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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효종 영릉 재실(보물), 왕릉 재실의 모습을 잘 보존되어 있는 곳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효종 영릉(사적) 능역에 있는 재실(보물)이다. 1673년 구리 동구릉에 있는 효종의 영릉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재실도 같이 옮겨왔다. 17세기에 지어진 건축물로 조선왕릉 재실 중 유릴하게 기본형태가 잘 남아 있으며, 공간구성과 건물배치가 잘 되어 있다. 건물은 산릉제례때 제관이 머무는 공간이자 능참봉이 집무를 보는 공간인 재방을 중심으로 향과 축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실은 원래 무덤이나 사당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지은 집을 말하며 삼국시대 시조묘나 신궁제도에서 그 기능이 유래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유학이 사회전반을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는 왕릉을 조성하는 산릉제도에서 그 기능이 정립되었다고 하며, 일반 사대부에서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으로 많은 재실들이 건축되었다. 재실은 평상시 영(종5품) 또는 참봉(종9품) 등이 능역의 관리를 위해 근무하는 곳이며,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여주 효종 영릉 재실(보물)>

조선왕릉 재실 중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재방, 전사청, 제기고, 행각 등 재실을 구성하는 건물들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솟을대문>

<행랑채>

솟을대문 양쪽에 행랑채를 두고 있다. 구한말에 지어진 왕릉 재실에 비해서 온돌방들이 많지 않은 편이다. 평상시에는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며, 산릉제례 때 국왕을 비롯하여 제관을 수행한 인원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재실 중문>

재실 중심건물이 재방이 있는 공간과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문에서 재방까지는 어도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간략하게 만들었다.

<중문 옆 작은 행랑채>

<산릉제례 때 제관이 머무는 공간인 재방>

앞면 6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평상시에는 왕릉 관리인 능참봉이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재방 대청마루>

구한말에 지어진 왕릉 재실에 비해서 대청마루는 넓지 않은 편이다.

<재방 앞 마당에 심어진 회양목>

영릉이 조성되던 시기에 심어진 수령 300년 정도의 고목으로 영릉의 역사와 같이 했다.

<재실 마당에 심어진 느티나무>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안향청>

산릉제례 때 국왕인 내려준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앞면 3칸 규모의 건물이다.

<안향청 내부>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안향청 대청마루 천장>

<안향청 앞 행랑채>

가마 등을 보관하는 공간들이 많다.

여주 효종 영릉 재실, 보물, 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재실은 제관의 휴식, 제수 장만, 제기 보관 등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 건물로 영릉재실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에 능 조성 시 인근에 건립되었으나, 1673년 영릉을 천릉하면서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 건물들은 전반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짜임새 있게 건립되었고, 안향청, 제기고, 재실, 행랑채 등의 시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유기적으로 적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대부분 멸실되어 그 일부만 남아 있으나, 이곳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