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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

반가사유상은 불상 중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을 무릎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된채 생각에 잠긴 모습을 표현한 불상을 일컫는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시절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불상의 협시보살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단독 불상의 형태로 바뀐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남북조시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5세기말 운강지역에서 미륵불과 삼존상의 협시보살이 형태로 나타나며, 6세기 북제(北齊)에서 크게 성행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백제의 서산 용현리마애삼존여래상(국보84호)에서 왼쪽 협시불로 나타나고 있다. 단독불상으로 만들어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삼산관’과 ‘일월식보관’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출토되는 다른 반가사유상 또한 미륵보살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으로 당시에 성행했던 미륵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도 전해져 반가사유상과 거의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는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점은 석굴암 본존불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2015년 가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라는 제목의 특별전시회에서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반가사유상(국보)>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한다리를 다른 쪽 무릎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된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을 한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 같은 여러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7세기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으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 시대에 만들어진 반가사유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반가사유상>

중국 남북조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형태로 좌우의 보살들이 중앙의 반가사유상을 모시고 있는 형태이다. 조각수법은 떨어지는 편이며, 신체의 특징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국 산동지방에서 출토된 것으로 북제(北齊,563년)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산 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국보) 중 반가사유상>

‘백제의 미소’롤 잘 알려진 서산 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국보84호) 중 왼쪽에는 미소띤 얼굴을 하고 있는 보살로 삼국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이나 관음보살을 표현한 불상이 많다. 중국 북위때 협시불로 나타났다가 신라에서 많이 만들어졌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시대 불상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와 일본의 반가사유상이 유명하며, 협시불로 표현된 이 불상에서 반가사유상이 중국에서 유래하여 백제를 통해 신라와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1662-1)>

국내에서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cm에 이른다. 머리에는 3면이 둥근 산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삼산반가사유상’이라고도 부른다. 반가사유상은 원래는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미륵사상을 반영하여 미륵불로 만들어졌다. 중국에는 삼존불 형태로 많이 표현되고 있으나, 삼국시대에는 단독불상으로 주로 만들어졌다. 이 불상은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눈.코.입등이 표현이 뛰어나 조각품으로서 높은 예술성을 평가받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출토지가 정화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백제 또는 신라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고류지에 남아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 그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삼국시대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머리에 낮은 관을 쓰고 있는데, 삼산관 또는 연화관이라 한다.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으며,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하고 있다. 다리를 감싸며 대좌를 덮은 치맛자락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상은 신라계 승려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고류사의 붉은 소나무로 만든 반가사유상과 비교해 볼 때 신라에서 만든 것을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균형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솜씨로 미루어 백제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1962-1)>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머리에 해와 달이 장식되어 있는 ‘일월신보관’을 쓰고 있다. 이런 양식은 사산조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문화로 볼 수 있다. 얼굴과 신체의 표현, 신체 각부분의 비율 등에서 국보(1962-2) 반가사유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세련된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삼국시대, 6세기 후반, 높이 83.2cm, 무게 37.6kg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있는데, 이 관에는 해와 달 장식이 있어 ‘일월식보관’이라 한다. 이렇게 해와 달이 새겨진 관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관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인 조화, 처의 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등에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는 또 다른 세련된 조각 양식을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류지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복제>

국보(1962-2) 반가사유상과 외형의 거의 비슷한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복제)이다. 백제 또는 신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고류지는 신라계 승려가 창건한 사찰이며 불상을 새긴 목재는 경상도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붉은 소나무로 만들어져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세련된 조각솜씨로 볼 때 백제불상이라는 견해도 많다.

고류지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복제
일본 고류지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국보이다. 백제로부터 건너갔거나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닯았다. 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어 반가좌를 틀고 오른쪽 손끝은 오른뺨 위에 댄 사유의 자세를 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왕자였던 시절에 상념에 빠져있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56억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해 줄 부처이다. 도솔천에 상주함녀서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은 출가 이전에 고뇌하던 왕자의 모습과 닮았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미륵보살은 종종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주변 여러 나라 가운데 왜와 긴밀한 협력돤계를 이루었으며, 멸망한 뒤에도 백제유민 일부가 일본 열도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불교를 비롯해 백제의 다양한 문물이 왜로 전해져 일본 곳곳에는 백제 관련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금동미륵보살반가가유상, 삼국시대,7세기전반, 보물>

신체가 사실에 비해 길게 표현된 불상으로 정교한 세부표현과 추상성이 특징이다. 4각형 대좌 위에 8각으로 된 받침을 놓고 그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를 놓고 있는데 보살상에 비해 크게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있게 보인다. 이 불상의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슬장식이나 연꽃의 형식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동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전형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그만 금동불상이다.


<금동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전반>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이 손가락을 뺨에 살짝대고 있는데 비해 이 반가사유상은 손바닥 전체로 뺨을 감싸듯이 받치고 있다. 머리 윗부분에는 광배를 결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구멍이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금동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머리에 넝쿨무늬가 표현된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 반가사유상으로 콧수염이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머리 뒤쪽에 꽂이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부처의 머리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가 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금동 반가사유상, 경남 양산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신체가 사실에 비해 길게 표현된 불상으로 정교한 세부표현과 추상성이 특징이다. 4각형 대좌 위에 8각으로 된 받침을 놓고 그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를 놓고 있는데 보살상에 비해 크게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있게 보인다.

반가사유상의 자세를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표현한 상이다. 넝쿨과 꽃모양으로 장식한 보관과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온화한 미소와 살포시 댄 손가락, 유려한 옷주름은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머리 뒤에는 광배꽂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