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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법천사 절터에 남아 있는 탑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이다. 남한강변에서 멀지 않은 법천자시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탑비로 고려중기에 활동한 지광국사를 기리기 위해 승탑과 함께 세워져 있던 탑비이다. 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올려 놓고 있다. 거북받침돌은 눈을 부릅뜬 용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등껍질은 여러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놓고 있다. 비몸돌 옆면에는 구름과 두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놓고 있으며, 머릿돌은 왕관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탑비의 양식을 하고 있으며, 이 탑비만이 보여주는 독특한 독특한 양식이 많이 남아 있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고려중기에 활동한 지광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로 거북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비의 형태를 하고 있다. 역동적이며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조각수법과 조형미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탑비이다. 왕관모양을 한 머릿돌 등 이 탑비만이 가지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역동적이며 섬세한 표현이 돋보이는 거북받침돌>

몸돌 옆면에 새겨진 구름과 용 또한 매우 역동적이다. 사각형안에 육각형을 새겨 거북등껍질을 표현하고 있으며 안에는 ‘王’자를 새겨 놓았다.

<옆에서 본 거북받침돌>

<뒤에서 본 거북받침돌>

지광국사는 고려 중기 (984~1067년)에 활동한 승려이다. 현화사를 중심으로 법상종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당시 문벌귀족인 인주 이씨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광국사탑이 있던 원주 법천사지 절터에는 탑의 내력이 적혀 있는 탑비가 남아 있다. 탑비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한 이후의 행적과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지광국사 승탑(국보)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반환되어 현재는 경복궁 내 고궁박물관 마당으로 옮겨졌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

고려중기에 활동한 지광국사의 행적과 업적을 새겨 놓고 있다.

<왕관모양을 하고 있는 머릿돌>

<뒤에서 본 모습>

<경복궁 고궁박물관 마당으로 옮겨진 지광국사탑(국보)>

<원주 법천사지(사적)>

고려시대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부도탑과 부도탑비가 있는 자리 부근에 있었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절의 입구를 알려주는 당간지주는 절터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국보,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67)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지광국사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지광국사탑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