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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대통사 석조(보물), 백제때 만들어진 석조

공주 박물관에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중동 석조(보물)와 반죽동 석조(보물)이다. 이 석조는 백제 성왕 때 세워진 대통사 절터에 남아 있던 것이다. 통일신라 이후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두개의 석조는 조각수법과 크기가 거의 비슷하여, 한 건물 앞에 세워두기 위해 한쌍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연꽃무늬가 조각된 둥근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다. 가장자리에는 한가닥 띠를 돌리고 중앙에는 2줄의 띠가 새겨져 있다. 중동석조(보물)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말구유로 쓰기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중동초등학교 마당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중동석조’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공주 대통사 석조(보물)>

삼국시대 공주를 사찰이었던 대통사 절터에 남아 있던 것들이다. 비슷한 크기와 조각수법들을 하고 있어 원래 한 건물 앞에 세워두기 위해 1쌍으로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 반죽동 석조(보물)>

공주시 반죽동 대통사 절터에 남아 있던 반죽동 석조(보물)이다. 굽이 높은 사발을 확대한 모향으로 바닥돌 외에는 거의 둥근 구조이다.

<받침기둥>

받침 기둥은 12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는데, 공주 지방에서 나온 기와무늬와 같은 모양이라고한다. 전형적이 백제 양식이라 한다.

<옆에서 본 모습>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깨어진 부분도 있고, 새겨진 조각들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뒤에서 본 모습>

큰 화강석을 파서 만든 석조임을 알 수 있다.

<공주 중동 석조(보물)>

공주 중동초등학교에서 옮겨와 중동 석조(보물)라 불린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말구유로 쓰기 위해 옮겼다고 한다. 이때 받침돌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가운데 안상처럼 연꽃무늬를 선명하게 새겨놓은 것이 특징이다.

<옆면에 새겨진 연꽃무늬>

<옆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말구유로 사용하기 위해 윗부분을 손상시켜 놓은 것이 보인다.

대통사는 공주시 반죽동에 있던 사찰로 <삼국유사>에는 신라 법흥왕이 양나라 무제를 위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는 성왕7년(529)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이후에도 대통사는 공주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사가 있던 반죽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충청감영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공주읍치의 중심지였다. 반죽동 절터에는 통일신라때 만든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공주박물관 대통사 석조>

공주 대통사 석조, 보물
석조(石槽)란 돌을 파서 물을 담아 쓰도록 만든 큰 물통이다. 절에서 물을 담아두거나 큰 행사가 끝난 후 그릇을 씻을 때 쓰는데, 흔히 연꽃을 담아 장식한다. 이들 석조는 대통사(大通寺, 공주시 반죽동 소재)의 강당터 앞쪽에 나란히 있던 것으로, 크기만 다를 뿐 양식이나 조각수법은 거의 같다. 통일신라의 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둥근 몸체, 연꽃무늬가 조각된 둥근 받침돌 등 백제문화 특유의 우아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각각 반죽동석조(보물, 높이 75cm), 중동석조(보물, 높이 72cm)로 불리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