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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무섬마을, 무섬자료전시관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에 있는 자료전시관이다. 조선후기에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터를 잡고 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온 내력을 설명해 주고 있는 곳이다. 마을은 삼면이 내성천에 접해 있어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의미로 무섬마을이라 불린다. 마을에는 해우당고택을 비롯하여 규모가 큰 저택을 비롯하여 까치구멍집, 겹집 등 다양한 형태의 한옥들이 남아 있다. 전시물들은 마을이 배출한 주요 인문들이 남긴 글, 국가로부터 받은 교지, 집에 걸었던 현판 원본 등이 있다.

<무섬마을 남쪽 끝에 위치한 자료전시관>

마을의 오랜 내력과 각 집안에서 소장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휘도는 물길 위에 쓰여진 무섬의 역사
무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1642~1793년)가 이 마을에 들어와 만죽재를 건립하고 터전을 개척하면서부터였다. 무섬의 서편 건너 마을인 머럼에 거주하던 박수가 현종 7년(1666년)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후, 그의 증손서인 선성김씨 김대(1732~1809년)가 처가 마을인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두 집안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인구가 늘면서 구한말에는 120여가구에 주민 500명이 살았을 만큼 번성했지만,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주민들의 이농이 늘면서 마을의 규모가 점차 줄어 한때는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시행한 ‘영남 북부 유교문화권사업 정책’으로 전통마을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되찼았다. 현재 마을에는 만죽재와 해우당을 비롯하여 총9점의 지정문화재가 있고, 100년이 넘는 고택도 16동이나 남아 있어 조상들의 자치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무섬마을 모형>

내성천이 3면을 휘감아 돌아가고 있어 작은 섬이나 반도같은 형세를 하고 있다. 마을 집들은 내성천을 향한 서남향을 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 무섬마을
무섬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동쪽 일부를 제외한 3면을 휘돌아 흐르고, 내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학 상으로는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습의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 형국이라 하여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힌다. 무섬마을은 태백산 줄기인 학가산의 수려한 구릉에 안겨 서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 서쪽 앞을 지나는 내성천이 주된 경관을 이뤄 대부분의 주택이 강을 향하여 배치된 서남향 집이다. 강과 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받기 위해서다. 또 무섬마을에는 우물이 없다. 풍수리학 상 우물을 뚫으면 마을이 가라앉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식수는 빗물을 모아두거나 강에서 얻었다고 한다. 자연지리적인 길지를 최대한 활용하되,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자연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던 무섬 사람들, 이처럼 무섬마을은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마을을 조성했던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일궈낸 길지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만죽재 행장, 1900년대 초, 김동진

박제연 시지, 1840년

만죽재 문방사우

선비의 삶을 살았던 무섬 사람들
무섬마을을 개척한 반남박씨 박수와 증손서인 선성김씨 김대는 고아한 선비로서, 관계에 나아가지 않고 천혜의 고장인 무섬마을을 개척하여 후손들을 위해 터전을 마련하였고, 그 후손들 또한 선대의 유훈을 이어받아 유학에 정진하면서도 부지런히 땅을 개척하며 벼슬길에 초연하였기 때문에 자손들이 번성하고 부를 축적하며 명실공이 지역 내에서 으뜸가는 집성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양성의 입향조들의 사상이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심성을 길러 도리를 다하며 수신제가에 힘썼다. 자손들 또한 벼슬길을 마다하고 오직 향리에서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학문에만 정진하며 시끄러운 세상을 멀리하고 살아왔기에 크게 출세하거나 세상에 명성을 떨친 사람이 드물었다. 이와 같은 선비 정신이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비록 쇠퇴하기는 하였지만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품격 높은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살아가고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김담 문과중시교지, 1445년

무섬마을이 배출한 선비들
무섬 사람들은 입신양명과는 거리가 먼 유교적인 삶을 살았지만 정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다. 헌종 6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역임한 박제연과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락풍, 고종 2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지낸 김휘병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음보(조상의 음덕으로 벼슬을 하는 것)로 직함을 가진 사람이 선공가감역을 지낸 김영종 외에 몇 명이 있으며, 실제 행직으 ㄹ수행한 사람은 구한말 궁내부주사를 지낸 김휘돈과 판임관을 지낸 김광규 두 명이었다. 또한 향리에서 실시하는 초시(생원 진사과)에 합격하여 진사를 역임한 사람이 4명이고, 문행이 뛰어나 후학을 양성했던 섬계 박제익, 만죽 박승훈, 동계 김휘택, 수촌 김승학은 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문절공 김담에 대한 완문, 1955~1881년

섬계회화록, 1700년대 말, 박세인

박제익(1806 ~ 1841년)
자 학중, 호는 섬계이다. 박수의 5대 주손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사서삼경을 소년의 나이에 완성하였다. 영주시에서 복원한 만죽재 내에 있는 섬계초당은 당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한 서당으로 만죽재의 이전 당호는 섬계초당이었다. 섬계 박제익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섬계회를 주최하여 계회에 참석한 선비들과 시문을 나누었다. 일찍 돌아가셔서 후학의 계보는 잇지 못하였으나 후대에 미친 글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문장이 영남일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벼슬보다는 바는 선비로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집경루관련 홍의호의 글, 1797년, 홍의호

만죽재 현판 원본, 1800년대, 박기양

박제연 병조참판교지, 1886년

박제연 시지, 1840년

오헌 현판

김홍규 진사백패, 1888년

김홍규 과지, 1888년

해우당 현판 원본, 1865~1879년 사이, 흥선대원군

4언절구시집, 1940년대, 박찬상

반남박씨 종택인 만죽재 뒷편에 있는 섬계초당.

선비문화와 계회
무섬마을은 예로부터 지역의 선비들과 계회를 통해 교류하며 친목을 도모하고 학풍을 진작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임활동을 했다. 그 대표적인 계회는 섬계회가 있다. 만죽재(구 섬계초당)에서 시작한 섬계회는 300년을 지난 현재도 그 후손들이 매년 입하일에 모임을 가지며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9개 문중으로 구성된 섬계회 회원들은 선대가 만든 섬계회를 기념하는 비를 세우기로 최근에 결의하였다. 섬계회 계원은 양반 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아들이 회원자격을 이어받아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용추계도 아름다운 용추폭포 등지에 모여 춘추로 회합하여 시문작성 등의 활동을 하였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8년)

규방가사, 1800년대

무섬마을의 규방가사
18세기 이후 영남지방 양반가의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다가 6.25전쟁 이후 거의 사라진 가사로 내방가사.규중가도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남도 일대에서 많이 지어졌으며, 영남대가 내방가사에서 온 말이다. 조선후기 부녀자들에 의해 지어져 전해진 가사의 총칭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예술성이 잘 표현되어진 조선 여류문학의 한 전형이다. 작자와 연대가 미상이 작품이 대부분이나, 조선시대의 문헌에 있으며, 특히 영남지방에서 성행하였다. 부녀자가 주로 창작하고 영창했던 한글로 된 가사체 시가로서 주제와 소재는 부녀자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여 풍류가류(아름다운 경관이나 기쁨을 노래하는 글), 기행가류(여행하면서 글을 지음), 계녀가류(시집가는 달에게 당부하는 글) 등의 유형이 있었다. 무섬마을에는 유교적인 덕목에 따라 살며 친지간의 우애, 삶의 희로애락 등을 표현하는 규방가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마을 북쪽>

일제강점기 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아도서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역독립운동가의 산실, 아도서숙
충절의 고장 무섬마을에서 가장 이름을 빛낸 것은 애국지사들의 활동거점이던 ‘아도서숙’이다. ‘아도’는 아세아 조선반도 내의 수도리의 줄인 말이고 ‘서숙’은 옛날 서당을 가리키는 말로, 1928년 10월에 열어 1933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을 때까지 무섬마을의 교육기관이자 지역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에 갔던 김화진은 취학을 하지 않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약 중 영주 청년동지들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이 공회당인 서숙은 교황 등지에서 청년운동 중인 김성규, 김용한, 김광진, 김계진 등이 모의하여 9명의 운영위원을 선출하여 공회당을 건축하고 ‘모임의 장소, 배움의 장소, 단결의 장소’로 ‘아도서숙’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 이후 문맹퇴치, 민족교육, 민족정신 고양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여 농민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펼쳐나갔다. 아도서숙 운영위원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검거와 투옥을 반복하면서도 끝까지 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무섬마을의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아도서숙’은 아쉽게도 현재 빈터만 남아 있으나 복원 예정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8년)

<무섬마을 반남박씨 입향조가 살았던 만죽재고택>

전형적인 ‘ㅁ’자형 공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무섬마을 전통가옥의 특징

‘ㅁ’자형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
무섬마을의 전통가옥은 ‘ㅁ’자형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를 띤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이 사방을 둘러싸듯 배치되어 있어 대문 밖에서는 집안의 생활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무섬마을 전통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고, 안채를 사랑채보다 높게 지어 햇볕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게 하는 것이 특징인데, 유교적 격식을 엄격하게 거주환경에도 적용한 결과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집주인 신분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 사랑채 기둥과 서남향 고가
안채와는 달리 사랑채는 밖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무섬마을 전통가옥들은 그 집 주인의 신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사랑채의 기둥을 차별화했는데, 같은 양반이라도 벼슬한 사람이 거처하는 집의 사랑채에는 원기둥을, 벼슬을 못한 사람은 각진 기둥을 세웠다. 집주인의 신분에 따라 사랑채 모양을 달리한 무섬마을의고가는 대부분 서남향이다.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산맥의 정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기 위해 가옥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