 근간으로해서 당시의 무기들을 복원하고 있다.

이충무공 전서에 기록된 거북선 그림.

충무공 이순신의 문집, 14건 8책의 정유자본이다.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으로 교서관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였으며,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편찬을 지휘하고 검서관 유득공(柳得恭)이 실무를 담당했다. 책머리에 국왕이 작성한 윤음과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으며, 본문은 시와 장계(狀啓),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좌수영의 거북선(龜船)과 무기의 도설(圖說)이 실려 있다. <출처:규장각>

 

화기도감의궤(火器圖鑑儀軌).

17세기초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의궤로 당시의 각종 화약무기 제조과정을 기록하였다.

1615년 화기도감에서 불랑기(佛狼器), 삼안총(三眼銃) 등 각종 화약 무기를 제조한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 내용은 목차없이 도설, 좌목, 일지 순으로 기록되었다. 1614년 당시 제작되었던 무기 그림인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북방에서 흥기하는 건주 여진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차원에서 화기가 제작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으며, 화기 도감 담당 관리들의 좌목과 화기 제작 과정이 날짜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의정부,비변사,춘추관, 예조와 4사고에 각 1건씩 분상되었다. 무기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조선시대 유일한 의궤라는 점에서 국방을 중시한 광해군 시대의 성격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출처:규장각>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순시하는 모습을 그렸다.

오늘날 오간수문 부근 청계천

활쏘기 시합을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행사모습

행사 모습을 그린 그림.

1760년에 도성내 하천(지금의 청계천) 준설공사를 완성하고, 이를 기념하는 무사들의 무예 시험 행사를 4첩으로 기록한 그림. 홍수피해 방지와 하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국왕 영조의 지대한 관심속에서 공사가 이루어졌다. 당시의 공사현황과 경비, 인부, 말 등의 숫자 등을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에 의하면 도성내의 하천 공사는 1760년 3월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4월 16일 끝난 것으로 되어 있다. 동원된 인부가 총 50여만 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공사였다. 흥인문 남쪽에 있는 오간수문(五間水門)에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관람한 영조의 자리와 국왕을 수행한 관리의 모습을 비롯하여, 하천변에서 소와 수레 등 각종 도구를 활용하여 준설 작업에 열중인 인부들의 모습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출처:규장각>

준천사실(濬川事實), 1760년

1760년 청계천 준설 공사 업무를 주관한 준천사(濬川司)의 사업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한성판윤(漢城判尹) 홍계희가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는데, 책 머리에 영조의 어제 서문과 한성부 판윤에게 내리는 교서가 있으며, 다음에 본문에 해당하는 <준천사실>과 <준천사절목(濬川司節目)>이 실려 있다. <출처:규장각>

종묘의궤(宗廟儀軌), 1706년

1706년에 종묘서 도제조 서문중(徐文重) 등이 종묘의 제도와 연혁, 의식 절차, 관련 행사 등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의궤. <국조오례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각 관청의 등록(騰錄) 및 개인 문집 등에서 종묘와 관련되는 내용을 뽑아 분류.정리한 것으로, 종묘에 관한 최초의 종합적인 기록이다. 책의 첫머리에 편찬 원칙을 밝힌 12개조의 <범례>가 나오며, 1책에는 도설(圖說)을, 2~4책에는 종묘와 관련된 각종 기록들을 수록하였다. <종묘영녕전도>는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의 전경을 그린 것으로, <범례>에서 밝혔듯이 창건 초기의 모습이 아니라 이후에 증축된 모습이다. <출처:규장각>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1804년

사직(社稷)의 제도와 의식절차, 관련 행사 등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의궤, 1783년 종조의 명으로 처음 편찬되었으며, 본 의궤는 최초의 의궤에 1783년 이후부터 1804년 2월까지의 기록들을 추가로 기록한 것이다. 정조는 1783년 사직제를 지내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 당시까지 <사직서의궤>가 편찬되지 않았음을 알고 의궤 편찬을 지시하였다. 본 의궤의 내용을 보면, 1783년까지의 기록들은 서체가 일정하고 참고 문헌이 명시되어 있는 반면, 그 이후부터 1804년까지의 기록들은 서체가 다르고 참고문헌이 밝혀져 있지 않다. 권두에는 <사직서전도(社稷署全圖)>, <단유도설(壇壝圖說)>, <찬실도설(饌實圖說)> 등의 그림이 실려 있어서 사직단의 전경과 사직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규장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