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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경희궁] 구한말 이후 터만 남은 경희궁지

조선후기 국왕의 임시거처이자 왕실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서궐(西闕)로 불렸던 경희궁은 구한말 고종대 경복궁 중건과 함께 그 역할이 크게 축소되면서 궁궐로서 의미가 크게 퇴색될 수 밖에 없었다. 경복궁 중건과정에서 많은 전각들을 헐어 건축자재로 사용되었으며, 왕실가족이 생활하는 이궁(離宮)의 역할은 법궁이었던 동궐이 맡게 되면서 경희궁은 실질적인 용도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숭정전을 비롯하여 일부 전각만 남아 있는 넓은 공터만 남게 되었다. 덕수궁의 대한제국 법궁으로 정해지면서 새로운 역할의 생기는 듯 했으나 조선의 멸망과 함께 역사속의 궁전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일제가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를 세우면서 1970년대까지 서울고등학교에서 경희궁 옛터를 사용하다가 숭정전을 비롯한 일부 전각들만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희궁지(慶熙宮址)
고종 대 경복궁의 중건사업은 조선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경희궁에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경희궁의 전각을 헐어 경복궁 중건의 건축 자재로 활용하면서 경희궁은 폐허의 궁으로 전락했다. 대한제국기의 경희궁은 궁 본래의 쓰임새가 거의 사라지고 일부 전각만 겨우 존속하는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관료 자제들의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아예 궁의 이름조차 사라지고 경희궁 터라는 기억만 남았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이곳을 활용했고, 1980년에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게 되자 서울시가 경희궁지를 매입해 공원을 만들었다.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경희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작업이 여러 차례 이뤄졌다. 이후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역사박물관 등이 들어섰고, 숭정전 및 자정전 일대가 복원대 2002년에 시민에게 공개됐다. 그리고 현재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경희궁 터 위에 몇 개의 전각만이 궁으로서의 흔적을 증언해 주고 있을 뿐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70년 경희궁터에 있었던 서울고등학교 전경.

옛궁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경희궁은 고종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그 필요성이 없으졌으며, 그 뒤 순차적으로 전각들이 헐어졌다.

경희궁의 공허지와와 고종대의 활용
경복궁 중건이 있었던 고종 대를 거치면서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경희궁의 빈터는 토지로 개간되어 용동궁 등 4개의 궁에 분배됐고, 화폐를 만드는 곳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양잠소가 설치되기도 했다. 또 1899년 독일의 하인리히 친왕이 방한했을 때는 제국의 면모를 드러내 보이는 관병식이 진행되었다. 1902년에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는 운교가 놓이는 등 몇가지 시도기 있기는 했으나, 궁궐로서의 역할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 한성부지적도(漢城府地籍圖), 1908년

현재 세종로 사거리에서 서울역사박물관 입구에 이르는 새문안로와 경희궁 주변지역이다. 우측 경계물길은 백운동천이며, 표기된 다리는 송기교(松杞橋)이다. 그 아래 태평로 신교(新橋)가 표기되어 있다. 도로 한가운데로 서대문으로 연결되는 전차 선로가 표시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2. 경희궁내신기전사궁분배도양안(慶熙宮內新起田四宮分排都量案), 1868년

1868년 5월과 1870년 3월 두 번에 걸쳐 경희궁 내의 전(田)을 명례궁, 용동궁 등 4궁에 분배한 뒤 개간한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3.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1865년.

8월22일 기사에는 경복궁의 복원에 필요한 자재의 마련을 위해 경희궁을 훼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서궐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 사현합, 흥정단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좋은 것을 골라서 나인간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이날부터 궁궐의 뜰에 깔린 전석과 층계석을 뽑아내어 먼저 광화문 역소에 사용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4. 육전조례(六典條例), 1867년.

가위장(假衛將) 혹은 공궐위장(空闕衛將)이라고 불리며, 조선후기 왕이 거주하지 않는 빈 대궐의 수비를 담당한 관직이다. 왕은 보통 창덕궁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경복궁.경희궁.창경궁에 설치되었고, 그 수는 각각 3인씩이었다. 다만, 왕이 경희궁으로 옮겨 거주할 때는 경희궁의 공궐위장이 창덕궁으로 이설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5. 진신(搢紳), 1890년.

1890년도의 관직표로 이 당시 경희궁은 빈 궁궐이었기 때문에 공궐위장이 3인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6. 화약통(19세기), 7. 주화당오전(鑄貨當五錢),

화약통, 흥화문 주변 행각에 화약을 제조하는 자초소가 있어서 근처 창고에 땔감을 쌓아 놓기도 했다. 1883년에는 화약이 폭발하여 흥화문이 소실되었으나 바로 복구되었다. 주화당오전(鑄貨當五錢), 개항 이후 정부는 막대한 개항정비, 외국사건에 대한 보상금, 신식군대의 설치비 등을 부담학 되어 재정의 궁핍은 가속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재정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1883년 당오전을 주조, 발행하게 되었고 경희궁에서 이 화폐를 주조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8. 왕궁사(王宮史), 1954년

9. 황학정, 일제강점기

사직단 뒷편 언덕으로 옮겨진 황학정. 당시 모습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황학정은 1899년 회상전 북쪽에 세운 사정(射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22년 전매국 관사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인왕산 아래 현재의 사직공원 북쪽의 등과정 옛터로 옮겨졌으며 현재도 그 위치에 남아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0. 1902년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했던 홍교가 설치된 사진이다.

고종은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여 두 궁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다리 밑으로는 2개이 출입로가 있으며, 이 밑으로 전차가 달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08년 무렵에 홍교는 사라졌다., 로세티 촬영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1. 흥화문 유리원판 사진, 1905년,

유리원판 필름이다. 숯을 지게에 지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 뒤로 흥화문이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2. 서울부분도, 1901년, 콜로넬 브라운스 제작,

경희궁 터에 뽕나무 궁궐(Mulberry Palace)이라고 표시된 지도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주변시설 변화
조선시대 훈국신영이 있던 자리에는 신식 군대의 초급 장교를 육성하는 무관학교가 들어섰고, 일본의 경의 철도 부설에 대항한 서북철도국도 잠시 이 근처에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도 무관학교 동쪽에 있다가 철폐되었고, 같은 자리에는 1908년에 신연극의 출발지인 원각사가 생겼다.당주동 일대에는 근대식 학교인 사립흥화학교와 새문안교회, 구세군회관 등 종교시설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에는 ‘변화와 개화’를 보여주는 새로운 경관이 펼쳐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 경성부시가도 부분

2, 무관학교 전경, 1890년대


3. 무관학교 도면, 1909년,

서대문내각부관사부지평면도로 무관학교의 배치도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동쪽에 무관학교가 위치하고 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4. 전차개통식, 1899년,

1899년 동대문에서 거행된 전차 개통식 광경이다. 행사장 간이천막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이며, 한국 사람들이 이 전차를 ‘Devil Car’라고 불렀다고 기사에 적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5. 법규유편(法規類編), 1908년,

협률사 자리에 잠시 있었던 서북철도국은 1902년 경의선을 부설하기 위하여 궁내부에 설치되었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의 일환으로 군용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이 국은 폐지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5. 협률사 사진,

협률사는 현재 새문안교회와 대우빌딩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기관으로 1902년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공연장이었다. 1906년 경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고 2년 후 원각사로 재개관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중학교의 건립
경희궁이 궁궐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상실하고 새로운 위상이 부여된 것은 1910년 경성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학교 건립 초기인 1909년에는 독립관 일대를 교사를 활용하다가 1910년에 경희궁 터에 건물을 완공했다. 그때까지 유지되던 숭정전 등 일부 전각은 경성중학교 교사로 사용됐고, 이전 시기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던 공허지는 학교 운동장이 된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그나마 몇 개 남아 있던 전각마저 외부에 매각됨으로써 경희궁 건물은 잔해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경성중학교는 1932년 대화재로 목조 건축인 본관 등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935년에 신축 교사를 완공함으로써 새로운 위용으로 학교의 모습을 일신시켰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중학교 신축교사.

경성중학교 건물

2. 경성중학교 엽서, 1913년

3. 경성중학교 모자, 일제강점기

4. 경성중학교 교우회지, 일제강점기

5. 경성발달사, 1912년.

경성중학교의 전신인 통감부중학교의 설립 배경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독립관을 학교 시설로 사용하게 된 내역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6. 경성부사, 1934년,

경희궁 부지를 조선총독부에서 차입한 내용이 실려 있다

7. 경성부사, 1934년,

경성중학교 시절 현존하고 있던 회상전과 벽파담 사진이다. 담 너머로는 확학정이 보인다.

잠식당하는 경희궁 영역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만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1908년에 경희궁 주변에 관사를 짓기 시작했고 1922년에는 궁의 부지 동쪽 부분을 잘라 내고서 그곳에 직원용 관사를 건설했다. 경희궁 북서쪽의 지대가 높은 송월동에는 경성측후소가 근대식 건축물로 1932년에 건립됐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막바지로 치닫는 전황 속에서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한 방공호가 경성중학교 내 숭정전 동쪽 행랑 부근에 건설되었다. 현재 이 시설은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태령전 발굴유물

경희궁배치도


1.시구개정예정계획 경성시가전도, 1913년,

시구개정예정노선도가 표시된 지도이다. 현재의 세종로사거리에서 서대문으로 향하는 도로가 확장 표시되어 있다. 이 사업으로 인해 경희궁 남쪽 영역이 잘려나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2. 관사부지 설계도, 1920년대,

경희궁 주변과 경희궁 동쪽부지에 들어선 관사 설계도이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동쪽편 주택가가 관사 자리이며, 일부 관사는 개조되어 음식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3. 조선과 건축, 1935년,

일제강점기 경성에 지어진 관사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사진이다. 표준적인 관사의 유형이 있었으며, 고급 관료 주택의 경우 넓은 대지에 화려한 외관으로 건축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4. 국유임야대부대장사본, 1935년,

1935년 경성부 도시계획계에서 작성한 ‘국유임야 대부대장’ 사본으로, 조선총독부 관유지의 대부사항을 기록하고 있으며, 경성중학교 부지와 전매국 관사 부지도 포함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5. 경성부 방공시가지 계획조사서, 1937년,

일본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전시체제의 일환으로 경성에 여러 전쟁에 대비한 시설을 설치하였다. 지하전차, 지하공동구, 신설저수지, 대피소 등이며 넓은 경성중학교 부지는 유사시 대피할 장소로 지정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 방공호가 1944년 설치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새문안로의 변화
대한제국기 전차의 개설은 새문안로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98년에 흥화문에서 전차기공식이 열렸고 이듬해 본격적으로 새문안로에 전차가 운행되어 서대문 성문 사이로 전차가 지나갔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경성시구개수사업의 일환으로 1915년 도로가 확장되고 서대문이 헐려나갔다. 이 와중에 종로와 맞닿아 있던 흥화문은 위치가 변경되어 동향에서 남향이 되었고 경희궁의 남쪽 권역도 일부 잘려나가게 되었다. 도로 폭이 좁고 지대가 높아 통행이 불편했던 새문안로가 통행의 ‘편리’를 위해 개수된 것은 기존의 공간 질서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6. 경성시구개정사업 회고이십년, 1930년,

경성시구개정사업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는 사진첩이다. 서대문로의 확장으로 인해 동향이던 흥화문이 남향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7, 1899년 전차가 개통되어 서대문 성문 사이로 전차가 지나가는 사진이다.

8. 서대문 입체사진

서울고등학교의 설립
광복 이후에도 경희궁은 학교부지로 활용됐다. 경성중학교는 1946년에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 서울고등학교의 전신인 서울공립중학교로 개교했으며,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인 1980년까지 이곳에 있었다. 서울고등학교는 경희궁 터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고적의 흔적을 간직한 최고의 명문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 서울고등학교 교명판,

2. 경희 제4집, 1952년. 3.서울고등학교 교지 창간호

4. 서울고등학교 연혁집

5. 서울고등학교 요람, 1965년


6. 서울고등학교 사진집, 1950년대


7. 경희신문, 1961년,

서울고 배치도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방공호는 ‘지하체신국’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곳은 1970년대까지 체신국에서 활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8. 서울고 1회 졸업앨범, 1949년

9. 서울고 졸업앨범, 1953년

10. 서울고 졸업앨범, 1962년

11. 유적 조사 자료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학교에 남아 있는 경희궁의 유적물을 조사한 자료이다. 숭정전의 답도와 축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980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2. 서울고등학교 부지가 현대건설에 매각된 관계를 나타내는 문서이다. 1980년

<출처>
1. 서울역사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